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설을 무서워하는 말더듬이 왕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킹스 스피치’의 한 장면. 사진 IMDB
연설을 무서워하는 말더듬이 왕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킹스 스피치’의 한 장면. 사진 IMDB

직업이 정신과 의사인 필자는 외부 강의를 할 때가 많다. 제법 많이 했지만 지금도 강단에만 서면 무척 긴장된다. 겉으로 티 안 나게 하려고 애쓰지만, 쿵쿵 뛰는 가슴을 다스리기 어렵다. 어느 날 40대 중반의 남성이 발표 불안 때문에 상담하러 왔다. 

“발표 날이 잡히면 그때부터 가슴이 벌렁거리고 손발이 떨리고 잠을 못 잡니다. 발표하기 며칠 전부터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며 불안에 떨고요. 발표할 때는 말을 더듬거리고 포인터를 잡은 손이 떨리고 머리가 하얗게 돼 어떻게 발표했는지도 모르고 내려옵니다. 발표가 무서워요.”

이분은 5급 공무원인데 공개 발표 상황이 상대적으로 적은 지방 한직만 찾아서 돌아다녔다. 부하 직원들이 ‘과장님은 실력도 좋으니 중앙부처로 올라가지 왜 시골에만 계시냐’고 물어보면 자기는 한적한 전원생활이 좋다고 둘러댄다고 한다. 발표 불안증은 사회생활에서 큰 핸디캡이다. 자신의 능력을 잘 포장해서 멋지게 보여야 성공하는 세상인데, 가진 능력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니 손해가 크다.

발표 불안증은 자율신경계가 항진(亢進)돼서 생긴다. 자율신경은 심장 박동, 호르몬 등 생명과 관련된 중요한 기능을 하는데, 죽느냐 사느냐 하는 ‘위기 상황’에서 항진된다. 도망칠 것인가 싸울 것인가 하는 일촉즉발의 순간에, 눈동자가 커지고 심장이 벌렁거리고 온몸의 근육이 긴장되면서 잽싸게 움직일 수 있게 준비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인간은 발표하는 것을 위기 상황으로 인식하는 걸까. 몸의 죽음 못지않게 명예의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해서다. 우리 뇌는 발표 현장을 ‘인정 투쟁’의 전쟁터로 인식하고,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빗발치는 총알처럼 느낀다.  

발표 불안증은 쉽게 좋아지지 않는다. 근본적인 치료는 발표에 대한 심리적 불안감을 없애는 것인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우선 급한 대로 자율신경의 항진을 줄이는 약물을 사용한다. 발표 두 시간 전에 복용하면 긴장감이 많이 줄어든다. 그러나 약은 일시적인 도움을 줄 뿐 근본적인 치료는 아니다. 약 외에 명상이나 이완 요법이 도움 된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한두 번 자율신경계가 항진되면 작은 자극에도 과잉된 긴장 반응이 나타난다. 이런 경우 명상이나 이완 요법으로 꾸준히 훈련하면 자율신경계 자체가 안정되는 효과가 있다.

발표 불안에 대한 대처법에서 중요한 건 ‘떨리는 현상’에 대한 심리적인 수용이다. 떠는 것을 ‘겁쟁이나 소심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인식하지 말아야 한다. 여러 사람 앞에 설 때 긴장하는 것은 당연하고, 긴장이 심해지면 떨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안 떠는 용기가 아니라 떨고 있는 나의 모습까지 보여주겠다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실 최고의 치료법은 스스로 긴장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발표 불안증을 치료하려면 발표를 자주 해야 한다는 역설이다. 도망갈 궁리를 하기보다는 차라리 롤러코스터를 타듯 긴장에 나를 맡겨야 한다. 어쩔 수 없다. 살기 위해서 적진 속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 윤우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밝은마음병원 원장, ‘엄마 심리 수업’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