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민 WTCS 대표 광운대 경영학 박사, 한국무역협회 전 FTA 통상연구실장·전 베이징 지부장·전 국제무역통상연구원 원장
최용민
WTCS 대표 광운대 경영학 박사, 한국무역협회 전 FTA 통상연구실장·전 베이징 지부장·전 국제무역통상연구원 원장

1983년 국내 한 기업은 반도체 개발에 나서겠다고 선언한다. 얼마 전까지 원조에 의존하던 허약한 나라의 기업이 내뱉은 말은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당시에도 반도체는 세계 최고의 기술이 아니면 생산할 수 없는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업은 6개월 만에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을 개발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후 선발 기업과의 격차를 좁히면서 D램 분야에서 미국과 일본을 제치는 신화를 만들었다. 이런 반도체 신화 탄생 후 반도체는 단일 품목으로 연간 1000억달러(약 112조원)의 수출고를 넘나들면서 당당히 한국을 대표하는 상품이 됐다.

반도체가 디지털 시대의 핵심 부품이자 ‘산업의 쌀’로 불리는 것을 고려하면 한국 경제에 있어 삼성전자의 ‘반도체 신화가 없었다면’이라는 가정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특히 미·중 간 갈등 국면에서 첨단 제품의 핵심 부품이자 전략 무기로 여겨질 정도다. 반도체가 부족해 일반 자동차 생산에 브레이크가 걸리고, 자율주행차와 5G(5세대 이동통신) 그리고 인공지능(AI), 양자 컴퓨팅, 클라우드 등과 관련된 기술도 반도체 없이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반도체 리더(국가)가 세계의 산업 강국이자 외교적 리더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과장이 아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월 24일 백악관에서 자국 반도체 공급망 재검토를 지시하며 반도체 칩을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로이터연합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월 24일 백악관에서 자국 반도체 공급망 재검토를 지시하며 반도체 칩을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로이터연합

안보적 전략 무기, 국가 경쟁 대상으로

중국은 지난 30년간 반도체 독립을 위해 사활을 건 노력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백억달러를 투입하고 우수 인력을 영입했지만 아직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팹리스(fabless)에서 중국의 시장 점유율은 20% 수준에 머물고 있고, 팹리스 기업과 계약을 맺어 반도체 위탁생산을 하는 파운드리(foundry)에서는 그 비율이 10%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 반도체 설계부터 생산까지 모든 공정을 수행하는 종합반도체 시장의 점유율은 1%로 걸음마 수준이라는 평가다.

중국의 반도체 관련 기업 수는 5만 개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된다. 이들은 그동안의 성과에 실망하지 않고 사모펀드 등을 동원한 머니게임과 인수합병(M&A)을 통해 인재와 기술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궁극적으로 중국 기업들은 미국의 공급망에서 벗어나는 ‘반도체 토착화(독립)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반도체 굴기로 표현될 정도로 중국에서 민관이 힘을 합치고 있지만 반대로 미국의 견제는 더욱 심해지는 모양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화웨이에 대한 반도체 공급 중단이다. 미국 장비나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생산된 반도체가 중국으로 흘러들어 가는 것도 막아 사실상 봉쇄령을 내린 것이다.

최근 들어 미국 정부와 반도체 업계도 위기감에 휩싸였다. 글로벌 반도체 생산량에서 미국의 점유율은 1990년 37%에 달했으나 최근 12%까지 추락한 상황이다. 더구나 2030년에는 10%까지 뒷걸음질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분석을 바탕으로 미국 정부도 반도체에 대한 지원에 팔을 걷어붙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행정명령을 통해 공급망 안정화 방안 검토에 들어갔다. 그 대상으로 반도체, 배터리, 전략 물자 등을 지목했지만 통신, 국방, 에너지, 운송 등과의 연관성을 고려하면 사실상 반도체 공급망 강화를 위한 행정명령이라는 주장도 있다.

세계 반도체 생산에서 22%라는 높은 점유율을 확보한 대만은 미·중 간 반도체 갈등을 주시하고 있다. 특히 대만이 생산하는 반도체의 절반 정도는 최첨단으로 차별화된 품질을 자랑해 중국과 대만 간의 관계 설정에 따라 글로벌 반도체 수급 불안이 가중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의 한 칼럼니스트는 “냉전 시대에 서베를린에서 최첨단 제트엔진이 생산됐는데 그 당시 동베를린에 주재한 소련의 붉은 군대에 의해 포위된 것과 지금의 대만 반도체 공장이 중국의 군사위협에 노출된 것이 비슷한 구도”라고 했다. 한마디로 대만의 반도체를 누가 지배하느냐가 글로벌 패권의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유럽은 최근 디지털 전환의 비전과 실행 방안을 담은 ‘2030 디지털 컴퍼스(compass)’라는 로드맵을 내놨다. 이 자료의 핵심은 유럽연합(EU) 기업들의 반도체 시장 점유율이 현재 10%대에 불과해 이를 2030년까지 두 배로 높이겠다는 것이다.


각국의 직간접적인 지원…공정성 논란

최근 각국이 경쟁적으로 반도체에 대한 직간접적인 지원을 하면서 공정성 논쟁을 가열시키고 있다. 미국의 반도체산업협회는 향후 10년 안으로 미국 내 반도체 생산량이 56% 증가해 글로벌 점유율(생산량 기준)이 14%로 높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그 근거로 미국 내 반도체 산업 지원금(공장 건설 비용)이 500억달러(약 56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수치를 내세웠다. 이 협회는 막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독일과 함께 반도체 공장 건설에 대한 지원금이 비용의 10%로 낮은 편이라고 분석했다. 공장 건축비에서 정부 인센티브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는 중국과 이스라엘로 30%이며, 그다음은 한국, 대만, 싱가포르로 각각 25%라는 수치가 나돌고 있다. 일본은 15%로 미국과 한국 사이였다.

결국 시장만능주의를 주창한 미국 정부도 시장에 맡겨서는 반도체 헤게모니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 ‘반도체에 한해서는 시장에 의한 경쟁과 조절’을 포기한 느낌이다.

글로벌 강국들이 반도체에 사활을 거는 이유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반도체는 일반 상품이면서 상품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다. 자동차와 TV 등은 경쟁력이 없으면 해당 상품만 수입하면 되지만 반도체는 수천 개 상품의 경쟁력과 기술의 구현에 영향을 미쳐 대체가 힘들다. 반도체를 건물로 치면 벽돌에 해당하는데 벽돌 없이 건물을 지을 수 없는 것과 같은 논리다. 각국이 반도체에 막대한 자원을 아끼지 않고 있지만 그 누구도 모든 반도체의 자급자족이 힘들다. 반도체 전쟁은 어쩌면 이제 시작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