레이 반도 남단에 위치한 싱가포르는 서울(607㎢)보다 크지만 부산(750㎢)보다 작은 면적(692㎢)의 도시국가다. 경쟁자로 거론되는 홍콩(1101㎢)과 비교해도 왜소하다.

 그러나 1965년 건국의 첫 삽을 뜬 지 40년 만에 싱가포르는 일인당 국민소득 2만5191달러, 국제경쟁력 1, 2위의 선진국으로 우뚝 자리잡았다. 그런 싱가포르가 ‘미래를 향한 대장정’을 다시 선포했다. 그 ‘청사진’은 지난 8월21일 저녁, 리셴룽(李顯龍, 53) 총리의 독립 40주년 기념연설에서 드러난다.

 “40년 후 싱가포르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돼야 한다. 그때에도 지금과 똑같다면 싱가포르는 죽은 것이다. 그러기에 싱가포르를 재창조해야 한다. 경제, 교육시스템, 서비스마인드, 도시를 완전히 재창조해야 한다.”

 리 총리는 “황량한 사막에 매년 4000만명씩 몰려오는 라스베이거스를 창조한 인간의 상상력과 기업가 정신을 배우자”며, 440만여 싱가포르인들의 대단결과 분발을 촉구했다.

 사실 싱가포르는 리콴유(李光耀), 고촉통(吳作棟) 전 총리가 경제발전과 국가안보라는 대의명분 아래 개인의 자유를 엄격하게 제한해 ‘내니 스테이트(Nanny State : 보모국가)’로 불려 왔다. 거리에서 껌을 씹거나 술집에서 춤추는 것을 금지했고, 흡연이나 무단횡단조차 엄격하게 다스렸다. 동성애는 감옥행이고 <플레이보이> 잡지 같은 성인물도 판매규제 대상이다.

 세계적으로 ‘안전하고 깨끗하지만, 재미없는 금욕(禁慾)국가’의 대명사로 꼽혀 온 싱가포르가 왜 40년의 성공 행로와 단절을 선언하고 ‘변신에 또 변신을’이란 모토를 내걸고 나선 걸까.

 이런 질문에 대해 싱가포르 공무원이나 시민들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라는 한마디로 대답한다. 홍콩·상하이·한국·대만 등과의 피 말리는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는 숙명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위기에는 정공법으로 대처

 실제 싱가포르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한 전자·화학 산업 등은 요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풍부한 노동력으로 단가가 훨씬 싼 중국과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으로 이들 업체들이 줄줄이 공장을 옮기는 탓이다. 올 들어서만 컴퓨터 부품업체인 맥스터 등 외국계 전자회사들이 현지 공장을 폐쇄, 1만여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또 태국 방콕과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까지 동남아 허브를 겨냥해 경쟁에 뛰어드는 바람에  무미건조한 관리형 사회를 고수했다가는 싱가포르의 미래는 ‘불을 보듯 뻔한’ 게 현실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1997년의 아시아 금융위기와 2003년의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 증후군)라는 두 번의 국가적 사태를 통해 대위기에 몰린 호된 경험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1997년 5월과 7월, 태국과 인도네시아가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믿었던 한국마저 12월초 IMF에 긴급 지원을 요청하면서 싱가포르는 ‘풍전등화(風前燈火)’로 내몰렸다. 1998년 3분기 경제성장률은 -1.5%로 1985년(-1.6%) 이후 13년 만에 첫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 위기감이 팽배했고, 결국 그해 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뒷걸음질쳤다. 같은 해 9월의 실업률은 4.5%로 치솟았다.

 ‘해결사’로 나선 리셴룽 당시 부총리 겸 재무장관 겸 중앙은행장은 ‘정공법’으로 맞섰다. 지하철 건설, 임금인하, 부동산경기 활성화 등으로 강력한 내수회복을 추진하는 동시에 끈질긴 금융개혁으로 외국의 신뢰를 이끌어 내는 데 주력한 것이다.

 금융개혁의 뼈대는 금융기관의 건전성 확보를 위해 통화청(MAS : Monetary Authority)의 금융감독 기능과 금융정책 입안 기능을 강화하고 은행의 자기자본 비율을 높이는 것. 또 은행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위험관리에 초점을 둔 은행 검사방식을 채택해 건전 은행과 부실 은행을 구별하려는 노력을 쏟았고, 합병을 통한 은행간 대형화와 과감한 규제 철폐도 시도했다.

 이런 노력은 한국처럼 IMF 등 외부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싱가포르 정부의 자발적인 선택과 결단에 따라 이뤄졌다.

 ‘20세기의 흑사병’으로 불린 ‘사스’ 때도 싱가포르 지도부의 대처는 주목할 만하다. 싱가포르는 2002년 12월부터 다음해 7월 말까지 238명의 감염자와 33명의 사망자가 발생, 아시아에서 네 번째로 피해가 컸다. 2003년 봄에는 관광객 숫자가 60~70% 정도 격감해 고급 호텔들의 방이 텅텅 비고, 경제성장률은 0.5~1%대로 곤두박질쳤다.

