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죽는 노인· 연애 포기한 젊은이…

“일본, 기댈 곳이 없다”

일본 사회가 고독에 빠졌다. 제일 큰 이유는 가난이다. 돈이 없으니 인간관계마저 끊어진 것이다. ‘독신=가난’ 항등식의 성립이다. 지금은 노인인구에 포커스가 맞춰지지만, 그 연령은 계속 낮아진다. 여기서 충격적인 사건사고는 시작된다. 생계형 범죄부터 아사와 자살로까지 이어진다. 공통점은 ‘외로운 죽음’이다. 고독사(孤獨死)다. 주요언론은 이를 ‘무연사회(無緣社會)’의 확대로 이해한다. 한편에선 고독을 비즈니스로 연결시킨 신종 사업도 성업 중이다. 풍족했던 과거를 그리는 노스탤지어는 이미 중요한 성공 키워드 중 하나다. 연고가 사라진 일본 사회, 그 가난 보고서를 살펴보자.

승자독식 경제논리의 역풍

610조엔(2009년 기준). 일본의 대외채권 규모다. 부자나라의 행복한 성적표다. 잠시 중국에 1위 자리를 내줬지만, 금방 되찾았다. 국부(國富)의 상징은 또 있다. 1500조엔 안팎의 개인 금융자산이 그렇다. 빚(대외채무)이 많아도 곳간이 탄탄하니 디폴트 경고도 그러려니 싶을 정도다. 그런데 사실 속내는 괴롭다는 게 정설이다. 가난한 국민이 급격히 늘어나서다. 경제문제가 곧잘 사회문제로 번지는 원인도 여기에 있다. 일례로 2006년 일본 사회의 키워드는 ‘격차(格差)사회’였다. 최근엔 한발 더 나갔다. 격차의 종착을 의미하듯 ‘무연(無緣)사회’가 새로운 유행어로 떠올랐다. 승자독식의 경제논리가 일본 특유의 공고한 사회적 네트워크마저 끊어버렸단 의미다. 2010년 일본 사회가 아슬아슬한 이유다.

‘무연사회’는 NHK의 2010년도 기획보도다. 지난 1월 말 조용하지만 거세게 진전되는 무연사회의 난맥상이 보도된 이래 관련 기사는 하루가 멀게 흘러나오고 있다. 방송 직후 1시간도 되지 않아 게시판에 1만4000여 건의 댓글이 달릴 만큼 국민적 관심도 뜨거웠다. 뒤이어 4월에는 <주간다이아몬드>를 비롯한 주요 매체가 무연사회의 심각성과 대응과제를 보도하며 방안모색을 강구하고 나섰다. 보도된 지 6개월이 지났지만, 무연사회의 위기감이란 게 그만큼 깊고 쓰라리단 증거다.

연(緣)은 비유컨대 사람과의 관계이자 네트워크다. 그렇다면 무연은 그 연이 없어졌거나 끊어진 상태를 뜻한다. 주변에 의지할 사람이 없는 경우다. 이들은 가족·친척·고향과 연을 끊고 지역사회와의 교류도 없다. 혈연·지연의 기능 상실이다. 그나마 회사를 다니면 끈끈하진 않아도 사연(社緣)에 기댈 순 있다. 하지만 회사에서 잘리면 직장동료와의 연도 단절되게 마련이다. 궁극의 고독이다. 여기엔 한국만큼 크진 않지만 학연의 상실감도 더해진다. 일종의 사회적 고독·고립이다. 이때의 죽음이 고독사다. 무연사(無緣死)란 고독사의 다른 말로 타인과 인연을 맺지 않고, 맺지 않으려는 무연사회가 전제된 개념이다.

기업 주도 사회보장 시스템 붕괴

무연의 부각은 고독사 증가가 힌트로 작용했다. NHK 보도팀도 애초 자살 증가 이유를 취재하다가, 그 과정에서 우연히 고독사가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방향을 틀었다. 실제로 일본에선 연간 3만2000명의 고독사가 보고된다. 아무도 모르게 임종을 맞이하는 경우다. 게다가 대부분 사망 후 한참 뒤 냄새 등으로 신고가 있은 다음에야 발견된다. 사망자는 대개 독신자다.

