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같은 술 향기…

  

중국 술의 비조에서 유래

- 보풍주 발효지.
- 보풍주 발효지.

<일러두기>

❶ 현대 중국의 인명 및 지명, 중국의 고유명사는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했다. 단,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고유명사는 한자 독음대로 표기하였다.

 <예> 毛澤洞 마오쩌둥 西安 시안 / 長江 장강 杏花村 행화촌

❷ 술 이름의 경우에도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해야 하나 우리에게 익숙한 술에 한해서만 그렇게 했다. 여타의 술은 발음이 어렵거나 의미 전달이 잘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 한자 독음으로 표기했다. <예> 茅台酒 마오타이주 五粮液 우량예 / 黃鶴樓酒 황학루주 劍南春 검남춘

❸ 신 중국 수립(1949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인명 및 지명은 한자 독음대로 표기했다. <예> 李白 이백 杜甫 두보 南京 남경

 ‘보풍주(寶豊酒, 빠오펑주)’는 ‘송하량액(宋河粮液)’과 함께 중국 허난성(河南省)을 대표하는 국가 명주다. 보풍주의 고향인 허난성 핑띵산시(平頂山市) 빠오펑현(寶豊縣)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우리나라에서 곧장 이곳으로 가려면 고도(古都) 뤄양(洛陽)이나 허난의 성도(省都) 정저우(鄭州)에 먼저 도착한 뒤 버스를 이용하면 그나마 나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안후이의 보저우(州)와 노자의 탄생지인 루이(鹿邑)를 먼저 들렀던 탓에 루이에서 곧장 빠오펑으로 가는 행로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추운 겨울날, 현지의 교통편으로 중국의 시골길을 달리는 일은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다. 우선 버스들은 전혀 난방이 돼 있지 않다. 게다가 불결할 뿐만 아니라 제 시간에 떠나고 닿는 법도 없기 때문이다.



루이에서 핑띵산으로 가는 다섯 시간의 버스 여정. 차창 밖의 풍경은 전혀 변화가 없다. 정말이지 난징을 출발하여 장쑤성을 관통하고 안후이성 북부를 거쳐 루이에 이르는 닷새 동안 나는 산 같은 산을 거의 보지 못했다. 용케도 버스는 끝없는 들판의 한가운데로만 달리는 듯싶었다. 촘촘히 심어진 미루나무 가로수가 길가에 도열한 풍경도 어김이 없었다. ‘산이 나를 에워싼다’라는 표현에 익숙해 있던 내가 중국의 중원에서 비로소 ‘들판이 나를 에워싼다’는 놀라운 발견을 가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가없는 지평선에 포위당한 느낌은 되레 산에 갇힌 것보다 더 막막하기만 하다.



하오의 햇살이 스러지는 때 핑띵산시에 도착했다. 호텔에 여장을 푼 뒤 곧바로 지친 몸을 뉘였다. 12월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과 새해 아침을 이렇게 중국의 낯선 도시에서 맞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서도 인기가 높은 그룹 ‘슈퍼주니어’가 열광적인 중국 팬들과 함께 송년 행사를 주도하는 모습을 현지 텔레비전으로 보는 것만도 적잖이 위로가 됐다.

- (왼쪽)보풍주 숙성 저장고. (오른쪽 위)누룩을 띄우는 과정. (오른쪽 아래)보풍주 증류 과정.
- (왼쪽)보풍주 숙성 저장고. (오른쪽 위)누룩을 띄우는 과정. (오른쪽 아래)보풍주 증류 과정.

중국 술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

새해 아침을 맞아도 별다른 감회는 없었다. 양력 설날에도 술 공장은 그대로 가동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택시를 잡아타고 빠오펑으로 달렸다. 지평선 끝에서 불끈 솟아오른 새해 첫날의 태양이 황금빛을 뿌리며 자동차를 뒤쫓았다. 40여 분 만에 닿은 빠오펑도 여느 시골과 달리 외양이 말끔했다.



