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외현 전 한겨레 기자·베이징특파원, 전 코인데스크코리아 편집장
김외현
전 한겨레 기자·베이징특파원, 전 코인데스크코리아 편집장

틱톡은 아직 건재하다. 오히려 틱톡을 잡으려던 트럼프가 먼저 떠났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틱톡 이용자 데이터가 중국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막겠다며, 이를 빼앗아 미국 기업에 안겨주려던 참이었다. 이젠 바이든 행정부가 틱톡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가 세계적인 관심거리다. 갓 임기를 시작한 바이든이 틱톡 대응 같은 개별 정책까지 트럼프를 따를지는 의문이다. 틱톡의 창조자이자 중국의 네 번째 부호(자산 규모 16조원 추산)인 장이밍(38) 바이트댄스(중국명 쯔제탸오둥)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는 숨을 고르고 있다. 그러나 끝나지 않은 게임에서 눈을 뗄 수는 없다.

장이밍은 중국 푸젠(福建)성 룽옌 지역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원래 이곳 공무원이었지만 나중에 광둥(廣東)성 둥관에서 전자제품 부품 공장을 창업했다. 둥관은 인접한 광저우, 선전과 더불어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 중국 제조업의 핵심기지로 부상한 ‘세계의 공장’을 형성한다. 장이밍은 어릴 적 아버지가 간호사였던 어머니에게 전하는 외국 기술 도입과 연구개발 관련 이야기를 즐겨 들었다고 한다.

장이밍은 교육열이 높은 것으로 유명한 객가인(客家人·중국 남쪽과 동남아에 정착한 한족과 화교)이다. 중국 최대 식당예약·배달 앱 메이퇀의 창립자인 왕싱, 중국 투자 커뮤니티·플랫폼 쉐추(스노볼)의 창립자 팡싼원, 그리고 장이밍 등 3명을 일컬어 ‘룽옌 인터넷 3검객(劍客)’이라 부르기도 한다. 인터넷 업계에서 명성을 날린 룽옌 출신 젊은이 3명에게 ‘객가’의 ‘객’을 따서 ‘검객’이라고 한 셈이다.

2001년 톈진의 명문 난카이대에 입학한 장이밍은 애초 생물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입시 점수에 밀려 마이크로전자공학을 전공하게 된다. 마이크로전자공학은 트랜지스터, 다이오드, 전도체 같은 아주 작은 전자 설계와 부품을 연구하는 학문인데, 장이밍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실험 준비는 오래 걸리는 반면 실패율이 꽤 높아 ‘통제권’을 갖기 힘들다는 이유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 불확실한 구조인 탓에, 어린 장이밍은 꽤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결국 장이밍은 소프트웨어공학으로 전공을 변경했다. 코딩하고 실행하면 바로 결과가 나오는 프로그래밍 작업은 나름 자신이 통제권을 가질 수 있는, 확실성이 있는 분야였다. 불확실성을 되도록 피하고 확실성을 선택하는 장이밍의 성격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는 “당신의 행동, 당신의 아웃풋은 모두 빨리 변화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컴퓨터는 가장 빠르다”라고 말한다. 졸업 직전 장이밍은 중국 최고의 과학기술 경연대회인 ‘도전배’에 참가해 회로판 자동화 프로그램을 선보였고 2등 상을 수상했다.


장이밍의 고향 중국 푸젠성 융딩현은 객가인의 전통 주거 양식인 투러우로 유명한 곳이다. 여러 형태가 있지만 원형 투러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사진 김외현
장이밍의 고향 중국 푸젠성 융딩현은 객가인의 전통 주거 양식인 투러우로 유명한 곳이다. 여러 형태가 있지만 원형 투러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사진 김외현
틱톡 서비스 운영사 바이트댄스의 창업자 겸 CEO인 장이밍은 푸젠성 객가인 출신이다. 중국 남부와 동남아 화교의 한족을 일컫는 객가인은 언어와 문화 등 정체성이 강한 편이고, 그만큼 단결력이 강하고 교육열이 높아 인구에 비해 각 분야 리더가 많다. 사진은 2017년의 장이밍. 사진 블룸버그
틱톡 서비스 운영사 바이트댄스의 창업자 겸 CEO인 장이밍은 푸젠성 객가인 출신이다. 중국 남부와 동남아 화교의 한족을 일컫는 객가인은 언어와 문화 등 정체성이 강한 편이고, 그만큼 단결력이 강하고 교육열이 높아 인구에 비해 각 분야 리더가 많다. 사진은 2017년의 장이밍. 사진 블룸버그

