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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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민 WTCS 대표 광운대 경영학 박사, 한국무역협회 전 FTA통상연구실장·전 베이징 지부장· 전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최용민 WTCS 대표 광운대 경영학 박사, 한국무역협회 전 FTA통상연구실장·전 베이징 지부장· 전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글로벌 시대에 이웃하고 있는 국가의 경제적 희생을 통해 자국의 발전을 도모하려는 정책을 ‘근린궁핍화정책(Beggar my neighbor policy)’이라고 한다. 모든 국가가 그물망처럼 연결된 상황에서 환율 상승, 보조금 지급과 수입 관세율 인상으로 수출품 가격은 낮게 하고 수입품 가격은 높게 해 국내외 시장에서 자국 상품의 판매량 증대를 통해 나홀로 경제 부흥을 도모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에 의해 주도된 플라자합의가 거론된다. 1985년 9월 22일 뉴욕에 있는 플라자호텔에서 미국, 일본, 영국, 독일, 프랑스로 구성된 주요 5개국(G5)의 재무장관들이 각국의 외환 시장 개입으로 발생한 달러화 강세를 시정하기로 결의한 조치를 말한다. 당시 미국 측은 달러화 가치 상승이 세계 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점의 원인이라고 지적했지만 내심 강달러로 미국 기업의 대외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으니 여타 국가들이 양보하라고 강요한 것이다.

이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의 단초가 됐다. 플라자합의가 실행에 옮겨지면서 독일 마르크화는 1주 만에 달러화에 대해 약 7%, 엔화는 8.3% 각각 오르는 즉각적인 변화가 나타났고, 이후 2년 동안 달러화 가치는 30% 이상 급락했다. 덕분에 미국 제조 업체들은 달러화 약세로 높아진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1990년대 들어 해외 시장에서 승승장구하면서 미국 경제가 회복세를 찾아갔다. 반면 일본은 엔고로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이 하락하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그 후유증으로 일본 내 좋은 일자리가 줄고 해외로 유망한 기업의 탈출이 잇따르면서 약달러의 희생양이 됐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것이 지금은 ‘잃어버린 30년의 시발점’이라고 대부분이 동의한다. 만약 한 나라가 환율을 올리면(자국 통화가치 하락을 통해 수출품 경쟁력을 제고) 곧바로 다른 나라도 같은 조치를 취하기 때문에 환율 전쟁이 발생하고 결국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면서 근린궁핍화정책은 용두사미로 끝나지만 플라자합의는 달랐다. 초강대국 미국이 주도한 정책에 여타 나라가 역공을 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에 이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이전과 전혀 다른 형태의 환율 전쟁을 야기하고 있다. 팬데믹 이후 인플레이션이 글로벌 현상으로 떠오르면서 많은 나라가 금리를 올려 물가 잡기에 나서고 있다. 미국이 이런 움직임에 기관차 역할을 수행하면서 각국의 환율이 요동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달러화는 안전자산이라는 기본적인 이점에다 최근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금리를 잇달아 올리면서 높은 이자라는 추가 혜택이 더해져 강달러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팬데믹이 발생하면서 각국 정부가 취한 정책의 핵심은 돈을 풀어 약자를 돕고 일자리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돈만 찍어내면 되는 미국이 가장 앞장섰고, 여타 국가들도 적정수준을 넘어서 돈 풀기에 경쟁적으로 나섰다. 올해 2월 나라살림연구소가 조사(2020년 12월 말 기준)한 바에 따르면 팬데믹 대응에 가장 많은 돈을 투입한 나라는 미국으로, 그 규모가 4조130억달러(약 5112조원)에 달했다. 이어 일본(2조2110억달러·약 2816조원), 독일(1조4720억달러·약 1875조원), 영국(8870억달러·약 1130조원), 이탈리아(7900억달러·약 1006조원)순으로 나타났다. 이를 상대적 지출 규모로 전환해 보면 일본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팬데믹 관련 지출액 비율이 44%로 가장 높았고, 그 뒤는 이탈리아(42.3%), 독일(38.9%), 영국(32.4%), 프랑스(23.5%) 등이었다. 미국은 19.2%이고 한국은 13.6%로 낮은 수준이었다.

경쟁적인 돈 풀기는 물가 상승을 통해 글로벌 경제에 태풍을 몰고 오고 있다. 지난해부터 각국의 물가 상승률은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원자재 보유 강국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전쟁에 휘말리면서 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하는 곡물 등이 속출하고 첨단산업용 핵심 소재 확보 전쟁은 일상이 되고 있다. 올해 4월에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8.3%나 뛰어올랐다. 무려 40년 만의 최고 기록이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여파로 미국의 4월 식료품 가격은 9.4%나 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를 살리기 위한 응급 처방은 빠른 속도의 금리 인상이었고, 이에 따라 달러화가 미국으로 회귀하고 있다.

