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펠로시(왼쪽)미국 하원의장이8월 3일 대만 타이베이 총통부에서 차이잉원 대만 총통과 만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로이터뉴스1
낸시 펠로시(왼쪽)미국 하원의장이8월 3일 대만 타이베이 총통부에서 차이잉원 대만 총통과 만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로이터뉴스1
‘미국 권력 서열 3위’인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8월 2~3일(이하 현지시각) 대만을 방문한 이후 후폭풍이 몰아치면서 미·중 갈등이 다시 고조됐다. 더 강경해진 중국의 군사 위협으로 대만 해협의 글로벌 공급망 역할이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펠로시 의장은 1997년 이후 25년 만에 대만을 찾은 미국 최고위급 인사다.

 

중국은 펠로시 의장이 중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대만을 방문하자 펠로시가 떠난 바로 다음 날인 4일부터 대만을 포위하는 형세로 나흘 일정의 군사훈련을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훈련은 사흘 더 연장돼 10일 마무리됐지만, 중국은 향후에도 훈련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악화한 미·중 관계는 앞으로 군사는 물론 정치·경제 분야까지 연결될 것으로 보인다. 미·중 모두 중간선거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3연임 등 대형 정치 이슈를 앞두고 있어 내부 결속용으로 서로를 이용할 가능성이 큰 만큼 지금의 갈등이 봉합될 여지는 당분간 적어 보인다.


대만 해협 글로벌 물류 채널 역할 위축 우려

대만을 담당하는 중국의 인민해방군 동부 전구는 10일 성명을 통해 실전 훈련을 중단한다고 발표하면서 “대만해협 정세의 변화를 주시하며, 지속해서 훈련과 전투 대비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훈련에서 중국은 사상 처음 대만 상공으로 미사일을 발사하고 대만해협 중간선을 넘어 전투기를 비행시켰다. 대만해협 중간선은 1954년 12월 미국과 대만 간 상호방위 조약을 체결한 후 1955년 미국 공군 장군인 벤저민 데이비스가 중국과 대만의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해 선언한 경계선이다. 조지프 우 대만 외교 장관은 9일 기자회견에서 중국이 전체 대만해협에 대한 통제권을 갖기 위해 군사훈련을 활용할 수 있다며 국제 해상과 항공 물류를 방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펠로시의 대만 방문이 이 지역의 글로벌 물류와 공급망과 관련 장기적인 안전에 대한 우려를 촉발했다고 분석했다. 

앞서 5일 중국은 미·중 간 전구(戰區) 사령관 전화 통화 일정을 잡지 않을 것이며 국방부 실무회담과 해상 군사 안보 협의체 회의를 각각 취소하고 기후변화 협상, 마약 퇴치, 다국적 범죄 퇴치 등 국제 이슈와 관련한 미국과의 협력도 중단한다고 밝혔다.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군사적 대화와 협력 채널을 단절한 것이다. 

중국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펠로시 의장을 제재 대상에 올렸다. 중국 입국 제한, 중국 내 자산 동결, 중국 기업·개인과 거래 금지 등이 주요 제재 내용일 것으로 예상된다. 또 9일 마자오쉬 중국 외교부 부부장은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을 비난했다. 마 부부장은 관영 CCTV와 인터뷰에서 “대만 문제는 중국의 핵심 이익인데, 미국이 이를 침해하고 중국과 무슨 협력을 원한단 말이냐”고 했다.


펠로시 “시 주석은 겁먹은 불량배”

