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주가 등 일부지표 호전 속 재정적자·실업률 증가‘낙관 금물’

 ‘프쇼 부젯 하라쇼(Всё будет хорошо)!’ 모스크바 시내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옥외 광고판 내용이다. 우리말로 ‘모든 게 잘 될 것이다’는 고무적 의미다. 1998년 디폴트(default: 채무불이행) 선언 이후 10여 년 만에 극심한 경기 침체를 겪고 있는 러시아 국민들을 응원하기 위해 가전 양판점인 ‘엠비데오’가 작년 말부터 설치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내용이 조금씩 광고판에서 사라지고 있다. 광고업자 예브게니 쿠즈네초프는 “요즘 경기가 되살아날 조짐을 보이고 있어 ‘프쇼 부젯 하라쇼’를 내세웠던 광고판을 차츰 철거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부동산 업계도 잔뜩 움츠러들었던 상황에서 점차 기지개를 펴고 있다. 부동산 중개업체 ‘미안(MIAN)’의 통계에 따르면, 글로벌 금융위기로 매매가격이 ㎡당 평균 5500달러에서 4500달러로 1000달러가량 하락했던 모스크바 아파트의 시세는 6월 현재 4700달러 선으로 다시 상승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주가 122% 상승, 루블화 가치 16% 상승, 외환 보유고 5.2% 증가. 저점으로 평가됐던 2월과 6월 현재를 비교한 러시아 경제 지표들이다. 이것들만 놓고 본다면 러시아 경제가 회복세로 돌아섰다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물론 지표들의 변화는 러시아 경제의 엔진이라고 할 수 있는 유가의 급등에서 비롯됐다. 2월19일 배럴당 39.63달러에 거래됐던 국제 유가가 6월7일 68.55달러로 73%나 치솟자 러시아 경제에도 서광이 비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러시아는 전 세계를 강타한 신용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일까.

러시아 경제 전문가들의 판단은 ‘낫 옛(Not yet)!’이다. 경제 회복을 알리는 신호들이 조금씩 나오고는 있으나 경제에 대한 걱정을 접기는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이런 우려는 러시아 최고 지도자의 목소리에서도 묻어난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6월6일,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경제포럼에서 “경제 위기가 끝났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며 “아직은 샴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니다”고 말했다. 가장 큰 이유는 유가의 향방이 어떻게 될 지 예측하기 힘들고, 주식시장의 상승도 투기 자본 유입 때문이라는 견해 때문이다. 유가가 다시 떨어지면 유입됐던 자본 역시 급속히 빠져나갈 것이라고 우려하는 것이다. 한때 석유와 석유제품, 천연가스 수출액이 러시아 전체 수출의 65% 이상을 차지했을 정도로 전형적인 에너지 의존형이던 경제구조는 올 1분기 59.6%로 다소 완화됐으나, 여전히 에너지 의존형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는 재정적자와 은행의 부실, 실업 증가 등이다.

러시아는 올 들어 1조6000억루블(약 500억달러)의 자금을 경기 부양에 쏟아 부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나타내지는 못했다. 러시아의 재정은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적자로 돌아서, 재정적자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7.4%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1분기 러시아의 GDP도 전년 대비 9.5% 감소했다. 당초 2.2% 하락을 예상했던 러시아 경제개발부는 올해 경제가 6~7.4% 후퇴할 것이라고 수정 전망했고, 국제통화기금(IMF)도 러시아 경제 성장률을 마이너스 6%로 예상한다.

특히 올해 정부 예산안은 경제가 마이너스 2.2%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을 바탕으로 편성했기 때문에 상당한 재정적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올해 재정적자가 GDP의 7%에 달할 것이며 이마저도 낙관적인 전망치”라고 말했다. 급기야 메드베데프는 석유 수입이 정부 세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감안, 보수적인 유가 전망치를 기준으로 2010~2012년 예산안을 다시 수립할 것을 주문했다. 알렉세이 쿠드린 재무장관은 “보수적 관점에서 국제 유가는 2010년 배럴당 50달러를 유지한 뒤 2012년 52달러, 2013년 53달러로 소폭 상승할 것이며 재정적자를 2010년엔 GDP의 5%, 2011년엔 3%로 줄이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은행의 부실도 문제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은행의 부실자산을 하루 빨리 청산해야 하며, 공적자금을 투입해 부실 은행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언급했다. 러시아 정부는 부실채권(NPL: non performing loan) 비율을 4% 수준으로 보고, 이것이 10%까지 올라갈 것에 대비해 5300억루블(약 160억달러)의 예산을 별도로 편성하는 등 은행권의 부실자산 대책을 세워 놓았다.

하지만 부실채권에 대한 체감도는 정부와 민간의 평가가 엇갈린다. 러시아 최대 투자은행 트로이카 디알로그의 루벤 바르다니안 회장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 은행들의 NPL 비율이 이미 은행 자산의 20%에 근접하고 있다”고 밝혔다. IMF도 4% 안팎이라는 러시아 정부의 수치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눈치다. 러시아 중앙은행이 선진국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부실자산을 평가했기 때문에 수치가 현저히 낮게 나타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밖에 실업 문제도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6월 초 현재 러시아 실업자는 900만 명에 근접, 전체 경제활동인구(7580만 명)의 11%를 넘어섰다.

다만 물가 상승률은 올 들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월별 상승률이 1월 2.4%, 2월 1.7%, 3월 1.3%, 4월 0.8%로 계속 하락, 러시아 경제개발부와 중앙은행은 당초 올해 예상치인 13%는 상회하지 않을 것으로 수정 예고하고 있다. 이와 함께 작년 4분기 1306억달러에 달했던 민간자본 순유출 규모는 올 1분기 들어 388억달러로 급격히 감소했다. 이것들은 상승하는 유가, 외환 보유고의 증대, 증시의 활황 등과 맞물려 러시아 경제 회복을 점칠 수 있는 긍정적인 요인들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의 몰락설, 국가 부도설 등 성급했던 일부 서구 언론의 비관적 전망은 찾아보기 힘들어진 지 오래다. 그렇지만 워낙 상황이 유동적이어서 러시아 스스로도 긍정적인 전망을 자제하고 있다. 러시아 재무부의 한 관리는 “러시아 경제가 바닥을 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이지만, 언제쯤 회복될 수 있을지는 단언키 어렵다”고 조심스레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