MS에서 반년 “너무 재미없다”

장이밍은 2005년 대학을 졸업한 뒤 2012년 바이트댄스에 이르기까지 5곳의 기업을 거쳤다. 1곳은 혼자 창업한 곳이었고, 3곳은 창업 단계에서부터 참여했다.

첫 직장은 베이징 북부의 낙후한 지역 창핑구 후이룽관에서 대학 선배가 창업했던 코워킹(협업) 솔루션 업체 IAM이었다. 여러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활동하던 장이밍을 눈여겨본 선배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꽤 수요가 있을 거 같은 상품을 하나 만들려고 하는데, 시장의 기존 유사 상품은 별로이니 내 생각대로 하면 정말 쓸모있는 좋은 상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동업을 제안했다. 그러나 ‘코워킹’ 시장은 제대로 형성돼 있지 않았고 IAM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6년 2월 장이밍은 여행 상품 검색 서비스 쿠쉰의 준비팀에 합류했다. 그는 쿠쉰의 첫 번째 프로그래머였고 통틀어 세 번째 직원이었다. 검색 기술 연구개발을 담당하면서 승승장구해 고위 관리직까지 올랐다. 관리자가 되자 큰 회사의 경영을 배우고 싶어진 장이밍은 2008년 쿠쉰을 떠나 마이크로소프트(MS)에 입사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그의 이력 가운데 유일하게 기존 기업에 입사한 경우다. 하지만 장이밍은 도전적인 일이 없다며 시간의 절반은 독서에 할애했고, 결국 반년 뒤 ‘일이 너무 재미없다’는 이유로 퇴사했다.

이 무렵 장이밍은 ‘룽옌 3검객’ 중 하나인 메이퇀 창업자 왕싱으로부터 잇따라 러브콜을 받던 중이었다. 트위터와 비슷한 형태인 판포우라는 SNS 서비스를 준비 중이던 왕싱은, 장이밍에게 ‘기술 파트너’라는 검색기술 연구개발 직책을 제안했다. 판포우는 중국 SNS로는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2009년 초 30만 명 수준이던 이용자는 6월 100만 명에 이르렀고, HP가 유료 기업회원으로 가입하는 등 수익 모델도 손에 잡힐 듯했다.

하지만 판포우는 예기치 않은 사태로 서비스가 중단됐다. 2009년 7월 중국 신장위구르족자치구 우루무치에서 소요 사태가 일어났고, 당시 시위대는 SNS를 통해 정보를 공유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중국 당국은 판포우를 비롯한 모든 SNS를 하루아침에 차단해버렸다. 서비스를 재개한 것은 폐쇄 1년 반 만인 2010년 11월 말이었다. 그러나 그사이 시나(신랑), 넷이즈, 텐센트 등 다른 중국 포털 서비스도 판포우와 같은 형식의 마이크로블로그 서비스를 내놓은 상태였다. 특히 그중에서도 신랑 웨이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성공을 거뒀고, 판포우는 앉은 자리에서 주도적 사업 지위를 잃었다.

장이밍은 판포우가 서비스를 재개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던 2009년 9월 판포우와는 결별하고, 부동산 검색 서비스 주주팡을 창업해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CEO를 맡는다. 주주팡은 당시 한창 맹아(萌芽)를 틔우고 있던 모바일 기반 서비스로, 글로벌 VC 서스크한나의 왕충 매니징디렉터가 제안한 사업이었다. 왕충은 장이밍이 한때 다녔던 쿠쉰을 발굴한 투자자로, 이 무렵 쿠쉰은 이미 쇠락한 상태였음에도 부동산 검색은 명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부동산 검색 서비스의 개발자는 바로 장이밍이었다. 왕충과 장이밍의 결정은 주효했고, 주주팡은 이용자가 150만 명에 이르는 등 부동산 관련 앱 1위를 차지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