미국도 이에 지지 않았다. 미 백악관은 8월 6일 대변인 명의로 “이런 활동은 현상을 변경하려는 중국 측 시도”라면서 “이는 도발적이고 무책임하며 오판의 위험성을 키운다”고 했다. 펠로시 의장도 일련의 중국 행동에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는 최근 자신의 대만 방문에 대해 여야 모두에서 초당파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시 주석을 “겁먹은 불량배(scared bully)”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펠로시 의장은 자신의 방문이 왜 이리 많은 관심을 받는지 의문이라면서, 올해 들어 여러 미 상원의원이 대만을 방문했을 때는 중국 정부에서 별 반응도 없었다고 꼬집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8일 대만 사태와 관련, “그들(중국)이 (지금) 하고 있는 것 이상 무엇인가를 할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했지만, 미·중 관계는 다시 시계 제로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악화한 미·중 관계는 서로 정치적인 비난과 제재를 넘어서 경제 산업 문제로까지 번지고 있다. 중국은 펠로시 대만 방문 전후로 대만에 천연 모래 수출을 중단하고, 100여 개 대만 기업 식품 수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놓았다. 세계 최대 전기차 배터리 기업인 중국 CATL은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 이후 돌연 북미 투자 계획 발표를 연기했다. 3일 블룸버그에 따르면 CATL은 수주 내 자동차 제조사인 테슬라와 포드 등에 배터리를 공급할 수십억달러 규모의 미국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번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 사태로 이를 올해 9월이나 10월로 연기했다. 

미국도 상원이 7일 통과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서 2024년부터 중국산 배터리와 부품을 쓰면 전기차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기로 했다. 또 미 상무부는 미국 내 모든 반도체 장비 업체에 14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보다 미세한 제조 기술을 적용한 장비를 중국에 수출하지 말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업체 ASML에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는 물론 구형 심자외선 노광장비를 중국에 판매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중국과 미국이 상호 경제보복을 하는 모양새다. 지정학 불안이 경제로 확전되는 양상이다.


Plus Point

‘하나의 중국’에 도전하는 대만정책법, 美·中 갈등 새 뇌관 되나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에 이어 미 의회가 입법을 추진하는 ‘대만정책법’이 미·중 갈등의 새 뇌관이 될 전망이다. 대만에 관해 미국이 40년 넘게 지켜 온 ‘전략적 모호성’ 전략을 뒤집는 법이기 때문이다. 민주당 소속 밥 메넨데스 상원 외교위원장과 린지 그레이엄 공화당 의원 등 여야 거물급 의원들이 6월 공동 발의한 이 법안은 대만을 사실상의 독립 국가로 인정하는 게 주요 내용이다.

앞서 미국은 1979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고 대만과 단교했다. 하나의 중국 원칙이란 중국과 홍콩·마카오·대만은 나뉠 수 없는 하나이며 합법 정부 또한 중화인민공화국(중국) 하나라는 것이다. 그동안 미국은 대만을 중국의 영토로 인정하는 대신, 중국은 대만 정부의 자치권을 인정해왔다. 만약 이 원칙이 깨지면 대만에 대한 무력 통일을 꾀하는 중국에 침공 빌미를 줄 수 있다.

대만정책법은 △대만을 미국의 주요 비(非)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국으로 지정하고 △입법 이후 4년간 45억달러(약 5조9000억원) 규모의 군사 지원을 하며 △대만이 각종 국제기구와 다자무역협정에 참여할 수 있게 돕는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비나토 동맹은 나토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미국과 전략적 안보 관계를 맺은 나라로, 한국과 일본이 이에 속한다. 즉, 대만을 사실상 주권 국가로 인정하고 군사·외교 관계 강화에 나서겠다는 얘기다.

미 행정부는 미 의회의 대만정책법 입법 추진에 난색을 보이고 있다. 전략적 모호성이란 궤도를 갑작스럽게 수정하면 중국이 자극받아 미·중 관계가 더욱 냉랭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펠로시 의장의 대만행으로 미·중 관계가 악화한 지금, 이 법까지 통과된다면 양국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을 게 뻔하다. 이에 백악관은 국가안보회의(NSC) 차원에서 일부 법안 내용 수정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이 법안은 3일 외교위원회에서 처리될 예정이었지만, 핀란드와 스웨덴의 나토 가입 승인 표결로 일정이 순연됐다. 다만 공화당은 ‘지나친 중국 눈치 보기’라며 강경하게 버티고 있다. 이 법이 발효되려면 상원의 승인을 받더라도 하원의 승인과 바이든 대통령의 법안 서명이라는 최종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