 싱가포르 정부의 처방전은 ‘허리띠 졸라매기’였다. 3만여명의 ‘철밥통 공무원’들이 총대를 멘 것이다. 같은 해 7월부터 1년 동안 각 부처 장관들은 10%, 일반 공무원들은 1~9%씩 직급에 따라 월급을 깎기로 결정했다. 이 같은 조치는 사스 때문에 심각한 타격을 받은 기업들이 임금삭감을 통해 일자리를 유지하면서도 위기를 이겨낼 수 있도록 북돋우기 위한 조치였다.

 싱가포르 공무원들은 경제성장률이 -2.0%로 곤두박질친 2001년에도 경기침체의 후유증 극복을 위해 급여를 깎았다. 두 번을 통틀어 고위관리의 급여 삭감폭은 24~29%에 달했다. 그러나 1년 후인 2004년 7월, 싱가포르 공무원들은 반 달치 급여를 특별보너스로 더 받았다. 그해 1분기 경제성장률이 7.5%, 2분기는 12.3%의 초고속 성장을 기록한 데 따른 특별성과급이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리셴룽 부총리 주도로 2001년에 ‘경제검토위원회(ERC)’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휘청거리는 싱가포르 경제의 틀을 근본적으로 혁신하기 위한 중장기 비전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기업가 정신 고양을 위한 ‘전담 장관’ 지명과 ‘장관급 R&D(연구개발)위원회’ 발족, 나노테크놀로지, 포토닉스, 마이크로전자기계 등 첨단 제조업 육성방침도 이때 정해졌다.

 올 8월 리셴룽 총리가 외친 ‘미래를 향한 대변신’은 4년 전부터 ‘잉태’해 탄생한 ‘산물’인 셈이다. 리 총리는 “장관급 R&D 위원회의 위원장을 내가 직접 맡고, 국가연구재단도 부총리가 맡겠다”며 결의를 불태우고 있다. 그리하여 싱가포르를 ‘반짝이는 보석의 도시’로 만들자고 역설했다.

 이런 국가적 재난을 이겨낸 싱가포르의 미래는 비교적 밝다. CSFB 같은 국제 금융기관들은 일제히 올해 싱가포르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5%대로 보고 있고, 4분기 성장률은 6%대로 예상 중이다. 소득 2만달러가 훨씬 넘는 선진경제권 국가로선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다국적 기업 등 탈출 러시 부담

 그렇지만 싱가포르 경제의 앞날이 장밋빛만은 아니다. 가장 큰 시험대는 상하이, 홍콩, 말레이시아 등과 벌이는 허브 경쟁이다. 대표적으로 싱가포르 내 다국적 기업은 7000여개로 전체 고용의 52%, 국내총생산(GDP)의 35%를 창출하는 국부의 원천이지만, 이들의 싱가포르 탈출 현상이 눈에 띠게 늘고 있다.

 이미 GM(제너럴모터스), 필립스, 하니웰 같은 다국적 기업은 싱가포르에 있던 아태 지역본부를 상하이와 홍콩으로 각각 옮겼고, 세계 1위 선박회사인 덴마크의 머스크시랜드는 아시아 허브를 싱가포르에서 말레이시아의 탄중팔레파스 항으로 이전했다.

 싱가포르 중소기업의 30% 정도가 중국 등으로 해외이전을 추진, 성장동력의 상실이 우려되는 것도 부담으로 작용한다. 싱가포르의 독자 브랜드가 별로 없는 것도 취약점이다. 인민행동당(PAP)이 40년 동안 사실상 일당 독재를 하고 있고 정치적 표현의 자유마저 개선될 조짐이 전무한 정치적 후진성도 ‘아킬레스건’이다.

 이런 상황에서 싱가포르는 ‘마이웨이’를 걸어간다는 입장이다. 특히 교육, 의약, NGO(비정부기구), 생명공학의 허브 구축 같은 고부가가치화 전략으로 경쟁력을 높인다는 전략이다. 노바티스, 머크 같은 글로벌 제약회사들의 생산시설 유치에 성공하는 성과도 올렸다. 덕분에 올 3분기 싱가포르 제조업은 10%나 성장했다. ‘MICE’ 전략도 그 한 사례다. ‘회담(Meetings), 포상여행(Incentives), 모임(Conventions), 전시회(Exhibitions)’ 등 일반 관광객보다 두세 배 돈을 더 많이 쓰는 MICE 방문객을 집중 공략해 경제적 효율성을 최대한 높인다는 복안이다.

 중개무역항 기능 같은 과거의 성공이나 실적에 연연하지 않고 실용주의적 자세로 사회적 금기(禁忌)를 깨면서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싱가포르의 대변신은 ‘실리콘밸리형’(첨단산업)과 ‘샌프란시스코형’(생명과학 허브), 그리고 ‘라스베이거스형’(오락산업 메카)까지 아우르면서 역동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금융위기와 사스 공포라는 어둠의 터널에서 국가적 교훈을 체득하고 미래를 향해 매진하는 싱가포르 정부와 리더들의 몸부림은, 과거와 이념의 그림자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사회와 큰 대조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