미국이 단기적으로 자국 기업의 경쟁력 약화를 감수하면서 고금리 정책을 쓰는 이유는 명확하다. 현재로선 높은 인플레이션을 잡지 않으면 중장기적으로 경쟁력 기반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미국의 고금리는 여타 국가의 높은 환율이라는 나비효과를 필수적으로 야기한다는 점이다. 수출에 도움이 되는 고환율은 얼핏 환대받을 것 같지만 물가 상승기에는 독이 된다. 해당국의 통화 가치가 낮아지면서 수입된 원자재 가격이 높아져 인플레이션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국처럼 대부분의 원자재를 해외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높은 환율은 물가 상승을 넘어 수출품 원가도 끌어올려 대외 경쟁력 약화를 부채질하게 된다. 

각국이 금리를 올려 환율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미국의 속도가 워낙 빨라 효과를 보기 힘든 상황이다. 연준은 올해 5월에 금리를 한 번에 0.5%포인트 올린 데 이어 당분간 비슷한 추세가 이어질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미국발 금리 인상 붐은 들불처럼 각국에 부작용을 양산하고 있다. 지난해 1월 2%대를 기록했던 브라질 중앙은행 금리는 5월에 12.75%로 6배 이상 치솟아 현기증 나는 상승세를 보였다. 올 들어 통화 가치가 20% 이상 하락한 터키는 국내외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금리를 낮추는 역주행을 하면서 급격한 환율 상승을 막기 위해 외환 보유고를 지속적으로 풀고 있다. 

일본도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큰 피해를 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올해 4월 말에 엔·달러 환율이 131엔(약 1274원)까지 치솟아 20년 만에 처음으로 130엔을 돌파했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거래량이 많은 엔화가 올 들어 다른 통화 대비 가장 크게 떨어지면서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전 총리의 경제 정책)가 일본 경제에 심각한 우려를 심어 주고 있다. 아베노믹스는 시중에 막대한 돈을 풀어 의도적으로 엔저를 유도하면서 세계 시장에서 일본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올려 수출액을 늘리면서 경제 성장을 일구겠다는 구상이지만, 미국의 금리 인상과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로 아베노믹스는 마이너스 금리(-0.1%)를 포기하거나 초엔저로 높은 원자재 가격을 감수해야 할 상황이다.


고금리·고물가·채산성 악화 삼중고

결국 원자재 가격이 고공행진을 하는 상황에서 대외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은 고금리와 고물가, 채산성 악화라는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이는 다시 임금 등 생산 요소 가격을 끌어올리는 악순환으로 연결돼 환율 상승이 오히려 대외경쟁력을 갉아먹게 된다. 결국 미국이 금리를 올리는 것은 해외로 인플레이션을 수출하고 있는 셈이다. 더불어 대외 부채가 많은 신흥국은 달러화 유출로 유동성 부족에 시달리면서 외환위기에 직면할 수도 있다. 재무건전성이 낮은 기업들도 이자 부담이 늘면서 경영에 빨간불이 들어오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미국의 고금리 정책으로 신흥국의 60% 정도가 대외 부채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환율 변동은 단순히 가격 이전 효과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자와 물가에 영향을 미치고 대외 채무 상환을 어렵게 해 글로벌 경기 침체로 연결될 수 있다. 낮은 금리가 경제 성장에 필요한데 미국으로 빨려 들어가는 달러화를 잡기 위해 높인 금리는 투자를 줄여 성장세에 브레이크를 걸고 주식시장 등 금융시장도 경색으로 내몬다. 특히 국가 신인도가 낮은 개도국은 타격 정도가 더욱 심할 수밖에 없다. 흔히 인플레이션은 자산가의 재산을 불리는 반면 생필품 가격을 밀어 올려 저소득층의 생존을 더 힘들게 하면서 빈부 격차를 키운다. 비슷한 이치로 환율과 이자율을 통한 국가 간 인플레이션 이전은 개도국의 삶을 더욱 팍팍하게 만든다. 허약한 체질에다 증폭되는 나비효과로 인해 환율과 이자율의 출렁거림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세계무역기구(WTO)와 IMF의 다자간 협의체 입김도 그 어느 때보다 낮아 미국의 위상이 더 강화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