무연사회의 충격이 큰 건 역설적으로 과거 일본 사회의 유연(有緣)화가 그만큼 강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연이 없는 게 아니라 연이 기능하지 않는 게 문제란 지적이다. 일본의 사회 안전망은 흔히 개발주의 복지모델로 불린다. 고도성장기에 기업이 종신고용, 연공서열을 통해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품으면서 생활보장에 앞장섰다. 대졸 후 신입사원으로 입사하면 평생에 걸쳐 결혼·육아·개호 등의 복지 수요가 기업 내부에서 해결됐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지방경제 종사자의 경우 중앙정부의 공공투자 수요로 일자리가 보장됐다. 마지막으로 정부의 복지 시스템은 여성·고령 근로자 등 기업사회가 커버하지 못하는 극히 일부에 한정해 가동됐다. 즉 일본의 사회보장 시스템은 정부보다는 기업이 도맡아 담당한 셈이다. 공적 역할의 상당부분을 가족과 기업에 전가시켰단 얘기다. 이는 인플레이션 시대에는 유지될 수 있었지만 이젠 깨져버렸다. 1990년대 이후 복지 축소, 규제 완화, 시장 개방 등의 신자유주의 운영논리가 이식된 결과다. 기업의 복지 안전망이 붕괴되면서 미끄럼틀에서 미끄러진 중산층 이하의 삶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연사회의 절대 지분은 독신 고령자에 있다. 지역사회와 가족관계의 양상이 급변하면서 대도시 독신 고령자의 사회적 고립은 상상을 뛰어넘는 정도가 됐다. 2000년 이후 고령자 대상의 복지시책을 축소시킨 개호보험 실시 등도 영향이 컸다. 개호보험제도 전엔 최하위의 심각한 생활문제를 지닌 경우 기존의 복지제도가 커버했지만 이젠 그나마 없어졌다. 공고했던 지역 커뮤니티에 무연 해결을 맡기는 것도 하중이 과다해 기능 부전 상태에 빠졌다.

상황이 이러니 후지와라 도모미가 <폭주노인(暴走老人)>이란 책에서 썼듯 외로워진 노인들에 의한 사회범죄도 최근 증가세다. 이성과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 폭발이 자포자기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특히 여성 고령자가 문제다. 돈 없이 장수하다 보니 극빈층의 상당부분이 여성의 빈곤문제로 압축된다. 메이지 대학 실태조사를 보면 독거가구의 80%가 여성이며 이중 생활보호자 기준에 상당하는 연수입 150만엔 이하가 30%를 차지한다. 그중 그나마 정부의 생활보호를 받는 비중은 16%에 불과하다.

무연사회의 후폭풍은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무연사 예비군’이다. NHK 방송 이후 인터넷 등 온라인 공간에서의 반향이 특히 컸는데, 이들의 절대다수는 3040세대로 요약된다. 불안·공포감이 확산되면서 조만간 자신도 무연 처지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압박감이 표현된 것이다. 워킹푸어에 예외는 있어도 무연 여부는 장담할 수 없다는 인식이다. 그만큼 무연 공포는 세대와 빈부를 뛰어넘는 포괄적인 이슈다.

실제로 일본은 이미 무연사회 직전단계인 독신사회에 접어들었다. 독신가구 숫자만 1500만 명에 육박한다(국립사회보장·인구문제연구소). 유연의 절대관문인 결혼만 해도 젊은이들 사이에선 만만찮은 과제로 등장했다. 결혼이 약육강식의 원리에 휩싸이면서 저소득자·비정규직의 경우 어쩔 수 없는 독신이 불가피해졌다. 팍팍해진 삶을 생각하면 연애 자체가 사치로 간주된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대량의 독신남성이 고독사할 것이란 경고도 잇따른다. 

3040세대의 독신 경향은 초식남성을 양산했다. 여성에 소극적인 남성이 늘면서 인터넷에선 고남(孤男; 한 번도 애인이 없었던 남자)과 독남(毒男; 독신남성) 등 독신남성의 종류를 한층 세분화한 단어도 유행이다. 실제로 2005년 기준 남성의 생애 미혼율(50세 시점에서 한 번도 결혼하지 않은 사람의 비율)이 약 16%에 달한다. 6명 중 1명꼴이다. 30대로 앞당기면 38.6%, 40대는 19.6%가 미혼이다.

반대로 여성의 눈높이는 높다. 젊은 여성의 경우 전업주부 지향이 강한 데다 고수입 남성만을 찾는 경향이 강하다. 도쿄 거주 25~34세 미혼여성의 70%가 결혼 상대의 수입을 연 400만엔 이상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현실은 동년배 남성의 약 80%가 그 이하를 받는다. 비정규직 남성은 그나마 기회조차 박탈당한다. 정규직 남성의 미혼률은 30대 후반에 33.8%까지 떨어지지만 파견사원은 70.7%나 된다. 참고로 30년 전 남성의 생애 미혼률은 2%에 머물렀다.

외로운 사람 위한 비즈니스 ‘성업 중’

