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카무라브레이스는 사고·질병으로 신체일부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신체보정기기 제작회사다. 사진은 인공 유방(오른쪽)과 의수.

시마네현은 일본열도 서쪽에 붙은 변두리다. 일본에선 과소화가 가장 심각한 지역으로 사람냄새가 사라진지 오래다. 오오다(大田)시도 그 중 하나다. 경제성장으로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일찌감치 유령도시로 전락했다. 물론 과거엔 화려했다. 16세기 중반엔 세계 은 생산량 3분의 1의 거대은광(石見銀山) 덕분에 실버러시로 북적거렸다. 이 작디작은 시골동네에 최근 발자국이 부쩍 늘었다. 인구 유입의 결정적인 역할은 어느 중소기업 덕분이다. 대중교통을 3~4번은 갈아타야 닿는 한적한 이곳에 세계가 주목하는 전문기술을 지닌 강소기업이 위치해 있어서다. 물어물어 일부러 이곳에 사람이 몰려드는 이유다. 

흔히 입지요소는 기업성쇠를 가름하는 주요변수로 거론된다. 이 말이 옳다면 이 중소기업 회사입지는 낙제점이다. 원래라면 기업은커녕 사람조차 떠나는 전형적인 시골마을인 까닭에서다. 그래서 주요언론이 기적이란 타이틀을 붙였는지도 모른다. 주인공은 나카무라브레이스다.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좋은 걸 만들면 반드시 평가받을 것”이란 생각을 고집한 나카무라 토시로가 1인으로 창업한 회사다. 주력은 의료기기 제조다. 의지장구(義肢裝具) 전문메이커로 신체기능을 도와주는 보정(補正)기기 회사다. 의지장구란 손발을 잃었을 때의 보조기기(의지)와 손발은 남았지만 기능마미·관절변형 때 쓰는 보조기기(장구)를 말한다. 의수·의족 등이 그렇다. 이밖에도 200여종에 이르는 다양한 제품 라인업을 보유했다.



- 사진은 시네마현 오오다시에 있는 나카무라브레이스 본사.
- 사진은 시네마현 오오다시에 있는 나카무라브레이스 본사.
나카무라브레이스는 약자를 위한 회사다. 사고·질병으로 신체일부를 잃어버린 이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사업모델을 가져서다. 신체적 약자가 인간존엄을 잃지 않도록 자신감을 되찾아준단 얘기다. 실제 회사의 경영이념은 사회공헌 그 자체다. 고객·직원만족을 통한 사회공헌 실천이다. 회사명의 브레이스(Brace)도 영어로 ‘(사람을) 떠받치고 활기를 불어 넣는다’는 뜻이다. 고객만족을 위해선 최고기술이 반영된 일류제품 개발·제공이 필수다. 신체 일부를 단순히 물리적으로 보충하지 않고 사용자의 자기존경·자기애까지 회복시키기 위한 제품을 고집한 이유다. 예술개념이 반영된 인공유방이 대표적이다. 빼어난 기능성과 아름다움에 탄복한 고객사연도 줄을 잇는다. 일본에서 감사편지를 가장 많이 받는 회사로도 알려졌다. 경영학자 사카모토 코우지는 이에 “일본의 가장 변두리 회사지만 지금은 일본전역서 입사희망자가 몰려들고 세계에서 고객이 찾아오는 성과를 이뤘다”고 평가했다. 산골마을의 강소기업 탄생엔 이렇듯 고객만족이 큰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효율우선은 배제됐다. 실적을 보자. 회사는 2010년(9월기) 매출액 9억 엔에 경상이익 1억3000만 엔을 달성했다. 세계 30개국에 수출하며 10년 넘게 무차입경영도 지속 중이지만 요컨대 큰돈을 벌진 못했다. 이유는 제품라인에서 찾을 수 있다. 생산라인은 크게 양산제품과 주문제품으로 나뉘는데 핵심수익원은 양산부문이다. 반면 1994년 설립된 완전수주 전담의 메디컬아트연구소(100% 자회사)는 20년 가까이 적자다. 이름에서 엿보이듯 기기를 제품에서 예술로 승화하는 전담조직이다. 없애면 이익규모가 더 커지지만 그럴 마음은 조금도 없다는 게 CEO의 속내다. “건전한 흑자부문으로 필요한 땀”이란 이유에서다. 실제 연구소부문은 돈으론 환산되지 않는 상당한 성과도 낳았다. 높은 기술력과 고객만족이 그렇다. 그리고 이는 전체 회사의 브랜드파워 상승으로 연결된다. 같은 맥락에서 장인정신의 고집도 유명하다. 회사엔 독자적인 판매망이 없다. 전국 병원에 납품하는 동업자와 대리점계약을 맺고 위탁판매 중이다. 영업사원도 없다. 오직 개발과 제조에만 특화함으로써 ‘파는 것’보단 ‘만드는 것’에 전력하는 시스템이다. 