중심 거리에서 머지않은 보풍주창(寶豊酒廠)의 정문을 들어서는 순간 술잔을 높이 쳐들고 있는 한 노인의 거대한 황동상이 눈길을 끈다. 바로 중국 술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는 의적(儀狄)의 동상이었다.



이 동상에서 보듯이, 보풍주가 자사의 브랜드를 선전하는 데 가장 많이 이용하는 역사 인물이 바로 의적이다. 생몰 연대조차 확실치 않지만 의적이 처음 술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중국의 고서에 자주 나온다. 그리고 그 술이 지금의 빠오펑에서 만들어졌다는 데서 보풍주는 의적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는 곧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술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전국책·위책(戰國策·魏策)>의 기록에는 “옛날에 제녀(帝女)가 의적으로 하여금 좋은 술을 만들어 우(禹) 임금에게 바쳤으며 임금이 이를 달게 마셨다”는 기사가 있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도 “의적이 처음 술을 만들었는데 다섯 가지 맛이 났다. 여해의 남쪽, 응읍의 들판에서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옛날 여하(汝河)의 강물은 여주(汝州)의 한쪽을 흘렀으며 이를 여해(汝海)라고도 하였다. 따라서 ‘여해지남’은 오늘날 여하의 남쪽 기슭에 있는 빠오펑이 된다. 보풍현은 상주(商周)시대에 응(應)나라에 속해 있었는데 발굴된 응나라의 유적지는 지금의 빠오펑 동남쪽 10여km 거리에 있다. 출토 유물 중에는 술과 관련된 것만도 3000여 점이나 됐다. 이런 기록과 유적만으로도 빠오펑은 유구한 중국 술의 한쪽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새해 첫날인데도 보풍주 술 회사에는 직원들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큰 도시의 대기업들은 그렇지 않지만 아직도 중국의 많은 회사들은 사무실 밖에 제대로 된 문패를 달고 있지 않다. 호텔처럼 호실만 적혀 있을 뿐인데 이곳 술 회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래위층을 몇 차례 오르내린 끝에야 간신히 담당자를 만날 수 있었다.



안내 직원을 따라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보풍주 박물관이었다. 보풍주의 역사, 생산 과정, 제품 등에 대한 자료가 일목요연하게 전시돼 있으며 전담 안내원의 소개 또한 퍽 자상했다. 그 다음은 공장 내부를 둘러보는 차례. 누룩 제조장을 거쳐 재료를 찌고 식히는 곳, 발효장 등을 차례차례 둘러보았다.



원주(原酒) 숙성장에는 어른 키 높이에 장정 둘이 손을 맞잡아야 안을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술항아리들이 수백 개 줄 지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 그곳에서 알코올 82도의 원주를 시음하는 기회도 가졌다. 턱없이 높은 알코올 도수에 놀라며 술을 맛봤는데 생각보다 독한 느낌이 없었다. 따라서 자극감도 되레 시중 제품보다 덜하다는 느낌이었다. 배합(블렌딩)을 하기 이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보풍주 특유의 향도 느껴지질 않았다. 내친 김에 한 잔 술을 온전히 입안에 털어넣었다. 우리의 소주처럼 쉽게 목구멍을 넘어가는데 뒤늦게 입안에 가득 차는 술기운이 강렬했다. 그렇지만 그 순수한 강렬함이 인상적이었다. 큰 잔의 술을 깨끗이 비우는 나를 보고 현장 직원이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 중국 술의 비조로 불리는 의적의 동상.
- 중국 술의 비조로 불리는 의적의 동상.

