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가·조작법 간편화로 빅히트… IT 신제품 패러다임 주도

최근 들어 미국의 전자제품 업계에서‘퓨어 디지털’이라는 회사가 주목받고 있다. 2001년 3월 설립돼 2009년 시스코에 합병된 뒤 렌즈 부분을 과감하게 간단화한 비디오카메라인 ‘플립 비디오카메라(Flip Video camera)’를 만들어내면서 각광받기 시작했다. 지난 4월까지 출시된 지 12개월 동안 무려 200만 대가 팔리는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오디오와 휴대전화 부문에서 아이팟과 아이폰이 있다면 비디오카메라 부문에서는 플립 비디오카메라가 있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다.

소셜 네트워크 트렌드와 찰떡궁합

이 비디오카메라는 전문 카메라가 절대 아니다. 모양새는 마치 아이팟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심플하다. 저장장치는 2기가 플래시 메모리가 고작이고 해상도는 640× 480로 별로 또렷하지도 않다. 녹화시간도 1시간 정도에 불과하다. 전문가용 카메라에 비하면 조악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이 단순한 제품이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요즘 크게 유행하는 페이스북이라는 소셜 네트워크 망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쉽게 화면을 올릴 수 있는 등 누구나 사용하기 간편하다는 점이 부각된 것이다. 단순한 만큼 가격도 180달러로 저렴하다.

1초당 30프레임을 찍는 이 제품의 강점은 간편한 조작법에 있다. 카메라의 기능은 모두 내장된 프로그램에 의해 조절되고 소비자들은 그저 작은 구멍 같은 렌즈를 들이대고 찍고 싶은 피사체에 맞춰 버튼만 누르면 된다. 컴퓨터에 USB 코드를 연결한 후 버튼 하나로 녹화된 파일을 업로드할 수 있다.

플립 비디오카메라의 인기와 함께 주목받는 인물이 있다. 이 제품을 개발한 조나단 캐플란 퓨어 디지털 CEO가 그 주인공이다. 캐플란이 이처럼 간단하면서도 사용하기 편리하고, 페이스북과 같은 인터넷 매체에 연결하기 쉬운 카메라를 만들려고 생각한 것은 어렸을 때부터의 목표였다.

캐플란은 최근 미국의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집안에 놓인 식기세척기를 보면서 ‘도대체 이 많은 버튼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밝힐 만큼 현대의 ‘그럴싸한’ 전자제품의 복잡함에 거부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간단한 전자제품을 향한 캐플란의 마인드가 열정적인 업로더인 유튜브 추종자들의 기호와 맞아 떨어지며 흥행에 성공한 것이다.

퓨어 디지털의 모회사인 시스코의 지원도 성공의 든든한 배경이 됐다. 시스코는 캐플란을 영입해 퓨어 디지털이 제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자사의 운용 프로그램 체제에 쉽게 연결되도록 하는 등의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를 담당하는 부서가 시스코 내에 새로 생길 정도로 시스코는 캐플란에게 각별한 공을 들였다. 현재 이 부서는 ‘ypuCisco’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시스코의 노력은 결과적으로 적잖은 결실로 돌아왔다. 캐플란이 설립한 퓨어 디지털을 6820만달러에 인수한 후 시스코의 전체 수익이 무려 23%나 치솟았다. 이 기간 동안 퓨어 디지털의 종업원은 3배 이상인 1000명 선으로 불어났다. 시스코가 퓨어 디지털을 인수할 당시만 해도 5900만달러를 추가로 투입해야 제대로 운영될 수 있을 것이라며 인수 결과를 비관적으로 본 전문가들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간 셈이다.

모회사인 시스코 지원 효과 만점

퓨어 디지털 인수가 시스코에 안겨 준 진정한 열매는 크게 늘어난 실적 이면에 있다. 무엇보다 시스코는 이 인수를 통해 기업의 이미지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종전까지 시스코의 이미지는 컴퓨터 시스템을 제공하는 ‘그림의 배경’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비디오카메라라는 소비재를 판매하면서 닌텐도나 애플 같은 대중적 이미지를 획득했다. 소비자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그림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 것이다. 소비재를 추가하면서 발생한 이익은 100억달러 규모에 이른다.

플립 비디오카메라의 성공으로 캐플란은 <블룸버그>가 선정하는 세계 웹 비즈니스에서 영향력 있는 25인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됐다. 단순히 히트 상품 하나 내놓은 것을 넘어 ‘캐플란 효과’를 일으키고 있다는 이유다. 캐플란의 성공은 시스코의 다른 사업 부문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시스코에게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다.

지난 4월 시스코가 개발한 무선 인터넷 라우터는 캐플란 효과가 발휘된 대표적인 제품으로 꼽힌다. 이 제품은 조작법을 기존의 제품에 비해 획기적으로 단순화해 초보자들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기존 무선 라우터가 12단계에 걸친 셋업 작업을 해야 하는 데 비해 이 제품의 세팅 과정은 단 4단계에 불과하다. 거의 자동으로 설치되기 때문에 초보자들도 쉽게 셋업할 수 있다.

