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발전 상징도시 원저우에선

  

돈줄 말라 기업 줄도산 속출…

  

중국 경제 내리막길 전조인가?

- 원저우 종합상품시장인 상마오청의 신발상가.
- 원저우 종합상품시장인 상마오청의 신발상가.

중국은 12월로 WTO(세계무역기구) 가입 10년을 맞는다. 2001년 11일10일 카타르 도하 회의에서 중국의 가입이 확정됐다고 발표되자, 많은 베이징 시민들은 천안문 광장에 모여 ‘루스(入世)’를 환호했다. 그로부터 10년, 중국 경제는 GDP규모로 일본을 추월해서 세계 2위의 자리에 올라섰다.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2010년 말 현재 중국의 GDP는 전 세계 GDP의 8% 남짓 되는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인당 GDP는 전 세계 100위권 바깥에 있지만 볼륨만은 14억 인구에 걸맞게 커졌다.



지난해 4월에 세상을 떠난 영국의 세계경제 권위자 앵거스 매디슨(Angus Maddison)이 추정한 수치에 따르면, 중국의 GDP는 청나라 후반이던 1820년에 전 세계 GDP의 32%가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인구는 약 4억3700만으로,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 정도였다. 1인당 GDP도 전 세계 평균의 90% 수준이었다고 하니 당시의 중국은 명실공히 세계의 중심 국가요, 부자나라였음이 틀림없다. 그러던 것이 20년 뒤 1840년에 시작된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패배하면서부터 중국 경제는 빠른 속도로 내리막길을 걸어 1913년에는 중국의 GDP가 전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9% 정도로 줄어들었다. 1인당 GDP도 세계 GDP평균의 40% 정도밖에 안되는 가난한 나라로 전락했다.



마오쩌둥이 중심이 된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그런 상황의 중국에서 1921년 중국공산당을 창당했고,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해서 1949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그러면서 이전의 중국은 ‘구(舊)중국’이라고 규정하고, 자신들이 세운 중화인민공화국이 ‘신(新)중국’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마오의 중국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길을 걸은 결과, 초기에는 소련의 지원으로 어느 정도 중공업 건설을 할 수 있었지만, 경제와 이데올로기를 혼동한 대약진 운동과, 실제로는 권력투쟁인 문화혁명을 겪으면서 1976년 마오가 사망할 당시 중국 경제는 중국의 GDP가 전 세계 GDP의 1%에도 못 미치는 규모의 절대 빈국으로 추락했다. 현재 중국 GDP가 전 세계 GDP의 8% 수준에 이르게 된 것은 마오가 ‘주자파(走資派 ∙ 자본주의 추종자)’라고 박해하던 덩샤오핑이 중심이 되어 1978년부터 추진한 개혁과 개방 정책의 덕분이다. 지난 33년간의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1913년의 9% 수준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덩샤오핑이 중국 경제를 건설하면서 채택한 방식은 과거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걸었던 ‘정치는 권위적, 경제는 개방적’이라는 방식이었다. 덩샤오핑도 정치의 민주화는 허용하지 않으면서 경제발전은 대외개방을 바탕으로 추진하는, 이른바 ‘신(新)권위주의’라는 길을 걸었다. 그 결과 정치의 민주화 없는 경제의 발전이라는 오늘의 중국 모습이 갖추어졌다. 따라서 정치적 비판이 허용되지 않고, 언론의 자유가 없는 가운데 추진된 중국의 경제발전은 항상 좋고 잘된 뉴스만 보도되고, 일체의 정치적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가운데, 중국 경제의 어려움을 외부에서 헤아리기가 무척 어려운 상황에서 추진돼왔다.