상주시대에 비롯돼 수당시대에 번성

청향형(淸香型) 대곡백주(大曲白酒)에 속하는 보풍주는 보풍 현지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수수만을 재료로 한다. 그리고 밀, 보리, 완두로 누룩을 만들어 당화발효제로 쓴다. 양조 기술은 전통의 속사조작법(續渣造作法: 거듭 찌고 증류한 지게미에 새 원료를 보태 다시 발효, 증류하는 방법)을 사용하며 진흙 구덩이에서 발효를 시킨다. 술을 증류할 때 쓰는 시루며 냉각기 등도 옛날부터 전해오던 것을 사용한다. 증류 과정을 거쳐 술이 얻어지면 적당 기간 항아리에 담아 숙성시킨다.  



상주(商周)시대에 시작된 보풍주의 역사는 수당(隨唐)대에 크게 번성했다. “천 마을에 술 향기가 퍼지고 일만 집에 술 빚는 아궁이가 있다(千村香 萬家立)”는 말도 이때 생겨났다.



당송(唐宋) 시대의 낙양(뤄양)은 수도 장안에 버금가는 중요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여주(汝州: 빠오펑에서 차로 30분 거리)는 낙양의 남부로 통하는 문호였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까지 겸비하고 있었기에 이 무렵 이곳은 유명 인사들이 유람을 하고 관직을 청탁하는 명소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놀이를 하고 관직을 구하는 이들 치고 보풍주를 칭송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백 또한 벼슬에서 쫓겨난 뒤 여러 차례 여주 용흥현(龍興縣: 보풍)에서 놀았으며 그때 쓴 글 <여름날 여러 종형제들과 용흥각에 올라서(夏日諸從弟登龍興閣序)>에는 ‘하상(霞觴)’이라는 술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 또한 보풍주의 전통이 되는 용흥가양주(龍興佳釀酒)에 대한 시인의 미칭(美稱)이었다.



당대(唐代)의 저명한 시인 유희이(劉希夷)도 여주 사람이었다. 상원(上元 674~676년) 연간 그는 진사에 등과한 후 송지문(宋之問), 심윤기(沈倫期) 등과 함께 삼협(三峽)을 유람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후 고향의 용흥미주(龍興美酒)로 벗들을 대접하면서 <고향집에 술을 차리고(故園置酒)>란 시를 읊었는데 시의 자구(字句)들이 마침내 도달하는 곳도 고향 술에 대한 찬예(讚譽)였다.

술이 익었으니 우리가 마셔야 하리. (酒熟人須飮)

봄은 왔건만 귀밑머리는 벌써 가을이라.

(春還已秋)

원컨대 천 날을 취할 수 있다면 (愿逢千日醉)

백 년의 근심도 느슨하게 할 수 있으리.

(得百年憂)

옛 집 마당에는 푸른 풀이 우거졌건만

(舊里多草)

벗들의 머리는 하나같이 허옇구먼. (新知盡白頭)

바람 앞의 등불은 쉬이 꺼지고(風前燈易滅)

강에 뜬 달은 오래 머물기 어렵다네. (川上月難留)

창황히 일을 당한 이는 주 문공이요, (卒卒周姬旦)

늘 바쁘기만 했던 이는 공자라네. (栖栖孔丘)

평생에 며칠이나 이렇게 취할 수 있으랴, (平生能幾日)

잠시나마 즐겨 노는 것만 못하리라. (不及且游)

송대(宋代)에 이르러 보풍주의 명성은 이미 중원에 떨쳤다. 의적과 함께 보풍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 인물이 성리학자 정호(程灝, 1032~1085년, 명도선생)이다. 만년(1083년)에 그는 송(宋) 신종(神宗)의 교지를 받들어 보풍 지역의 주업과 주세(酒稅)를 관리 감독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라의 조정 관리가 파견되어 전문적으로 술 경영을 하는 지방을 주무(酒務)라고 하였는데 보통 한 주무에서 거둬들이는 세수(稅收)는 만 관(貫) 이상이었다. 이 지역 술 감독관이 된 정호의 치소(治所)는 보풍현 서북쪽 25리에 있는 지금의 상주무진(商酒務鎭)이었다. 술을 잘 만들고 세금을 잘 걷어 국가를 이롭게 하는 공직을 수행하면서도 정호는 평생의 관심사인 이학(理學)에 대한 연구와 강의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보풍 지역을 전국 3대 이학의 성지(聖地)로 만들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진사 주광정(朱光庭)은 일찍이 상주무에서 정호한테 이학을 배웠다. 깊이 얻은 바 있어서 집에 돌아간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선생에게서 강의를 받은 그 한 달은 마치 봄바람 속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보풍주를 말할 때면 꼭 따르는 ‘주무춘풍(酒務春風)’이란 말은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



