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남쪽으로 고속도로를 3시간 남짓 달리면 지방도시 바탕가스(Batangas)가 나온다. 이곳에서 다시 비포장도로로 차를 몰고 30km를 한 시간 정도 달리면 송전탑이 보인다. 바닷가 작은 마을, 이름은 일리한(Ilijan). 이곳에는 ‘필리핀의 밤’을 밝혀주는 한국전력(이하 한전)의 일리한발전소가 자리 잡고 있다.

 10명의 한국인과 90명의 현지인이 근무 중인 이 발전소가 생산하는 전력은 120만㎾. 필리핀 전체 전력생산량(1512만㎾)의 8% 수준이다. 마닐라에서 동남쪽으로 70km 떨어진 말라야(Malaya)발전소에서 만들어 내는 65만㎾를 합하면, 한전이 필리핀에서 담당하고 있는 전력 생산 비중은 12.2%에 이른다.

 900만명이 살고 있는 마닐라시를 포함해 남한 면적의 절반에 달하는 루손섬 남부를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KEPCO Light(한전의 불빛)’가 필리핀에 상륙한 것은 1998년 9월부터. 1995년 필리핀 전력공사가 발주한 말라야발 전소의 복구 및 성능 개선 공사를 한전이 수주한 게 첫단추였다.

 안중열 일리한발전소 운영부장은 “필리핀 정부와 협력해 500km 떨어진 바다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말람파야가스전)를 해저로 끌어와 연료로 사용키로 했으며 터빈도 최고 성능의 가스터빈 2기를 채택했다”고 말했다.

 전력분야의 세계적 잡지인 <POWER>지가 2003년 9월 일리한발전소를 세계 최고 발전소로 선정했을 정도로 품질과 관리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한전은 이를 밑거름으로 필리핀 중부의 휴양지인 세부섬에 또 다른 발전소 건립을 필리핀 정부에 제안, 지난해 12월 중순 착공식을 가졌다.

 세부섬에는 총 3억5000만달러를 들여 20만㎾급의 석탄 화력발전소를 2008년 말까지 완성한 다음 2009년 초에 상업운전을 시작할 방침이다. 또 세부섬의 현지 발전회사인 살콘전력의 나가(Naga)발전소 지분 40%도 570억원을 들여 인수키로 했다. 여기에다 일리한 가스복합발전소의 용량을 60만㎾ 정도 증설할 경우, 필리핀 한전법인은 필리핀 굴지의 전력공급 회사가 될 전망이다.

 이미 2004년 한해 본사로 보낸 금액만 배당금 1000만달러와 기술료 700만달러 등 모두 1700만달러에 달해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필리핀 북부에 있는 옛 미 해군 기지가 있던 수빅만 경제자유구역에는 한진중공업의 조선소 건설 공사가 3월부터 시작됐다. 수빅만의 70여만평 부지에 철구공장과 조선소를 지어 2007년 하반기부터 현지에서 선박건조를 하기로 결정했다.

 한진중공업은 중장기적으로 LNG선(액화천연가스운반선), VLCC(초대형 유조선) 등을 건조할 수 있는 대규모 조선소 시설을 갖출 계획이다. 투자규모는 올해부터 2016년까지 총7000여억원에 이를 예정이다.

 또 다른 미군 공군기지가 있던 클라크 휴양지 일대에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이 현지 리조트 사업 진출을 적극 추진 중이다. 이미 필리핀에는 삼성전자, 삼성전기와 CJ 등이 진출해 있어 한국 기업의 필리핀 행이 ‘봇물’을 이룰 조짐이다.



 한국 기업 진출 봇물

 ‘아시아의 환자(患者)’로 불리는 필리핀에 한국 기업과 관광객들이 ‘최대 구원군(救援軍)’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올 2월 현재 대·중소기업을 포함해 필리핀 현지에 투자한 한국 기업만 최소 500개사가 넘고, 여행사와 어학원은 각각 100개를 웃돈다. 마닐라 일대에 영업 중인 식당만 300여개가 넘는다.

 필리핀 주재 한국대사관에 따르면, 필리핀 내 공식 상주 교민은 6만명이지만 비공식으로는 10만~12만명에 달한다. 교민 수 기준으로 세계 7위, 동남아에서는 1위이다.

 더 놀라운 것은 신혼여행객, 골프 관광객, 은퇴자 등을 포함해 필리핀에 매주 1만여명의 한국인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는 점. 지난해 필리핀을 찾은 한국인은 51만여명으로 일본, 미국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필리핀으로 들어온 외국인 직접투자(FDI) 통계에서도 한국은 당당 수위이다. 작년 1월부터 11월까지 한국인 투자액은 91억588만페소(1페소는 약 20원)로 호주(70억페소), 일본(42억페소)을 제쳤다.

 필리핀에 한국 기업들이 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의 절반에 불과한 인건비와 영어 사용이 자유로운 우수한 노동력 덕분이라고 현지 기업인들은 말한다. 오랜 식민지 경험으로 근로자들이 대부분 순종적이고, 아로요 정부가 외국인 투자유치를 위해 최근 수빅-클라크 특구 등에 인센티브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도 매력이라는 지적이다.

 여기에다 전 국토의 30%에 매장되어 있는 최소 8000억달러 규모로 추정되는 엄청난 천연광물자원도 눈독들일만 하다는 것.

 특히 한국 기업들은 대규모 발전소나 조선소 공사를 위해 건설회사와 기자재 제공 중소기업 등이 동반 진출해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누리고 있다. 실제 일리한발전소 건설 때는 대림산업, 현대중공업 등 국내 10개 업체가 1억3500만달러어치를 필리핀에 수출했다.

 현지 업체 관계자들은 “필리핀의 풍부한 천연광물과 성장 잠재력, 양질의 노동력 등을 감안할 때 이런 열기가 한층 뜨거워질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필리핀 투자 진출 시 조심해야 할 부분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감정이 심해 철저한 사전조사와 상담 등이 필수적이다.  노사(勞使) 관계도, 현지인 채용은 문제가 없지만 해고 시 기업에 매우 불리한 조건이어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 또 토지와 건물 소유, 75만달러 미만의 소매업은 외국인에게 금지돼 있는데, 필리핀 현지인을 이용한 위장투자나 합작투자는 가급적 삼가하는 게 좋다는 지적이다. 건설·부동산 등 각종 사기 사례가 빈발하므로 계약서 작성이나 서명 시 꼼꼼하게 따지고 확인하는 게 필수적이라고 기업들은 말했다. 

 “필리핀 정부가 ‘콜 센터’ 유치를 통해 일자리 창출을 꾀하고 있는 점을 겨냥해볼만 합니다. 현지인을 이용한 OEM(주문자상표부착식) 생산이나 관광 레저, 천연자원 및 광산 개발, 사회 간접자본 분야도 승산이 있어 보입니다.” 손성만 KOTRA 마닐라 무역관장이 제시하는 필리핀 내 ‘한국 열기’ 활용 방법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