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병 증상은 종합선물세트처럼 다양하게 나타나서 소위 ‘병원 쇼핑’을 하게 한다.
화병 증상은 종합선물세트처럼 다양하게 나타나서 소위 ‘병원 쇼핑’을 하게 한다.

60대 후반 할머니 한 분이 입원하셨다. 허리와 무릎 등 온몸이 아프고 소화도 안 되고, 가슴이 벌렁거리고 답답하다고 하소연하셨다. 자녀들이 엄마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 병원 저 병원 모시고 다녔지만 나아지지 않아서 마지막으로 정신과를 찾았다.

아침 회진 때였다. 할머니 침대 옆에 남편이 계셨다. 내가 할머니에게 컨디션이 어떤지 물었다. 할머니가 대답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남편이 말문을 막고 나섰다. “가만있어! 내가 얘기할게.” 남편은 종이에 적어 놓은 할머니 상태를 조목조목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제 저녁에 밥을 반 공기 먹고, 잠은 한 열 시쯤에 잤는데 별로 깊게 잔 거 같지 않고, 아침에 다섯 시쯤에 일어나… 어쩌고저쩌고….” 할머니는 아무 소리 없이 옆에서 듣고만 계셨다.

이 장면을 보고 할머니 병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말 못 해서 생긴 병, ‘화병’이었다.

환자가 자기 증상을 자기 입으로 말하지 못할 정도니 살아온 삶이 오죽했을까. 화병은 말 그대로 화를 참다가 생긴 병이다. 억울함, 분함, 상실감 등의 부정적 감정이 안에 쌓이고 쌓여서 병이 된 것이다.

화병은 정식 진단명이 아니다. ‘배탈 났다’라는 표현처럼 문화적으로 만들어진 민간 진단이다. 화병 증상은 종합선물세트처럼 다양하게 나타나서 소위 ‘병원 쇼핑’을 하게 한다. ‘소화가 안 된다’ ‘여기저기 아프다’ 하는 신체 증상과 ‘열이 올랐다 내렸다 한다’ ‘심장이 벌렁거린다’ 등의 자율신경 기능 실조와 불안, 우울, 불면 등의 심리적 증상이 동시에 나타난다. 종합병원에 가면 각각의 증상에 따라 해당되는 전문과에서 따로 진료를 받게 되니 내려진 진단명도 여러 개고 먹는 약물도 많다.

정신과에서도 화병에 대해서 여러 개의 진단명을 붙인다. 신체 증상이 심하면 신체증상장애, 불안이 심하면 불안장애, 우울감이 동반된 경우 우울증으로, 때로는 스트레스 장애 등으로 복합진단을 내린다.

화병의 초기 증상이 우울증이나 불안증으로 나타나면 쓸데없이 병원 쇼핑하지 않고 좋으련만 주로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니 진단과 치료가 늦어진다. 화병이 의심돼도 처음부터 정신과 가자고 선뜻 권유하기가 쉽지 않다. “허리랑 무릎이 아프고 소화가 안 되는데 왜 나를 미친 사람 취급하고 정신과 가자는 거냐!”고 항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병원 쇼핑 다 하고 나서야 정신과를 찾게 된다.

화병 치료의 핵심은 막힌 걸 뚫어주는 것이다. 가장 좋은 치료는 쌓인 인생 얘기를 들어주는 거다. 마음속에 쌓인 억울함, 슬픔, 답답함, 한을 풀어내면 신기하게도 그 복잡한 증상이 가라앉는다. 할머니에게도 약간의 우울증약과 함께 한 많은 삶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도와드렸다. 할머니는 한 달 만에 증상이 거의 사라졌다. 통증도, 가슴 벌렁거림도, 소화불량도. 그 복잡한 증상을 어떻게 다 치료했냐고 가족들이 놀랐다. 내 옆에 얘기 잘 들어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화병은 안 생긴다. 잘 들어 주는 그 사람이 내 삶의 주치의다.


▒ 윤우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밝은마음병원 원장, ‘엄마 심리 수업’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