금(金) 왕조 때의 시인 원호문(元好問, 1190~1257년)이 이 술을 마시곤 진실로 좋은 술임을 알아 “봄바람이 감싸는 탓에 사람들이 취하는 줄 모르네. 바삐 소매를 걷고 300잔을 더 하도다”라고 찬양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 보풍주.
- 보풍주.

1989년 ‘중국 명주’ 반열에 올라

보풍주는 이 무렵에도 여전히 번성하고 있었다. 자산 1만 관 이상의 양조장이 100여 집이었으며 팔리는 술이 흐르는 물과 같았다. 나라에서 파견된 감주관(監酒官)은 진국상장군(鎭國上將軍)을 비롯하여 16인이나 되었다. <보풍현지(寶豊縣誌)>에 따르면 금 정대(正大, 1224~1232년) 연간에 거둬들인 세수가 4만5000관으로 전국의 현 중에서 가장 많았다.



포장 과정까지 구경하고 공장을 빠져 나왔다. 한 시간 넘게 우리를 안내하느라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장(張)씨가 한사코 점심 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지만 나는 그의 호의를 마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절 택시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시 핑띵산시로 돌아가 뤄양으로 가는 기차를 타는 일이 급했기 때문이다. 공장 사람들로부터 남다른 후의를 입은 나는 문득 옛사람들이 했던 보풍 술에 대한 찬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남쪽으로는 여를 넘지 못하고 북쪽으로는 사를 건너지 못한다(南不過汝 北不過沙)”는 그 말이다. ‘여(汝)’와 ‘사(沙)’는 보풍현의 남쪽과 북쪽에 흐르는 두 가닥의 강 이름이다. 이 말은 보풍을 떠나려던 사람도 ‘여’와 ‘사’를 건너려는 순간 성안에서부터 표표히 퍼져 나와 단번에 심중을 휘어잡는 술 향기 때문에 가던 길을 버리고 되돌아와서 다시 술잔을 든다는 뜻이었다.



1956년 보풍주는 ‘하남 명주’란 이름을 얻었다. 1973년 10월 당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캐나다의 트뤼더 총리를 영접하여 낙양에서 연회를 베풀 때도 헤드 테이블에는 보풍주가 놓였다. “하남 보풍주로 건배합시다”라고 저우언라이 총리가 잔을 들었음은 물론이다. 



1979년, 1984년 두 번의 전국주류평가대회에서 은장(銀章)을 받는 데 그쳤던 보풍주는 1989년 제5회 대회에서 대망의 금장을 받아 ‘중국 명주’의 반열에 들었다.

 

최학 소설가·우송대 교수

필자 최학 교수는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고, 1979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역사소설 <서북풍>이 당선되면서 큰 주목을 받은 중견 소설가다. 대표작으로 <서북풍>, <미륵을 기다리며>, <화담명월> 등이 있으며, <배갈을 알아야 중국이 보인다>, <니하오 난징> 등 중국 관련 저서도 있다. 현재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로 많은 중국인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중 양국간 교류에 일조하고 있다. 네이버에 ‘배갈, 白酒의 향과 맛을 찾아 (
http://blog.naver.com/jegang5)’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배갈 대중화 작업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