회사는 1974년 만들어졌다. 나카무라 사장이 산골짜기 고향마을 집 옆에 붙은 창고를 개조해 사업을 시작한 게 유래다. 창업자는 고졸 후 우연히 의지장구 회사에 입사한 뒤 2년 넘게 미국 현지에서 선진 노하우를 익힌 베테랑이었다. 매뉴얼조차 없어 선배 어깨너머 눈으로 배우는 도제식이 전부일 때 과감히 미국행을 선택했고 귀국 후 시골창업을 결심했다. 창업초기 한계는 컸다. 기술력은 탁월했지만 수요는 그다지 없었다. 고객기대에 맞춰 리얼하게 만들면 채산이 맞지 않는 상황이 반복됐다. 최초의 히트상품은 창업 8년차인 1982년 탄생했다. 실리콘 고무로 만든 구두깔창이었다. 사원 한 명이 전시회 기념품으로 가져온 실리콘 재떨이를 보고 1년에 걸쳐 개발해 제품화에 성공했다. 애초부터 해외진출을 염두에 둔 그는 9개국에 특허를 취득했다. 지금까지 누계 150만개 이상 판매했다. 1986년엔 해외진출과 관련한 또 다른 전기를 맞았다. 무릎통증을 경감시키기 위한 밴드주문이 최초로 벨기에로부터 들어와서다. 세계시장 첫 출하였다.

나카무라브레이스 이름이 결정적으로 확대된 건 1991년의 일이다. 유방암으로 가슴을 절제한 여성을 위한 인공유방 개발에 성공하면서 기술진보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회사 출세작이기도 한 ‘비비화이’의 탄생이다. 실리콘고무로 만든 인공유방은 옆에서 볼 때의 모양조차 정밀하게 계산해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리얼하다. 혈관은 물론 미묘한 주름살까지 완벽하게 재현했다. 전용접착제로 붙이면 목욕도 무난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비화이 개발 후 회사의 기술력은 단기간에 업그레이드됐다. 회사제품을 봤거나 써본 이들은 “마치 살아있는 듯 압도적인 사실감”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고 할 정도다. 그러면서도 환자입장을 고려해 쓰기 편하게 배려했다. 올해 초 다큐멘터리에선 “유방에 건 어느 기업의 결단”으로 방송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실제 의지장구는 주문제작일 경우 완성까지 2~3개월은 걸리는 고단한 작업이다. 고도기술과 정성·감성·인내력이 없으면 완성하기 힘들단 점에서 더더욱 주목을 받았다. 현재 주문건수만 연간 400~500건 이상으로 알려졌다.



- 나카무라 사장은 문제가 있어도 믿고 맡기는 덕장형 CEO다. 때문에 직원들의 회사 만족도가 매우 높다.



고객만족은 사실 직원만족이 전제됐기에 가능하다. 그만큼 직원의 회사사랑과 만족도가 높다. 앞서 설명했듯 회사입지는 낙제점이다. 전형적인 산골풍경의 제조현장이다. 하지만 현장분위기는 밝고 젊고 열정적이다. 젊은 직원들이 상당수에 달해서다. 반면 근무공간은 전형적인 3D현장처럼 보인다. 실리콘·점토 같은 걸 뒤집어쓴 채 땀 흘리며 일해서다. 그래도 표정은 밝다. 자부심과 만족감이다. 회사에 따르면 직원은 도쿄·오사카 등 대도시에서 일부러 이곳에 찾아와 취직한 경우가 태반이다. 다리를 잃고 자포자기였던 한 여학생은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의족을 만들고 싶다”며 편지를 보내 결국 입사하기도 했다. 고교입학도 포기한 채 회사로 오겠다는 걸 “공부하며 많은 경험을 쌓은 뒤라면 언제든 자리를 비워놓을 것”이라던 약속 덕분이다. 실제 그녀는 5~6년 후 입사했는데 지금도 이런 젊은이가 적잖다는 게 회사설명이다.