한편에선 무연사회가 또 다른 사업모델로 등장했다. 무연 비즈니스다. 실제로 다양한 독신 대상 비즈니스와 상품 개발이 최근 줄을 잇는다. 사후 주변정리와 유품 정리, 화장 등을 전문으로 하는 특수청소업이 대표적이다. 전국에 수백 개 회사가 성업 중이다. NHK 취재팀에 따르면 최근 2~3년 새에 특수청소업과 NPO 법인 등이 급증했다. 여기엔 무연사에 대응하려는 지자체 등의 의뢰수요도 늘고 있다. 공동묘지와 대화 파트너(유료전화), 보증 대행 등의 사업도 번성 중이다. 고독사 후 유품 정리, 청소 대행을 해주는 ‘키퍼즈’라는 회사는 경쟁 격화에도 불구 연간 1500건 이상 처리 중이다. 요금은 건당 평균 25만~30만엔(300만~360만원)이다. 단신 고령자가 무연으로 거주하는 고령자 시설에는 공동묘지 건설 착수 등 생전부터 사후준비를 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최근 유통망 변화에 따라 골목길 구멍가게가 급감하면서 거동하기 힘든 독거노인을 위한 쇼핑 대행도 생겨났다. 생필품을 제때 사지 못해 ‘구매 난민’이라 불릴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진 결과다. 전기포트의 사용 여부를 무선통신으로 파악해 가족·지인의 휴대전화에 자동으로 알려주는 시스템도 인기다. 차를 즐기는 일본인의 특성을 고려해 일상 파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TV 광고로도 좀 알려졌는데, 현재 월 3150엔에 3900건 정도 계약된 상태다. 다만 이 경우 확대 적용엔 한계가 있다. 현행 개호보험의 적용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어서다. 독거가구의 생활정보를 통해 이상 사태를 파악한다는 아이디어는 가스 사용량, 냉장고 개폐 정도 등의 유사 활용 기술로도 이어져 현재 조금씩 시장이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동산도 무연 비즈니스가 비교적 활발한 분야다. 공유주거·집합하우스 등 새로운 주거형태가 각광을 받고 있어서다. 전후 일본 사회는 임대에서 보유로, 아파트에서 단독주택으로 주거방식을 급선회했다. 보다 넓고 프라이버시가 보장된 건 물론이다. 다만 이는 지역과의 연결을 끊고 고립성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저임금 독신여성과 비정규직 근로자의 노후를 생각하면 현재의 주거형태는 불합격이란 지적이 많다. 대량의 무연사를 야기할 게 뻔해서다.

그 대안은 함께 사는 집합공간의 실현이다. 업계에 따르면 수도권에만 약 1만 명이 집합공간에 거주한다. 각각의 전용공간에 화장실·부엌 등의 공유공간이 함께 배치된다. 업자로서는 각각의 공유공간을 하나로 묶어 건축비를 절감하고, 이를 임대료에 반영할 수 있어 경제적이다. 월 2만엔부터 수영장·요가시설까지 갖춘 수십만엔대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무엇보다 공유시설의 존재는 거주자끼리의 교류를 확대시켜준다. 고독을 존중하면서도 고립시키지 않는 지혜가 묻어난 거주형태다. 즉 생활 인연의 수립이다.

특히 여성 전용이 인기다. 일종의 노후대책으로까지 인식하며 적극적인 입주를 희망하는 사례도 증가세다. 여성끼리의 인연 만들기다. 여러 형태의 동료들과 노후를 안전하게 보내려는 네트워크의 구성이다. 이는 독신여성의 증가에 따른 필연적인 자구책 중 하나로 평가된다. 과거 보육소가 적었을 때 엄마들끼리 모여 자녀 육아문제를 해결했듯 새로운 인간관계를 구축하기 쉽다는 점에서 여연(女緣)의 수립이라고까지 일컬어진다.

이들의 경우 상호협력으로 생활비를 아끼는데, 몇몇의 경우 아예 식재료까지 공유하며 여성 특유의 친밀감이 확대된 사례도 있다. 공동생활에서 오는 마찰은 정례회에서 대화로 해결하는 식이다. 물론 비용이나 취향, 선호 등의 이유로 공동주택 건설 및 입주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도 적잖다. 일종의 시행착오다.

공동체 통한 연대강화 ‘한 목소리’

무연사회의 해결을 위한 노력은 다각적이다. 방송 이후 정부의 특단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정책차원의 대응방안도 가시적이다. 신속하고 광범위한 해결책을 요구하는 주요언론은 ‘1회성 보도에 그치지 않겠다’며 강한 의욕을 내보인다. 이웃, 지역공동체의 부활을 통해 커뮤니케이션, 인간관계를 해법으로 제시하는 전문가도 많다. 즉 사람과의 인연을 중시하는 삶인 ‘유연사회’의 부활이다. 연대를 중시하잔 의미다.

이런 차원에서 ‘새로운 공공’이 제창 중이다. 이때 중요한 건 단순한 고립사의 감소와 함께 고립된 삶의 구제가 시급하다는 공감대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사실 본인의 마음가짐이다. 전문가들은 “사랑방을 만들어도 정작 독거노인들이 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고립생활에 빠지기 전에 주민들과 어울리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무연사회 극복을 위한 결정적인 키는 정작 다른 데 있을 수 있다. 사회 안전망의 회복과 복지 시스템의 구축을 위한 정부, 기업 차원의 인식 재고와 방향 전환이다. 지금의 적자생존, 승자독식의 운영구조를 느슨하게 하는 대신 연대부활, 사회통합을 위한 배려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2010년 일본 사회의 무연 먹구름은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도 서둘러 예방책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