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 보기

전 세계를 덮친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공포가 동시다발적으로 각국 정권 기반을 뒤흔들고 있다.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까지 덮치면서 물가가 급등하자 민심이 요동친 것이다.

최근 치러진 프랑스 하원 선거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집권 여당은 20년 만에 처음으로 과반의석 확보에 실패했고, 콜롬비아 대선에서도 기존 집권 여당이 패배하며 사상 첫 좌파 정권이 탄생했다. 미국에서도 조 바이든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발목이 잡혀 재선에 먹구름이 끼고 있다. 7월에 치르는 일본 참의원(상원) 선거도 인플레이션이 주요 이슈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코노미조선’은 인플레이션이 각국 정치까지 뒤흔들고 있는 상황을 짚어봤다.


프랑스│여당 과반의석 확보 실패

인플레이션에 ‘한방’ 먹은 대표적인 나라는 프랑스다.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범여권이 프랑스 하원 선거에서 과반의석을 얻는 데 실패했는데, 이는 무려 2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이로써 프랑스 ‘역대 최연소 대통령’과 ‘20년 만의 재선 대통령’이란 타이틀을 거머쥔 마크롱 대통령은 ‘20년 만에 첫 과반 확보 실패 대통령’이란 불명예까지 함께 얻게 됐다.

프랑스 내무부는 6월 19일(이하 현지시각) 하원 결선투표 집계 결과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르네상스당’을 포함한 중도 범여권 연합 ‘앙상블’이 전체 577석 중 245석을 얻었다고 밝혔다. 이는 정당별 의석수 1위에 해당하지만, 하원 의석의 과반인 289석에서 44석이 모자라 단독 법안처리가 불가능하다. 프랑스 하원 임기는 5년으로, 마크롱 정부 2기의 험로가 예상된다. 현재 범여권이 차지하고 있는 345석에 비해서도 100석 줄어든 것이다. 좌파 연합 ‘뉘프’는 131석을 얻어 제1 야당으로 올라섰다.

그는 “세계가 무질서하니 집권 여당의 안정적인 국정 운영이 필요하다”고 호소했지만, 인플레이션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프랑스 내부에서는 마크롱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위기 해결사’를 자처하며 유럽연합(EU) 내 리더십 증명에만 매달리느라 정작 국내 물가 상승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결과라는 평이 나온다. 프랑스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월 대비 5.8% 올라 EU 기준으로 CPI 산출을 시작한 1990년 이래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이번 하원 선거는 프랑스인의 관심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외교 문제에서 ‘먹고사니즘’ 문제로 옮겨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로이터는 야권이 에너지·식료품 가격 급등과 구매력 감소라는 유권자들의 좌절감을 선거전에 최대한 활용해 이겼다고 분석했다. 프랑스는 휘발유 가격과 전기료 상한선 덕분에 다른 유로존 국가보다 낮은 물가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프랑스인도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국면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마크롱 대통령은 감세, 은퇴 연령 상향 등을 놓고 자신과 배치된 공약을 내건 야당과 공생해야 하는 고민을 안게 됐다. AFP통신은 입법 활동 마비와 무질서한 합종연횡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했다.


콜롬비아│사상 처음 좌파 정권 탄생

프랑스 하원 선거와 같은 날 치러진 콜롬비아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서도 인플레이션은 정권을 교체시켰다. 좌파 연합의 구스타보 페트로 후보가 50.4%를 득표하면서 콜롬비아 사상 처음으로 좌파 정권이 탄생했다. 

좌익 게릴라 출신인 페트로의 승리에는 물가 급등으로 현 정권에 분노한 민심이 컸다. 페트로는 현 정부 경제정책을 비판하며 팬데믹과 전쟁 여파로 생활 여건이 악화한 빈민층을 공략했다. 그는 연금 개혁과 석탄·석유산업 축소, 부자 증세 등 전형적인 좌파 사상이 담긴 공약을 내걸고 선거를 치렀다. 

이는 기득권 세력이 빈곤과 불평등을 심화했다는 인식을 가진 콜롬비아 유권자의 공감을 샀다. 콜롬비아는 빈곤율 40%에 달하며 실업률 11%를 기록하고 있는 국가다. 팬데믹으로 2020년 이후 남미에선 한 해 약 1200만 명이 중산층에서 밀려날 만큼 먹고 살기가 팍팍해졌는데, 여기에 물가까지 치솟으니 유권자들이 보수 기득권 세력을 불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코로나19 로 빈곤과 불평등이 심해졌고 현 정권을 반대하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다”고 했다. 


미국│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 힘 커지나

앞으로 치러질 세계 각국 선거에서도 인플레이션 문제는 핵심 이슈가 될 전망이다. 특히 인플레이션은 오는 11월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발목을 잡고 있다. 미 상원의원 100명 중 34명, 하원의원 435명 전원, 주지사 50명 중 3명을 새로 뽑는 이번 중간선거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은 가까스로 유지 중인 상·하원 과반수를 공화당에 넘겨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1981년 이후 40여 년 만에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는 모든 국정 이슈가 인플레이션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상황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물가를 최우선 국정 과제로 올려놓고 기존 정부 방침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거나 뒤집고 있다. 그는 미·중 무역전쟁 속에서도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중국산 소비재에 대한 관세 인하를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인플레이션을 막지 못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의 최대 역점 사업인 1조2000억달러 규모의 인프라(기반 시설) 프로젝트도 인플레이션 때문에 차질이 생기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지역별 도로·교량·수도 등 낙후한 인프라를 개선하기 위한 것으로, 바이든 대통령이 어렵게 의회를 통과시켰다. 그러나 물가 상승기에 정부가 막대한 돈을 풀면서 인플레이션을 키웠다는 비판에 부닥쳤고 결국 사후 추정비 상승으로 줄줄이 연기되거나 취소되고 있다. 

현재 상황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재선도 불투명해졌다. 2024년 차기 대선 가상 대결에서 바이든 대통령 지지율은 42%를 기록해 오차 범위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44%)에게 처음으로 밀렸다.


일본│참의원 선거 쟁점은 ‘물가 대책’

일본도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내각에 대한 중간 평가 의미를 갖는 일본 참의원 선거가 7월 10일 열린다. 선거를 앞두고 6월 22일부터 18일간의 선거전이 시작됐다. 지난해 10월 출범한 기시다 내각 지지율이 현재 60%를 넘어서고 있는 만큼 여당이 과반 의석을 무난히 달성할 것으로 일본 언론은 예상하지만, 야당은 물가 대책으로 여당을 공격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최근 전기세와 기름값, 식료품과 의류 등 생필품 가격이 연이어 급등해 국민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 6월 여론조사에서 현재 물가 상승에 대해 ‘용인할 수 없다’는 응답이 64%로 ‘용인할 수 있다(29%)’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일본 기자클럽 토론회에서도 각 당의 물가 대책이 집중적으로 논의됐다. 

기시다 내각은 지난 4월 말 기름값 보조금 지급이나 전기 요금 포인트 환원, 사료·비료 비용의 억제를 통한 식료품 가격 안정 대책 을 담은 ‘물가 종합긴급대책’을 발표했다. 다만 야당은 정부 정책이 미진하다며 현재 10%인 소비세를 감세하거나 없애라고 요구하고 있다. 제1 야당인 입헌민주당은 현재 경제 상황을 ‘기시다 인플레’라고 부르며 “일본의 제로 금리 정책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