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말 정보통신 사업권 허가에 관한 부정부패사건이 터지면서 청렴한 이미지를 쌓아온 만모한 싱 총리(오른쪽)가 최대 위기에 몰렸다.
- 지난해말 정보통신 사업권 허가에 관한 부정부패사건이 터지면서 청렴한 이미지를 쌓아온 만모한 싱 총리(오른쪽)가 최대 위기에 몰렸다.

인도의 수도 뉴델리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잔타르 만타르(Jantar Mantar). 이곳은 우리나라의 첨성대 같은 일종의 천문관측소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잔타르 만타르는 최근 인도인들이 시위를 하기 위해 자주 찾는 시위 명소가 되었다. 

지난 4월 5일 인도의 전통의상인 흰색 옷과 흰색 모자를 쓴 한 70대 노인이 이곳에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단식투쟁은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이 인도를 식민 통치할 때 독립을 위해 종종 사용했던 방식이다. 요즘도 단식투쟁은 인도인들이 특정 목적 달성을 위해 널리 이용된다. 그러나 여론의 주목을 받는 단식투쟁은 흔치 않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올해 72세의 아나 하자레(Anna Hazare)가 목숨을 건 단식투쟁에 들어가자 언론들은 연일 대서특필했다. BBC, CNN 등 외국 언론들도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그 이유는 하자레가 저명한 사회운동가인 데다 그의 투쟁 목표가 최근 크게 문제가 된 ‘인도의 부정부패 타도’이기 때문이다.

최근 부정부패는 인도 사회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로 부상했다. 공무원들의 대형 비리사건이 잇달아 터져 나왔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지난해 말 불거진 2세대(2G) 통신 주파수 스캔들이다. 인도 감사원은 지난해 11월 보고서를 통해 2008년 2G 통신 주파수 할당 입찰 과정에서 정부에 의한 불공정한 사건이 벌어져 국가에 400억 달러의 손실을 입혔다고 밝혔다.

인도 통신정보기술부가 사업권을 허가한 122개 업체 중 85개는 입찰 참여자격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통신 담당 공무원들은 시장가보다 낮은 가격에 주파수를 할당해 인도 정부에 큰 손해를 입혔다.

2G 스캔들은 지난해 인도 정국을 뒤흔든 부정부패 의혹 중 최대 사건으로 비화됐다. 안디무투 라자 당시 통신부장관은 불명예 퇴임했다. 그러나 불똥은 만모한 싱 총리에게까지 튀었다. 청렴한 이미지를 쌓아 온 싱 총리의 정치생명은 최대 위기에 몰렸다.

지난해 인도 사회를 뒤흔든 또 다른 부패사건은 영연방올림픽으로 불리는 커먼웰스게임 조직위원회의 비리의혹. 영연방국가를 돌아가며 4년마다 열리는 ‘2010 뉴델리 커먼웰스게임’ 조직위원회 위원장이 거액의 행사 자금을 빼돌렸다는 의혹이다.

조직위원회는 또 화장지 한개를 80달러로 기록하는 등 많은 시설과 용품의 금액을 크게 부풀렸다는 것이다. 이 행사 예산의 4분의 3이 이런 수법으로 빼돌려졌는 소문도 돌았다. 이에 따라 2명의 대회조직위 관계자가 체포되는 등 대대적인 조직위 부정부패 조사가 시작됐다.

지난해 터진 대형 부패사건으로 IPL(인디언프리미어리그) 신생구단 스캔들도 있다. 세계 최대 프로 크리켓 리그 IPL의 쿠마르 모디 회장이 트위터를 통해 샤시 타루르 국무장관의 내연녀가 신생구단의 컨소시엄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고 공개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이로 인해 타루르 장관이 신생구단 지분을 내연녀가 보유할 수 있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타루르 장관은 외압 행사를 부인했으나 결국 몇 개월 후 사임했다. 인도국민당(BJP) 등 야당은 의회 차원의 조사를 요구하는 등 거센 공세에 나섰다. 결국 세무당국이 조사에 나섰고 크리켓협회는 모디 회장을 해임했다.

경제계에서도 관료들의 부정부패에 대한 우려가 터져 나왔다. 인도 최대인 타타그룹의 라탄 타타 회장은 지난해 말 타타그룹이 항공 사업을 추진하다 담당 장관이 약 37억 달러의 뇌물을 요구해 사업을 포기했다고 밝혀 파문이 일기도 했다.

