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완화·자금 지원 업고 창업 러시
모스크바 동남부 타간스카야 거리에서 자동차 디스크와 타이어 수리점을 공동 운영해온 예브게니 벨랴코프(Belyakov·36). 그는 조만간 이 점포 지분을 동업자 데니스 보로딘(Borodin·35)에게 넘길 계획이다. 대신 지분의 대가로 받은 8만루블(약 320만원, 1루블=약 40원)의 현금과 각종 진단·수리장비, 정부 지원금 10만루블을 합쳐 이곳에서 5㎞ 떨어진 지점에 약 10㎡의 점포를 월세계약, 자신의 가게를 열기로 했다.

벨랴코프는 “러시아 금융위기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더 커졌지만 소규모 창업을 장려하겠다는 정부 조치를 믿고 점포 개설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금융위기가 본격화된 올 1월부터 이 거리에 미용실을 개업한 리자 미로노바(Mironova·28·여)의 표정은 5월 들어 밝아졌다. 경기가 갑작스럽게 나아졌기 때문은 아니라고 한다. 자신을 괴롭혀온 경찰과 위생감시반원들의 규제가 자취를 감춘 탓이라는 게 미로노바의 설명이다.

그간 소규모 점포를 경영해온 사람들은 경찰과 소방관, 위생검역관 등이 들이닥치면 몸이 얼어붙었다고 한다. 미로노바는 “미용실 고객들이 머리를 손질하기 위해 앉는 의자 사이의 거리가 최소 2m가 돼야 한다는 등의 사문화된 규정을 들이대면서 관리들이 돈(뇌물)을 뜯어가곤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드미트리 메드베데프(Medvedev) 대통령이 4월 중순, ‘창업한 소규모 점포에 대한 당국 검사는 연간 무제한에서 3년에 1회로 제한’ 등을 골자로 한 소기업 지원 법률에 서명한 뒤 관청의 행정 규제가 눈에 띄게 감소했다는 것이다. 미로노바는 “미용실만 해도 행정당국의 규제가 45가지나 되는데 이것들이 사라지면 창업자들이 늘 것”이라고 했다.

금융위기에 따른 경제난으로 실직자가 늘어난 러시아에 최근 ‘소기업 창업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통계청 추산에 따르면 5월 현재 실업자 수는 870만 명이다. 전체 경제활동인구 7560만 명의 11.5%나 된다. 작년 9월 금융위기가 시작되기 직전의 실업률 5.8%와 비교하면 8개월여 만에 배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이 같은 실업 해소와 자국 산업 육성을 위해 러시아 정부가 내놓은 방안이 바로 ‘말르이 비즈니스(small business의 러시아식 표현)’라고 불리는 소기업 육성이다. 말르이 비즈니스는 1991년 소련 붕괴 후 자본주의 경제가 도입되면서 생긴 개념으로, 우리의 중소기업 가운데 소기업에 해당한다. 러시아 중소기업연합회(OPORA)에 따르면, 개인이 홀로 운영하거나 종업원 수 1명 이상 100명 미만의 기업을 말르이 비즈니스라고 부르며, 여기에는 대기업의 프랜차이즈 점포는 해당되지 않는다.

러시아 정부는 기술이 있거나 작은 업체를 운영할 의지가 있는 실업자를 대상으로, 심사를 거쳐 일인당 5만8800루블에서 최대 35만루블까지 창업자금을 지원하고 행정관청의 규제도 대폭 줄였다. 실업자가 아닌 일반인이 창업을 할 경우에도 기존의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 진입 문턱을 낮췄다.

말르이 비즈니스에 관심이 높아진 배경이 비단 실업 해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정부 나름대로, 국민들은 국민대로 열의가 있다.

우선 정부는 러시아의 허약한 경제 토대를 개선하기 위해 말르이 비즈니스에 관심을 쏟는다. 러시아는 에너지 관련 산업이 수출의 65%, 국내총생산(GDP)의 15%를 넘는 전형적인 에너지 의존형 경제구조다. 당연히 러시아 경제는 유가 변동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에너지에만 의존하는 ‘단발 엔진 경제’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특히 작년 8월 배럴당 140달러 이상이던 유가마저 현재 배럴당 50달러 수준으로 폭락하면서 가즈프롬(천연가스)과 로스네프트·루코일(이상 석유) 등 러시아의 에너지 대기업들의 시가총액이 3분의 1 토막 난 쓰라린 경험을 안고 있다. 또 러시아가 에너지 수출대국이지만, 최종 소비재 등은 극단적으로 수입에 의존한다. 서비스 산업을 제외할 경우 국내 생산 비중이 12%에 불과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금이야말로 제조업 등 국내 산업을 육성할 때’라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OPORA의 블라디슬라프 코로치킨(Korochkin) 부회장은 “미국이나 서유럽,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소기업이 국내총생산(GDP)의 50~90%를 담당할 정도로 경제의 근간인데 러시아에서는 GDP의 13~15%에 불과하다”며 “러시아가 글로벌 금융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 같은 현상과 직결돼 있다”고 분석했다. 메드베데프 행정부는 오는 2020년까지 소기업이 러시아 GDP의 최소 60%를 차지할 수 있도록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소규모 제조업을 시작하려는 일부 러시아 국민도 금융위기에 따른 루블화 약세를 말르이 비즈니스의 호기로 판단한다. 모스크바 인근 오딘초보에서 포장용 버블랩(bubble wrap)을 생산해 외국 판매를 하는 안나 사모일로바(Samoylova)는 “금융위기가 시작된 이후 달러 대비 루블화 가치가 40% 이상 떨어지면서 우리 회사의 경쟁력은 오히려 30~40% 높아졌다고 본다”며 “많은 이들이 수공업이나 기능성 제품을 생산하는 데 관심을 갖고 창업 문의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 국영은행 스베르방크, 오스트리아계 은행인 라이파이즌방크, 씨티은행을 비롯한 주요 은행들도 말르이 비즈니스를 시작하려는 이들에게 담보대출 요건을 완화하는 방식으로 소기업 창업 지원을 준비하고 있다고, 경제 일간지 <베도모스티>가 최근 보도했다.

창업 여건이 좋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소기업들의 숫자도 증가 추세에 있다. OPORA는 금융위기 직전인 작년 8월 113만6000개였던 소기업이 5월 현재 약 125만 개로, 이 분야 종사자는 1670만 명에서 1800만여 명으로, 6개월여 만에 각각 10%와 7.7%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신규 소기업 창업의 72% 이상이 서비스와 무역 업종에 집중되고, 제조업은 11%에 불과해 국내 산업 육성이라는 본래의 취지에서는 벗어났다고 비판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