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확산 여파로 원유 수요가 급감한 데다 원유 시장 선물 만기가 겹치면서 4월 20일(현지시각) 국제 유가가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사진 연합뉴스
코로나19 확산 여파로 원유 수요가 급감한 데다 원유 시장 선물 만기가 겹치면서 4월 20일(현지시각) 국제 유가가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사진 연합뉴스

4월 20일(이하 현지시각) 국제 유가가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원유 가치가 사라진 건 물론 원유를 가진 사람이 이를 처리하기 위해 돈까지 내야 하는 상황에 부닥쳤단 얘기다. 2018년 10월만 해도 배럴당 80달러 가까이 치솟았던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이제 처리를 고민해야 하는 ‘애물단지’가 됐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여파로 원유 수요가 급감한 데다 원유 시장 선물 만기가 겹친 탓이다.

5월 인도분 WTI는 이날 -37.63달러로 거래를 마쳤다. 직전 거래일인 4월 17일과 비교하면 무려 305% 폭락했다. 장 중 한때 -40.32달러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1983년 뉴욕상업거래소(NYMEX)가 원유를 거래한 이후 최저 가격이다.

원유 선물은 원유를 당장 사고파는 게 아니라 현재 가격으로 특정 시점에 인도·인수한다. 즉 5월 인도분 WTI는 투자자가 현물을 인도하는 시점이 5월이란 얘기다. 원유 선물은 매달 만기일이 있는데, WTI는 매달 25일에서 3영업일 전이 만기다. 5월물 WTI 만기일은 4월 21일이었다.

사실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 전쟁과 코로나19 확산 이후 국제 유가가 큰 폭으로 내렸지만,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비회원 산유국 연합체인 OPEC+의 감축 협의 이후 시장 관계자들 사이에선 더는 원유 가격이 내리지 않을 것이란 기대감이 있었다.

불과 4월 12일만 해도 주요 산유국 23개국이 참여한 OPEC+는 5~6월 하루 970만 배럴의 석유 생산량을 감축한다고 밝혔다. 다음 날에는 이들과 미국 등 비(非)OPEC+ 국가를 합하면 감산 규모가 하루 최대 2000만 배럴에 이를 수 있을 것이란 ‘희망적인’ 전망도 나왔다. 전 세계 하루 석유 소비량은 1억 배럴가량이다.

5월물 가격이 곤두박질친 본질적인 이유는 수요 급감이다. 코로나19로 산업 활동이 급격하게 줄었고, 국가 간 교역도 사실상 중단됐다. 로이터통신은 세계 최대 석유 소비국인 미국의 석유 소비량이 지난 4주 동안 3분의 1 수준으로 감소했다고 보도했다. 항공기에 쓰이는 제트연료 소비는 73%, 휘발유는 48% 감소했다. 전문가들은 최근 원유시장을 90년 만에 최악의 수급 불균형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원유 시장 선물 만기일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더해지면서 충격의 강도가 커졌다. 선물 만기일을 앞두고 투자자들이 5월물을 인수하기보다 6월물로 갈아타는 ‘롤 오버’를 선택한 것이다. 5월물을 사봤자 이를 소화할 수 있는 항공·선박 수요가 없는 데다 이를 보관할 만한 저장 시설도 없어서다.

국제 유가가 회복할 것이란 기대감은 여전히 살아있다. 다만 코로나19 확산이 어떤 양상으로 바뀌느냐에 따라 언제든 국제 유가가 출렁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헤리마 크로프트 RBC 캐피털마켓 글로벌 원자재 전략 대표는 “원유 시장 전망은 단기적으로 매우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4월 21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한 주유소. 주유하는 차량이 단 한 대도 없다. 사진 연합뉴스
4월 21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한 주유소. 주유하는 차량이 단 한 대도 없다. 사진 연합뉴스

연결 포인트 1
수요 붕괴로 가격 회복 쉽지 않아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전부터 원유 수요는 점점 줄어들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19 세계 에너지 전망’ 보고서를 통해 전 세계 원유 수요가 앞으로 10년간 더디게 늘어나다 2030년부터 증가를 멈출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수요가 쪼그라들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코로나19 사태가 ‘도화선’이 된 셈이다.

현재 미국 원유 수요는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하루 300만~500만 배럴까지 준 것으로 추정된다. 코로나19 확산 이전과 비교해 전 세계 원유 수요는 3분의 1 정도가 사라졌다. 전문가들은 적어도 2021년까지 원유 수요가 예전 수준으로 회복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존 켐프 로이터통신 시장 분석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경제적 충격에 부닥친 기업과 가계가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고 있다”면서 “올해 하반기와 2021년까지 얼마나 많은 경제적 생산과 석유 소비가 영구적으로 사라질 것인지가 문제”라고 말했다.


초유의 마이너스 유가에 OPEC이 추가 감산을 논의할지 관심이 쏠린다. 사진 연합뉴스
초유의 마이너스 유가에 OPEC이 추가 감산을 논의할지 관심이 쏠린다. 사진 연합뉴스

연결 포인트 2
OPEC, 또 감산 나설까

5월 1일부터 OPEC+의 감산이 시작된다. 산유국들은 역대 최대급의 감산 합의를 이뤄냈지만, 일각에선 OPEC이 추가 감산에 나설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수요가 워낙 없어 원유가 남아도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데다 셰일 업체의 줄도산을 막아야 한다는 미국의 의지도 강해서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4월 10일 기준으로 미국의 원유 재고량은 전주보다 1920만 배럴 증가해 5억360만 배럴을 기록했다. 시장 예상치인 1010만 배럴을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골드만삭스는 OPEC+의 감산 합의에 대해 “역사적이지만 불충분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OPEC 회원국들도 감산을 서두르는 분위기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4월 20일 사우디아라비아와 OPEC 회원국들이 5월까지 기다리지 않고 당장 원유 감산에 돌입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문제는 수요다. 중국 정부가 공장을 재가동하는 등 경제 활동을 재개했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5월 전에 경제 활동을 재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제 유가가 급락하자 유가 회복을 기대하는 투자자들이 ETN 등 파생상품에 몰리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국제 유가가 급락하자 유가 회복을 기대하는 투자자들이 ETN 등 파생상품에 몰리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연결 포인트 3
개미 몰리는 원유 상품

원유 가격이 급락하면서 개인 투자자들이 관련 투자 상품에 몰리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투자에 유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국거래소에 상장된 ‘신한WTI원유 선물 ETN(H)’의 경우 지난 2월 일평균 거래량은 3117~4만89주에 불과했다. 하지만 4월 들어 수십만 주를 기록하며 거래량이 급증했다. 특히 사상 초유의 마이너스 유가를 기록한 4월 21일 이 상품의 하루 거래량은 397만 주에 달했다.

ETN은 주식이나 채권, 원자재 등 기초 지수 수익률과 연동하도록 증권회사가 발행한 파생결합증권이다.

전문가들은 매달 원유 선물 만기가 돌아오기 때문에 선물 가격이 현물보다 높은 콘탱고 상황에선 롤오버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되면 원유 상품 투자 수익률이 원유 선물 가격 상승률을 밑돌 수 있다. 또 국제 유가 변동 폭이 여전히 커 투자에 유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진호 미래에셋대우 연구원은 “향후 롤오버나 저장소 확보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