직원과의 신뢰관계는 1호 직원을 뽑을 때부터 확고한 경영철학이었다. 문제가 있어도 믿고 맡기니 젊은 직원들은 곧잘 따라왔다. 따라온 게 아니라 끈질기게 고민하며 반드시 결과를 갖고 왔다. “눈앞의 한 명 한 명을 중요하게”라는 CEO의 생각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신뢰는 보답으로 돌아왔다. 일상적인 휴일반납이 그렇다. 회사휴일은 주말이다. 하지만 많은 사원이 주말에도 출근한다. 사장이 아무리 쉬라 해도 몰래 출근하는 일이 다반사다. 일의 특성상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에 한시라도 빨리 완성하는 게 고객에게 도움이 된다는 이유에서다. 이 마음이 고객에게 전달되는 건 물론이다. 실제 의지장구는 주문식 수작업이 많다. 손길이나 발모양 등이 모두 달라 개별고객에 맞게 대응하는 게 필수다. 또 제작 땐 모형마다 고객이름을 붙여 정성을 다한다. 고난도 작업이 끊이지 않는 배경이다. 실제 혈관·지문·털 등을 진짜 피부처럼 재현해내는 걸로 유명하다.

고객만족·직원신뢰는 선순환을 그쳐 지역부활이라는 기적까지 낳았다. 제품혁신·매출증대·기업번창의 선순환이 황폐한 시골마을을 사람이 북적대는 유명동네로 탈바꿈시켰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들이 일부러 찾아오면서 잃어버린 마을활기를 되찾아서다. 이는 창업자가 애초부터 생각해온 “많은 젊은이가 고향에서 일하고 성장해 가계를 꾸리는 꿈”을 실천해줬다. 죽어버린 산골마을은 새롭게 고쳐져 종업원의 기숙사·사택으로 제공됐고 덕분에 점포도 점차 살아나기 시작했다. 종업원·가족복지에 투자할 땐 마을경관의 보존을 염두에 둬 전통마을의 현대혁신이라는 하모니까지 연출해냈다. 사람이 찾는 마을을 만들자는 CEO의 고향사랑은 2007년 이시미(石見) 은광이 세계유산에 등록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일본 최초의 산업유산 유치를 위한 실행위원장이 나카무라 사장이었다. 은광에 관한 고지도와 문헌 등을 사비를 털어 모아온 그의 노력이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는 후문이다. 또 현의 교육위원장으로도 활동 중인데 중소기업 사장이 지역교육의 사령탑이 된 건 그만큼 교육문제에 대한 CEO의 관심·애정이 크다는 방증이다.

회사의 차기목표도 제시됐다. 이미 상품화된 인공항문을 개량해 대장암환자의 고민을 해결하겠다는 포부다. 인공항문은 직장·대장암 등의 수술로 항문을 절제한 경우 대체용품이다. 현재 관련수요는 수십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는데 대부분 수입품을 사용한다. 애초부터 일본인을 위한 게 아니라 다양한 부작용도 적잖게 거론된다. 이에 회사는 10여 년 전부터 일본의 기후풍토·식생활에 맞는 인공학문 개발·상품화에 나섰고 성공했다. 가격까지 낮춰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걸로 자신한다. 또 하나 열심인 제품개발도 있다. 대나무를 활용한 의족제작이다. 소득수준이 낮은 개도국 공략차원이다. “정부보조와 기부금 없이는 의족을 살 수 없는 사람이 아직도 세계에 많다”는 게 이유다. 이들이 의족을 사려면 저가제공이 필수다. 그러자면 원부자재·구조를 처음부터 혁신하는 게 필요하다. 그 결과물이 값싸고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대나무 활용이다. 보통의족이 20만~30만 엔임에 비해 500엔 정도의 제작비로 충분해서다. 세계 곳곳의 약자를 위한 고민의 결과다.