지난 33년 동안 중국 경제가 어렵다는 보도는 그래서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 지난 10월3일과 4일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빠른 중국 경제발전의 상징 도시인 원저우(溫州)를 찾아가 현장 지도를 했다. 온 세계의 눈과 귀가 “중국 경제에 뭔가 적신호가 켜진 게 아니냐”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중국 관영 미디어들이 전하는 것만으로도 지난 4월부터 90여명의 원저우 기업인들이 빌려 쓴 민간 고리채(高利債)를 못 갚고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야반도주를 했고, 9월 들어서만도 20여명의 원저우 기업인들이 도망갔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자살한 기업인도 상당수에 이른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원자바오 총리는 원저우에 현장지도를 가면서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 저우샤오촨 행장과 은행감독원(은행업감독관리위원회) 류밍캉 주석과 함께 갔고, 현장에서 원저우 시 간부와 은행관계자들을 모아놓고 “현재의 민간 신용대출 위기를 1개월 이내에 해결하라”고 시한을 설정한 다음, “원저우시의 재정 지원으로 해결하는 방안과 은행들이 융자를 해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원저우를 ‘종합 금융개혁 실험지역’으로 선포하는 방안을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원저우 상인들의 별명은 ‘중국의 유태인’이다. 원래 경제적 기반이 없는 원저우를 1회용 라이터 사업에서 시작해서,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신는 신발을 만드는 ‘세계의 신발 공장’으로 키운 사람들이다. 거기서 번 돈으로 중국 전역을 삼삼오오 그룹을 지어 다니면서 아파트와 오피스 빌딩을 가리지 않고 모험적인 대담한 투자를 해서 중국 내에서는 “집값이 오르는 건 원저우 사람들 때문”이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다.



중국 관영 미디어들은 “원저우의 민간 부채 위기를 중국 경제 전체의 흐름과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라는 보도를 하고 있다. 원저우 기업인들이 맞고 있는 위기는 중국 경제의 산업구조 변화와 관련이 있으며, 원저우의 대표 산업이던 1회용 라이터 공장의 경우 1990년대 말 3000여개에 이르던 공장수가 현재 100개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으며, 2003년 4000여개에 이르던 각종 신발 제조 공장도 이미 1000여개 공장이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원저우에 돈줄이 마를 정도의 환경이 이미 조성된 가운데 원저우 상인들이 빚을 내서 부동산 투자에 열을 올리다가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는 것이다.

- 원저우 종합시장인 상마오청의 신발재료 전문상가(위). 덩샤오핑(오른쪽)과 함께 현안을 논의하는 중국국가주석 마오쩌둥. 마오쩌둥은 1976년 9월 사망했다.
- 원저우 종합시장인 상마오청의 신발재료 전문상가(위). 덩샤오핑(오른쪽)과 함께 현안을 논의하는 중국국가주석 마오쩌둥. 마오쩌둥은 1976년 9월 사망했다.

원저우 문제 처리과정 예의 주시

중국정부가 원저우 상인들의 위기를 어떻게 처리해나가는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30년 중국 경제발전 과정에서 처음 들리는 불길한 소식인, 원저우 상인들의 민간 고리채 위기가 현지 은행의 대출금과 어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연결고리가 있는지도 지켜볼 일이다. 그러나 원저우의 민간 고리채 현상이 과연 원저우시 한 지역에만 국한된 문제인지, 중국내 대부분 도시들의 수출산업 업자들에게도 일반화된 현상인지는 보다 깊은 조사를 거쳐야 할 것이다. 다만 원저우에서 발생한 민간 신용대출 위기가 중국공산당과 정부가 지난해 9월 ‘포용적 성장(包容性 增長 ∙ Inclusive Growth)’을 선포한 가운데 빚어진 사태라는 점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덩샤오핑이 지난 1978년 경제발전에 나서면서 2020년까지 덩치를 계속 키워나가야 중국이 중진국 정도의 수준에 이를 것이라고 한 전망을 소홀히 하고, 중국의 GDP가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820년대의 규모는 커녕, 1913년의 규모에도 이르지 못한 상황에서 “양적인 팽창보다 질적인 성장”을 추구하겠다고 선언한 후진타오-원자바오 체제의 선택이 앞으로 어떻게 귀결될 것인지 전 세계가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할 것이다. 후-원 체제가 내년 말 시진핑-리커창 체제로 바통을 넘겨주는 과정이 부드럽게 이어질지에도 세계의 시선이 뒤따라 다닐 것이다.



그런 가운데 원자바오 총리는 10월14일 광둥성 광저우시에서 열린 상품교역회 개막식에 참석해서 “세계무역기구 가입 10주년을 앞둔 우리 중국은 앞으로도 영원히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어둘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중국정부는 9월 한 달 동안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8월에 이어 6%를 상회하는 수준을 기록했고, 올해 GDP 성장률은 작년보다 다소 떨어진 9%선을 기록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런 가운데 중국내 자동차 판매량 그래프도 정점을 지나 내리막 추세를 그리고 있다. 질적 성장을 위한 거시조절의 결과인지, 중국 경제 위축의 전조인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