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서니 앨버니지(가운데)가 5월 21일 총리로 당선된 후 아내와 아들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사진 EPA연합
앤서니 앨버니지(가운데)가 5월 21일 총리로 당선된 후 아내와 아들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사진 EPA연합

“장애인 연금 수급자인 싱글맘의 아들이자, 공공주택에서 자란 제가 호주 총리가 됐습니다. 제 인생 여정이 많은 호주인에게 영감이 되길 바랍니다.” 

노동당 후보 앤서니 앨버니지(Anthony Albanese·59)는 5월 21일(이하 현지시각) 호주 31번째 총리로 당선된 후 기념 연설에서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자신의 인생을 회고했다. 호주 최초의 비영국계 총리가 된 앨버니지는 “당신이 어디서 살든, 누구를 믿든, 누구를 사랑하든,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든,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인생을 제약하지 않는 국가로 지속되기를 희망한다”라고 했다. 

당선 연설에서 말했듯 앨버니지의 인생 여정은 여느 정치인과는 달랐다. 그는 1963년 시드니 서부에 있는 캠퍼다운에서 태어나 아일랜드 출신 홀어머니 아래서 자랐다. 미혼모였던 어머니는 그에게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14세 때 “크루즈로 유럽 여행을 하던 중 이탈리아인 승무원을 만나 너를 임신했다”는 진실을 듣게 됐다. 이미 약혼자가 있었던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와 결혼할 수 없었고, 어머니는 두 사람의 관계를 비밀에 묻었다. 앨버니지는 2002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아버지를 찾아 나섰고, 2009년 46세가 돼서야 아버지와 두 명의 이복형제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유년 시절은 풍족하지 않았다. 만성 류머티즘성 관절염을 앓았던 어머니는 임시직 청소부로 일하며 벌어온 돈과 장애연금으로 앨버니지를 키웠다. 돈이 부족할 때는 이웃에게 음식을 얻어 그에게 먹이곤 했다. 어머니는 한 남성을 만나 결혼하기도 했으나, 알코올 중독자였던 새 아버지가 학대를 일삼는 바람에 두 달도 안 돼 헤어지고 말았다. 그는 12세 때 자신이 살던 공공주택의 임대료가 크게 인상되려 하자, 다른 세입자들과 연대하며 이를 막았다. 앨버니지는 “나는 자라면서 ‘정부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내가 정치에 입문한 계기”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앨버니지의 어머니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에게 많은 걸 해주려고 애썼다. 앨버니지는 가족 중 유일하게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사람이자, 대학에 진학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시드니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학창 시절 노동당 평당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머니는 나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줬고, 자신이 한 번도 하지 못했던 경험을 나에게 시켜주려고 지원해줬다”며 “나 또한 나의 아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앨버니지는 1996년 서른셋의 나이로 뉴사우스웨일스주 그레인들러 지역구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돼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1년부터 예비내각에 참여했고, 2007년 케빈 러드 총리 시절 인프라 및 교통부 장관이 됐다. 2013년 당 부대표 및 연방 부총리에 취임했지만, 노동당이 총선에서 패해 10주 만에 물러났다가 2019년 당 대표가 됐다.

인권, 빈곤, 환경, 의료 문제에 목소리를 높여왔던 앨버니지는 정치 경력 20여 년 만에 총리로 올라섰다. 그는 호주 정부가 수립된 지 121년 만에 처음으로 영국계가 아닌 총리이자, 빈곤한 유년 시절을 경험한 총리가 됐다. 노동당은 8년 9개월 만에 자유·국민 연합을 누르고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5월 24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쿼드 정상회의. 왼쪽부터 호주·미국·일본·인도 정상순. 사진 연합뉴스
5월 24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쿼드 정상회의. 왼쪽부터 호주·미국·일본·인도 정상순. 사진 연합뉴스

연결 포인트 1
노동당 집권으로 호주·중국 관계 개선 가능할까

앨버니지 집권으로 얼어붙었던 호주와 중국의 관계도 점차 개선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양국 관계는 2018년 호주 정부가 중국 기업 화웨이의 호주 5G(5세대 이동통신) 사업 참여를 금지하며 악화했다. 양측 관계는 2020년 4월 모리슨 총리가 코로나19 기원(起源)에 대한 국제 조사를 지지하면서 무역 전쟁으로 치달았다. 중국은 호주산 육류와 석탄 수입을 금지하고, 호주산 보리와 와인에는 관세를 부과했고, 호주는 쿼드(Quad, 미·일·호주·인도 안보협의체), 오커스(AUKUS, 미·영·호주 안보동맹) 등 대중 견제 노선에 동참하며 맞섰다. 

최근 중국이 호주 북동쪽에서 약 2000㎞ 떨어진 솔로몬제도와 ‘질서 유지를 위해 무장경찰을 파견할 수 있다’는 내용의 안보 협정을 체결하면서, 양국 갈등은 더욱 불이 붙었다. 앨버니지는 선거 운동 당시 모리슨 총리에게 “중국과 솔로몬제도 간 안보협정은 외교정책 실패”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실패라고 볼 수도 있다”고 비판했다.

중국은 앨버니지 당선 후 친중국 노선인 노동당 정부 출범을 환영하며 양국 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다.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는 앨버니지 총리에게 보낸 축전에서 “호주와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보기 위해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 포괄적인 전략 동반자 관계를 발전시키자”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앨버니지는 “호주의 대중국 정책엔 어떤 변화도 없을 것”이라는 의사를 밝혀왔다. 그는 5월 23일 열린 취임 기자회견에서도 “변한 것은 호주가 아니라 중국”이라고 지적하고 “호주는 언제나 우리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날 도쿄에서 열린 쿼드 정상회의에 참석, 미국과 일본의 대중국 견제 행보에 동참하기도 했다.

 


연결 포인트 2
임금 뺀 모든 것이 오른다
경제 회복은 과제 

치열한 선거를 거쳐 당선된 앨버니지에게 탄탄대로만 남은 건 아니다. 그는 호주의 치솟는 인플레이션으로 어려워진 국민 생계를 해결해야 한다. 지난 3월 기준 호주의 연간 물가상승률은 5.1%까지 치솟으며 2001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고 주택 가격까지 폭등해 국민의 불만이 커진 상황이다. 자유·국민 연합 정권 10년간 적자가 지속되며, 총부채는 1조달러(약 1291조원)를 넘어선 상황이다. 앨버니지는 선거운동 때부터 “임금을 뺀 모든 것이 오르고 있다”며 “집권당이 인플레이션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공약으로 일자리 확대, 아동·노인 돌봄 예산 확대, 최저임금 5.1% 인상 등을 내세우며 “취약계층의 생활비 상승 고통을 완화시키겠다”고 공언해왔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등 대내외적 변수로 치솟는 인플레이션을 잡기란 어려운 상황이다. 

기후 변화 대응도 주요 과제다. 지난 3년간 호주에서는 기후 변화로 인한 기록적인 산불과 최악의 가뭄, 홍수가 발생해 500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세계 최대 산호초 지대인 호주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도 대규모 백화현상으로 피해를 봤다. 

앨버니지는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43% 감축하겠다고 공약했다. 모리스 전 총리의 목표(2005년 대비 26% 감축)보다 높은 수준이다. 석탄 의존도가 높아 1인당 탄소 배출량이 전 세계 순위권에 뽑힐 정도로 높은 편이기 때문에 전기차 구입을 촉진하고, 재생에너지 투자도 늘리기로 했다. 그는 당선 연설에서 “호주가 기후전쟁을 끝낼 기회를 얻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