대부분의 후진국이 그런 것처럼, 인도에도 부정부패가 널리 퍼져 있다. 커다란 죄의식 없이 일종의 관행처럼 부정부패가 행해진다. 인도의 부정부패는 역대 정부의 정책과 관련이 깊다. 인도정부가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규제 일변도의 허가제 경제체제하에서 공무원들은 막강한 권한을 가졌고, 이는 자연스럽게 부패를 낳았다.

그러나 1991년 인도가 해외 문호 개방과 함께 각종 규제를 철폐하면서 부정부패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십 년간 관행으로 고착된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는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요즘도 인도의 부패지수는 여전히 높은 편이다. 국제투명성기구에 따르면 인도의 부패인식지수는 10점 만점에 3.3점으로, 중국보다 10위 낮은 전 세계 87위다.

공무원들의 부패는 뇌물 등 기업들이 사업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그만큼 커진다는 사실을 뜻한다.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줄이기 위해선 엄격한 단속과 부정부패를 낳는 규제법규의 완화, 그리고 부패에 대한 국민들의 철저한 감시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최근 일고 있는 인도 국민들의 반부패 캠페인은 의미가 있다.

한 비정부기구(NGO)가 최근 만든 ‘나는 뇌물을 줬어요’라는 웹사이트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정부나 행정 간부에게 뇌물을 준 사례를 직접 소개하며 부패척결을 촉구하고 있다.

하자레의 반 부정부패 단식투쟁은 이런 가운데 나온 것이다. 그는 부패 근절을 위해 ‘록팔(Lokpal)법’이라는 고위공직자 부패수사기구(옴부즈만제도)를 설치하는 데 있어 정부 밖의 외부인도 참여토록 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하자레는 단식투쟁을 하는 동안 “정부 내에 부패가 너무나 만연해 일반인이 살기 어려울 정도”라며 “정부 통제에서 벗어난 독립적 외부인과 기관들이 옴부즈맨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자레가 단식투쟁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도 전역에서 지지 집회가 잇따랐다. 10만명 이상이 집회를 가졌고, 전국에서 지지 단식 혹은 시위가 벌어졌다. 휴대전화나 ‘페이스북’을 통한 지지자도 70만명을 넘어섰다. 언론들도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처럼 하자레의 단식투쟁 소식이 전국적 핫 이슈가 된 이유는 그가 일생 동안 쌓아 온 사회운동가로서의 명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70평생 오로지 인도 사회의 개혁을 위해 힘써 왔고,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런 업적을 인정받아 그는 1992년 인도 정부가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영예인 ‘파드마 부샨(Padma Bhushan) 상’을 받았다.

그는 1940년 인도 중서부 마하라슈트라의 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졸업 후 길거리에서 꽃을 팔아 집안 생계를 책임졌다. 군대에 운전병으로 입대해 <간디> 등의 책을 읽으면서 사회운동에 눈뜨게 된다.

1975년 군에서 제대한 그는 농촌에서 본격적으로 사회개혁가의 길을 걷는다. 물이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하는 곳에 수로를 내고, 마을에서 술과 담배를 금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또 인도 최하층의 신분인 불가촉천민(하리잔·Harijan)들을 차별하지 않는 문화를 정착시켰으며, 문맹자가 많은 농민 교육운동도 활발하게 전개했다.

특히 하자레는 1990년대부터 인도 사회의 반부패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단식투쟁도 자주하고 한때는 누명으로 인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2005년 혁신적 부패근절법안인 정보접근법이 제정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런 화려한 투쟁경력을 가진 하자레가 목숨을 걸고 반부패 단식투쟁에 나서자 인도 정치권이 들썩들썩한 것도 당연했다. 이번 그의 단식은 과거 간디의 투쟁에 비유되기도 했다. 결국 그가 단식을 시작한 지 닷새 만에 인도 정부는 손을 들었다. ‘공직자 부패수사기구에 민간인을 포함시키자’는 하자레의 요구를 100% 수용키로 했다.

인도 정부는 정계와 시민사회 동수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오는 6월 말까지 법안을 마련하고, 7월 국회에서 심의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하자레는 단식을 중단했다. 그러나 그는 “8월 15일까지 법이 시행되지 않으면 다시 시위를 벌일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했다.

하자레의 단식투쟁을 보며 느끼는 부러움이 있다. 우리 사회에도 하자레처럼 평생 동안 사회개혁에만 몰두해 온 명망 있는 운동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개인의 투쟁을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인도 정부의 넓은 아량이 놀랍다. 그런 점에서 세계 최대 인도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 아나 하자레가 최근 목숨을 건 단식투쟁에 들어가자 인도 언론들이 연일 대서특필했다(위). 인도 지도층의 부정부패로 국민들의 반부패 캠페인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