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미국의 컴퓨터 제조업체 휴렛패커드(HP)사의 감원계획으로 프랑스의 보호주의 성향이 더 높아지고 있다. 지난 9월 HP는 향후 18개월에 걸쳐 전 세계적으로 1만4500명을 감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연간 19억달러의 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구조조정의 일환이다.

 지난 3월 취임한 HP의 마크 허드 최고경영자(CEO)는 취임하자마자 “HP는 많은 부분에서 고비용 사업구조를 갖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대규모의 비용절감 계획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전체 HP 직원은 4만4000명. 이번 감원계획으로 유럽에는 5900명가량이 감원 대상이다. 영국은 968명, 프랑스는 1240명이 해당된다.

 HP의 감원 소식은 나라마다 실업자가 쏟아져 나올 충격적 뉴스이지만, 유독 프랑스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HP의 감원 발표는 10%의 높은 실업률로 휘청대는 프랑스정부와 경제에 큰 부담과 우려를 안겨다 주기 때문이다.

 HP가 위치한 프랑스 남부 그르노블에서는 HP 근로자들이 쏟아져 나와 감원에 반대하는 파업 시위를 벌였다. 미셸 데스토 그르노블 부시장도 “감원계획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면서 펄쩍 뛰었다. 프랑스 노동부가 직접 HP프랑스의 경영진을 만나 감원문제를 논의하는가 하면,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까지 칼을 뽑아 들고 나섰다. 드 빌팽 총리는 10%나 되는 높은 실업률 때문에 지난 5월 프랑스 유권자들이 유럽헌법을 부결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실업과의 전쟁’을 위해 전격 총리직에 발탁된 인물이다. 그래서 실업문제에 더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프랑스 실업률은 올해 초 10.1%까지 치솟았다가 지난 6월에 9.8%로 약간 내려갔다. 올해 전체 실업률은 9.7%에 달할 전망이다. 올해 프랑스 경제성장률은 1.5%에 머물고, 무역적자는 올 7월 말까지 134억유로가 쌓였다.

 이처럼 경제에 먹구름이 드리운 판에 HP의 대량 감원 소식은 드 빌팽 총리에게는 이만저만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드 빌팽 총리는 “프랑스는 HP를 위해 각종 인프라를 지원했다”면서, “프랑스 법 테두리 내에서 고용의 의무를 다하라”고 HP에 요구했다.

 물론 프랑스정부가 목소리를 높인다고 다국적기업인 HP가 프랑스에서만 감원계획을 철회할 리도 만무하다. HP프랑스법인의 파트릭 스타크 사장은 “HP가 고용을 약속한 적은 없다. 우리는 그동안 8억4000만달러가 넘는 세금을 꼬박꼬박 내온 성실한 업체다”고 맞받아쳤다. 또한 IBM이나 델컴퓨터 등 경쟁업체와의 세계적 경쟁에서 살아남으면서 회사가 중ㆍ장기적으로 생존하려면 감원을 통한 비용절감 및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프랑스정부의 정치적 액션은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까지 팔을 걷고 나서서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에 HP문제를 거론하고 나섰다.

 시라크 대통령은 “EU집행위원회가 유럽의 이익을 보호하는 일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EU가 아시아와 미국과의 경쟁에 맞서 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배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바람에 시라크 대통령과 EU집행위원회 사이에도 미묘한 갈등이 조성됐다. EU의 경제정책 방향을 놓고 보호주의 대 개방주의 논쟁으로까지 비화된 것이다.

 시라크 대통령의 발언이 있은 이틀 뒤 EU의 귄터 페르호이겐 산업담당 집행위원은 “산업은 경쟁해야 한다”는 말로 시라크 대통령의 보호주의에 정면으로 맞섰다. 페르호이겐 집행위원은 “우리는 국가 챔피언이든, 유럽 챔피언이든 경쟁의 산물로 살아남는 강한 기업에 호의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보호주의나 보조금이라는 구시대로 되돌아갈 방법은 없다”고 쐐기를 박았다. “우리가 이상적으로 원하는 것은 예방적이고 진취적인 정책을 채택하는 것, 그리고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개방정책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앞서 주제 마누엘 바로수 EU 집행위원장도 유럽에서 확산되는 포퓰리즘(popuilism)을 강력히 비난하면서 시라크 대통령의 주장을 간접적으로 반박했다.

 프랑스가 보호주의 색채를 강하게 드러낸 것은 이번뿐만이 아니다. 지난 7월에는 다농사태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다농은 프랑스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미네랄워터 에비앙과 볼빅, 그리고 식탁에 자주 올리는 다농요구르트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대표적 식품기업이다. 세계적으로는 6위의 식품업체이다. 한데 미국의 음료업체 펩시가 다농을 인수한다는 소문이 지난 7월 증시에 퍼지고, 언론에 보도되면서 프랑스정부와 정치권이 총출동해 다농 지키기에 나섰다. 유럽 최대의 농업국가로, 또 다양하고 앞선 음식문화를 가진 프랑스가 맥도날드와 콜라로 상징되는 미국의 식품산업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이 프랑스의 자존심상 용납할 수 없는 모욕이기 때문이다.

 당시 드 빌팽 총리는 다농을 ‘프랑스 산업의 보석’이라고 부르면서 “프랑스 국익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로랑 파비우스 전 총리 등 다른 정치권 인사들도 펩시의 다농 인수에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시했다. 장 루이 보를루 노동부 장관도 “외국기업의 적대적 인수 시도를 막기 위해 프랑스정부는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다짐했다.

 프랑스 내 여론이 악화되자, 결국 미국 펩시 측은 “다농 입찰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는 의사를 프랑스 증권감독원에 전달했다”고 인수설을 공식 부인했다. 그 바람에 다농 인수설은 일단 진화됐다. 이 과정에서 다농 주가는 펩시의 인수설로 급등했다가 펩시의 부인으로 급락하며 롤러코스트현상을 빚었다.

 최근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은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전통적인 가족기업들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보도를 했다.

 프랑스의 태팅거 가문은 월가의 기업사냥꾼들과 전쟁을 벌인 지 7년 만인 지난 7월 샴페인회사와 호텔을 미국 스타우드 캐피털그룹에 매각했다. 이를 놓고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은 “70년 전통의 유럽 가족기업이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유럽에는 여전히 경영권을 유지하는 가족기업이 많다. 가령 미셸린 집안은 지난 140년간 미셸린타이어의 경영권을 유지해 왔다. 과거 10년간 스페인 등 일부 유럽국가는 가족기업에 세금감면 혜택을 주면서 이들을 지원해 왔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새 유럽에서는 가족기업과 같은 경영모델이 점점 버티기 어려운 기업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일부 유럽의 가족기업들은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대주주 지분을 줄이고 투자자들의 검증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날로 치열해지는 세계화의 경쟁에서 규모가 큰 미국기업에 경쟁력이 뒤지거나 심각한 경영압박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글로벌시대의 생존경쟁이 점점 치열해질수록 프랑스 내에서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감도 커지고 있다. 뒤숭숭한 국내 분위기에 장단 맞춰 프랑스정부와 정치권에서도 보호주의 목소리를 드높이는 분위기가 확산되는 것이다.

강경희 조선일보 파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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