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가전 왕국’ 소니가 불량 배터리로 ‘추문’에 휘말렸다. 창립 60돌을 맞아 ‘소니의 부활’을 다짐했던 게 지난 5월이었는데 찬물을 끼얹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올 들어 박막 TV의 히트를 발판으로 대폭적인 영업이익을 내며 진군했고 연내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PS)3’ 출시로 ‘승리의 방정식’을 재연한다던 목표가 삐걱거리는 것이 아닌가 일본 재계가 수군대기 시작했다.

미국 델컴퓨터와 애플컴퓨터가 지난 8월 노트북컴퓨터에 장착한 소니의 리튬-이온 배터리의 리콜을 발표한 것이 발단이다. 리콜 규모는 애플컴퓨터의 180만 개 등 2개사 590만 개였다. 과열과 화재 위험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애플컴퓨터에 따르면 배터리 과열 신고가 9건이 접수됐으며 이 가운데 2건은 고객이 과열된 컴퓨터를 만지다 가벼운 화상을 입고 다른 재산상의 피해가 발생했을 정도였다.

애플컴퓨터의 리콜 대상은 2003년 10월부터 올해 8월까지 판매된 12인치 i북, 12인치 파워북, 15인치 파워북에 장착된 소니의 리튬-이온 배터리다. 110만 개가 미국 내에서, 70만 개가 일본과 다른 나라에서 판매됐다.

410만 개의 소니 배터리를 회수한 델컴퓨터의 경우 일본 내에서 2건의 문제가 확인됐다. 그 가운데 1건은 6월에 오사카의 국제회의 중 발생했는데 컴퓨터가 과열, 불을 내기에 이르렀다. 주요 노트북컴퓨터 생산업체 중 후지쓰, 도시바, HP 등이 소니가 제작한  배터리를 사용하고 있다. 이들 업체는 아직 리콜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황을 면밀히 지켜보고 있다고 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서는 노트북컴퓨터를 갖고 여객기에 타는 것을 제한하자는 규제론이 다시 일고 있다. 호주 캔터스항공은 델 노트북컴퓨터 이용자에게 배터리를 빼도록 촉구하는 기내 방송을 하기로 결정했다.

한 번 충전하면 오랜 시간 사용할 수 있고 휴대전화나 디지털카메라에도 사용할 수 있는 리튬-이온 배터리가 문제를 일으킨 원인을 놓고는 소니와 델, 애플 사이에 견해 차이가 있다. 소니는 원인의 하나로 ‘금속 파편의 혼입’ 을 인정하고 있으나 컴퓨터에 의한 충전방법 등에도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반면 델과 애플 측은 소니 배터리만의 문제라는 입장이다.

사고의 주된 원인이 소니의 제조단계에서 미세한 금속 파편이 섞였기 때문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배터리에 금속 파편이 섞이면 양극의 리튬이온이 음극의 금속으로 바뀐다. 이 금속에 의해 양극과 음극이 이어지고 전자가 흘러 ‘쇼트’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배터리 내부가 섭씨 40도 정도에서 150도 정도로 상승, 발화                                                       하게 된다.

애플컴퓨터는 문제의 소니 배터리가 ‘자사 기준에 미달해’ 리콜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애플컴퓨터는 인텔의 마이크로칩이 장착된 컴퓨터는 리콜 대상이 아니라고 밝혔다. 하지만 소니 측은 사고 원인이 컴퓨터의 체제와도 관련이 있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예를 들어 급속 충전을 장점으로 내세운 델의 노트북컴퓨터는 충전 시 전압이 과하게 걸리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플레이스테이션3 유럽 출시 지연 등 잇단 악재

전문가들은 배터리에 금속 파편이 들어가는 제작상의 실수로 과열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으며 소니는 금속 부분이 절연체에 밀려들어가면서 배터리가 과열과 잠재적인 화재위험에 노출됐다고 해명했다고 <파이낸셜 타임스(FT)>가 보도했다.

델과 애플의 배터리 리콜로 소니는 200~300억엔(약 1640~2470억원)의 손실을 입게 될 전망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소니에 재발방지 대책을 요구했다. 다른 업체에도 피해가 발생했는지 여부를 조사토록 요청했다. 소니는 과열과 화재위험 방지를 위한 새 보호조항 등을 추가해 배터리 제작과정에 적용하고 있다면서 “관련 제품에 대해 더 이상 리콜이 없기를 기대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소니의 진짜 걱정은 이번 사건으로 인한 브랜드 이미지의 추락이다. 소니는 지난해 6월 최고경영자겸 회장에 하워드 스트링거가 취임하면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실시하고 부활을 도모해왔다. 부활을 이끄는 마차는 본업인 ‘가전사업’이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노력과 독일 월드컵 등의 호재가 겹쳐 소니는 올해 1분기(4~6월) 순이익이 흑자로 돌아섰다. 1분기 전체 순이익이 323억엔을 기록, 작년 같은 기간의 73억엔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됐으며 매출액은 1조7400억엔으로 작년 동기의 1조5700억엔보다 11%나 급증했다. 배터리 등 컴퓨터 부문 역시 지난해 319억엔의  경영흑자를 기록했다. 이 때문에 소니로서는 이번 불량 배터리 사건이 모처럼의 실적 회복에  찬물을 끼얹는 악재가 아닐 수 없다.

배터리 교환에 소요되는 비용은 총 200억~300억엔 수준으로 그다지 크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직접 비용’에 불과하다. 미국에서 소송이 빈발하면 피해 규모는 더욱 커질 것이 뻔하다. 소니는 델과 애플의 리콜에 협력하는 것으로 사태를 조기 진화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델의 마이클 델 회장도 “소니가 향후 배터리를 공급하는 기업의 하나로 계속 남을 것임을 믿는다”며 거래 중단 가능성은 부인했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델과 애플이 소니에서 배터리를 지속 조달할 것으로  장담하기 힘들다는 관측이다.

불량 배터리 사태를 헤쳐 나가고 있는 소니에게는 이것 말고도 넘어야 할 또 다른 암초가 있다고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주력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 3(PS3)’의 유럽 출시시기를 올 11월에서 내년 3월로 연기, 소니의 신뢰도에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이유는 블루레이 디스크 드라이브의 필수부품인 레이저 다이오드를 대량 생산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소니가 PS3 출시를 미룬 것은 올 봄 발매 일을 11월로 늦춘 데 이어 이번이 두 번째.  소니는 올해 미국과 일본 시장에 발매되는 PS3 수량도 기존 400만 대에서 200만 대로 크게 줄였다.

소니는 PS3에 탑재될 레이저 다이오드를 대량 생산하는데 실패하자 다른 제조사들로부터 부족 물량을 구매하려 했으나 이 같은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으며 이는 최고급 기술이 필요한 이 다이오드를 생산 할 수 있는 제조사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기술 명가(名家)’의 자존심은 이미 구겨진 상태였다.

주요 경쟁사인 마이크로소프트는 새 주력 모델 ‘X박스 360’을 이미 지난해 말에 출시한 상태며, 닌텐도도 올 4분기에 E3 게임쇼에서 극찬을 받은 게임기 ‘위(Wii)’를 선보인다.

소니가 잇단 암초를 극복하고 기술 명가의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을지 전 세계가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