조개처럼 생긴 이 새로운 무선 라우터는 캐플란의 플립 카메라처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일단 가격이 150달러 선으로 저렴한 편이다. 성능도 나무랄 데가 없다. 기존의 라우터보다 속도가 빠른 것이다. 소비자 입장에선 무선 인터넷 라우터를 간편하게 셋업해 기존 라우터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인터넷을 즐길 수 있게 됐으니 즐겁지 않을 수 없다.

플립 디지털카메라나 시스코의 이번 라우터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디엇 푸르프(idiot-proof)’라 불리는 유형의 제품이다. 아무나 설치해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바보가 되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의 새로운 제품 개념인데 전문가들은 이 개념의 제품이 향후 적잖은 반향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실제로 이디엇 푸르프 개념은 모든 전자제품으로 확대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때 전문성을 높이려는 소비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며 고가격대의 복잡한 고급 제품이 인기를 끌었지만 이제부터는 제품의 성능은 좋으면서도 조작이 간단한, 사용하기 쉬운 제품으로 트렌드가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새로운 추세는 삼성이나 소니 등 기존의 전자제품의 명가들에게도 상당한 충격을 줬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소니나 삼성 등도 최근 들어서는 사용하기 쉬우면서도 고성능인, 소비자들 친화도가 높은 제품을 개발하는 것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된 상황’이라고 전해진다.

간단하다고 해서 그 자체가 갖는 활용도나 성능이 다른 제품에 비해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디엇 푸르프는 높은 성능을 유지하기 위해 제품 자체 내에 자동으로 움직이는 프로그램이나 기기가 내장된다는 개념으로 봐야 한다. 투입되는 프로그램과 내장기기가 더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다는 말이며, 원가 측면에서도 캐플란이 제시하는 가격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여기에 캐플란이 설립한 퓨어 디지털의 장점과 강점이 있는 것이다. 캐플란은 이에 대해 “오디오 부문에서 애플이 그렇게 했듯 비디오 부문에서는 퓨어 디지털이 그런 일을 한 것이다”고 자신의 사업구상의 성공 포인트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시행착오 각오한 도전정신 주목

최근 들어서는 아이팟이 자신의 제품에 비디오카메라 성능을 내장해 플립 카메라에 대응하려 하지만 역부족으로 평가된다. 이미 플립 카메라는 지난해 크리스마스 선물용으로 아이팟을 누를 만큼 높은 인기를 얻었다. 캐플란은 “아마도 아이팟이 얼마 안 있어 플립 카메라를 누를 만한 성능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도 “그러나 그때가 되면 우리 제품은 아마도 또 다른 모양으로 한 걸음 앞서 나가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캐플란이 좋은 성능에 쓰기 편한 제품의 개념을 플립 카메라에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 역시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캐플란은 플립 카메라가 인기를 끌기 전 애플의 아이폰이 아닌 자신의 개념에 의해 만들어진 아이폰(당시 그가 고안한 휴대전화의 이름이 아이폰이다)을 개발했었다. 링크시스의 로고를 달고 나온 이 제품은 집안이나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무선 라우터의 신호를 받아 사용하는 인터넷폰이었다.

그러나 그 제품은 혹평을 받았다. 소비자들이 들고 다니기 어려운 직사각형의 초창기 휴대전화 형태였던 데다 크기도 컸다. 배터리는 단 30분밖에 사용할 수 없는 소용량이었다. 소비자평가기관들은 이를 “하얀색의 커다란 플라스틱 덩어리”라고 혹평했으며, 흥행은 대실패로 막을 내렸다.

사실 캐플란이 플립 카메라를 고안하기 이전에 내놓은 제품은 일회용 디지털카메라였다. 소매 유통의 대명사인 CVS나 라이트에이드 등 약국을 겸한 소비제품 판매점에서 선보였는데 반응은 괜찮았다. 싼 가격에 질 좋은 화면을 찍어낼 수 있는 이 카메라는 수백만 대가 판매되면서 퓨어 디지털의 성장의 발판이 됐다.

시행착오를 겪기는 했지만 또 다른 틈새를 노린 제품을 쉼 없이 개발해내는 것이 오늘날의 캐플란과 퓨어 디지털을 만들었다고 관계자들은 평한다. 시스코라는 거대 회사의 지원도 성공의 밑거름이 된 것은 물론이다. 시스코가 그를 영입해 소비재 사업 부문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하지 않았다면 ‘비디오카메라계의 아이팟’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란 얘기다.

경제 전문가들은 “설립 당시부터 시스코의 강점은 다른 회사들과 결합했을 때 더 많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이다”고 평가한다. 부질없는 몸집 부풀리기나 기존 사업과 전혀 상관없는 부문을 더해 그룹 총수가 갖는 영향력이나 눈앞의 이익만을 노리는 허튼 결합이 아니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을 합치는 시스코의 경영이 캐플란의 업적을 낳게 한 또 다른 원동력이라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