나카무라브레이스는 일본은 물론 세계에 없어서는 안 될 회사를 지향한다. 그래서 없어서는 안 될 걸 만든다. 급성장하진 않지만 묵묵히 제 길을 걸으며 많은 이들의 웃음을 찾는 데서 보람을 느낀다. 덕분에 상복도 터졌다. 최근 2~3년엔 거의 매달 상을 수상할 정도로 칭찬이 자자하다. 특히 사회공헌에선 대표적인 모델기업으로 이미지가 굳혀졌을 정도다. 가령 2010년 초엔 ‘제7회 기업철학 대상’을 수상했다. 갈길 잃은 일본기업의 방향제시에도 자주 언급된다. 그의 인터뷰 자료를 찾아보면 끝머리에 나오는 공통훈수가 있다. 불황 앞에 고전 중인 일본을 향한 메시지다. “일본은 숫자에 현혹돼 자신감을 잃었다. 대량생산으로 세계시장에 나선 중국을 보는 시각이 특히 위축됐다. 일본은 숫자보다 제조파워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파는 것만 관심을 갖지 말고 만드는 것 자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아쉽게도 일본은 자신의 강점을 잊고 있다”는 말은 의미심장한 분석이 아닐 수 없다.

|  Tip. CEO 탐구  |

죽을 고비에서 창업결심 …‘7년을 기다려주며 직원을 배려’

나카무라 사장은 5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마을 공무원이었지만 생활은 그다지 윤택하지 않았다. 고교졸업 후 곧 취직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우연한 만남이 오늘의 그와 회사를 만들었다. 그의 누나는 국립병원 사무직으로 근무했는데 당시 진로상담을 위해 병원을 찾아간 게 계기였다. 병원 부원장이 그에게 의수·의족처럼 약자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권유해서다. 바로 관련회사에 입사했고 이후 많은 정보와 교류를 쌓을 수 있었다. 밝은 미래성도 확인했다. 대학에서 통신교육을 이수한 뒤엔 미국에까지 찾아갔다. 단신으로 미국에 찾아와 관련공부를 하려는 그의 적극성에 반한 일본계 회사가 취직자리까지 내줬다.

어느 날 그에게 불행일 수 있는 불상사가 터졌다. 뺑소니에 치여 의식불명인 채 귀에서 피를 흘리며 병원으로 이송됐다. 힘들겠다는 판단에 영안실로 옮겨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때의 경험이 사람을 떠받치는 의료기기의 필요성을 한층 더 느끼게 해줬다. 그로부터 2년 후 74년 귀국했다. 당시는 의지장구 수요가 거의 없을 때로 주변에선 대도시에서의 창업을 줄곧 권유했다. 하지만 쓸쓸해진 고향을 지키고자 반대를 무릅쓰고 고집대로 고향에서 회사를 창업했다. 일은 없었다. 처음엔 허리가 아프다는 삼촌 부탁을 받고 코르셋을 만들어준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입소문은 빨랐다. 본격적인 비즈니스는 최초로 사원을 뽑으면서 시작됐다. 물론 사원채용조차 결코 순탄치 않았다. 최초직원은 주변의 채용청탁에서 비롯됐다. 한눈에 봐도 약해빠진 젊은이였지만 “사람을 위해 공헌하는 회사라면 당연히 뽑는 게 맞다”는 생각에 입사를 허락했다. 하지만 1시간만 일해도 곧 힘들다며 나가 떨어졌다. 병이었다. 수시로 조퇴·병가를 반복했다. 그래도 묵묵히 뒤를 봐주며 버티다 보니 7년 반이 지나서야 결국 정상근무가 가능해졌다. 당시 자르지 않은 이유로  “그 친구 나름대로는 열심히 했기 때문”이란 게 그의 답이다. 실제로도 그랬다. 최초사원은 아플 때조차 전문지식을 쌓고자 책을 읽는 등 최선을 다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주력상품 중엔 그의 아이디어도 적잖다는 게 회사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