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외현 플랫폼9¾ 이사 전 한겨레 기자·베이징특파원, 전 코인데스크코리아 편집장
김외현
플랫폼9¾ 이사 전 한겨레 기자·베이징특파원, 전 코인데스크코리아 편집장

소프트뱅크는 손정의 회장과 사실상 동일시되는 회사다. 1981년 소프트웨어 유통업에서 출발해 출판·전시 분야로 넓힌 뒤, 인터넷 포털 서비스와 초고속인터넷, 이동통신 등으로 확장했고, 지금은 벤처 투자에 나서 여러 나라의 로봇·공유경제·전자상거래 등 다양한 사업에 세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지난해 3월 투자 기업들의 주가가 급락하면서 소프트뱅크는 일본 기업 사상 분기 최대 적자를 기록했고 손정의 시대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소프트뱅크 주가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손정의는 투자 업계 ‘미다스 손’으로서의 ‘건재함’을 과시한다. 특히 소프트뱅크가 최대 주주인 쿠팡의 막대한 상장 수익과 야후재팬과 네이버 라인의 합병 등 최근 한국 경제의 혁신에도 그의 발자국이 선명하다.

풍부한 상상력과 과감한 결단력 그리고 누구나 부러워하는 감동적인 표현력을 두루 갖춘 손정의가 60세 은퇴 계획을 번복하고 ‘집권’을 연장한 지 5년이 지났다. 10개의 장면으로 엮어본 그의 인생은 한 편의 무협소설을 읽는 느낌이다.


1│돼지 냄새 마을 손정의는 1957년 일본 규슈 사가현에서 재일 한국인 3세로 태어났다. 18세에 대구에서 돈을 벌기 위해 밀항한 할아버지와 14세에 일본으로 건너온 할머니가 일군 가정이었다. 국철 소유의 토지를 무단으로 점거한 번지도 없는 마을이었고, 가축으로 키우는 돼지 냄새가 코를 찌르는 판자촌이었다. 할머니가 그를 리어카에 싣고 돌아다닌 추억은 소중하지만,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 탓에 손정의는 할머니가 싫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야스모토’라는 일본 성(姓) 뒤에 자신의 정체성을 감췄다.

손정의가 주저 없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꼽는 아버지 손삼헌은 젊어서부터 사업 수완을 보였다. 밀주업으로 돈을 벌어 빠친코를 열었고 사채업도 운영했다. 실내낚시터를 할 때는 빨간 잉어를 낚으면 1만엔을 준다는 아이디어로 흥행에 성공했다. 그 덕에 가정은 가난에서 벗어났다.

손삼헌은 아들들을 야단친 적이 없었고, 반대로 진심 어린 칭찬을 무서울 정도로 쏟아냈다. 또 눈앞의 돈만 벌려고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고, 다른 사람에게 배우려고만 하지 말고 스스로 생각하라고 가르쳤다.


손정의(왼쪽)는 오라클 창업자 래리 앨리슨의 소개로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를 만났고 이후 소중한 벗이 되었다. 잡스는 애플에서 쫓겨나 와신상담하던 시절 손정의의 ‘은인’ 사사키 다다시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은 인연도 있었다. 이 인연은 훗날 소프트뱅크가 일본에서 아이폰을 독점 공급하는 계기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사진 블룸버그
손정의(왼쪽)는 오라클 창업자 래리 앨리슨의 소개로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를 만났고 이후 소중한 벗이 되었다. 잡스는 애플에서 쫓겨나 와신상담하던 시절 손정의의 ‘은인’ 사사키 다다시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은 인연도 있었다. 이 인연은 훗날 소프트뱅크가 일본에서 아이폰을 독점 공급하는 계기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사진 블룸버그

2│전설의 유학생 손정의는 고 1 때 한 달 동안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온 뒤 유학을 결심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십이지장 파열로 쓰러져 입원한 상황이어서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손정의는 “의사 선생님께 여쭤보니 아버지는 안 죽는대요. 앞으로 몇 년간의 일과 집안을 생각한다면 있어야겠지만, 몇십 년간의 일을 생각하면 가족과 저 자신을 위해 인생을 바칠 일을 찾아야 해요”라고 고집했다. 퇴로를 끊기 위해 학교에 직접 자퇴서를 냈다. 결국 가족이 한발 물러나 유학이 결정되고, 손정의는 할머니에게 부탁해 2주가량 ‘그토록 싫어했던 조상의 나라, 고향 땅’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한다. 여전히 친척들이 사는 곳이었다.

손정의는 미국으로 건너가 반년 동안 어학연수를 한 뒤 10학년에 들어갔다. 무리하게 추진한 유학에 마음이 급했던 그는, 일주일간 10학년 교과서를 무작정 다 읽은 뒤 교장을 찾아가 11학년 월반을 요청했다. 의외로 허락을 받았다. 사흘 동안 11학년 교과서를 읽은 뒤 다시 월반을 요청했다. 다시 허락받고는 졸업 시험을 치르겠다고 했다. 시험장에선 감독관에게 영어가 서투니 사전을 사용할 권리와 사전 찾을 별도의 시간을 요구해 받아냈다. 결국 3주 만에 고교 과정을 마쳤고, 대입시험(SAT) 없이 입학할 수 있는 2년제 대학을 거쳐 UC 버클리 경제학과로 편입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이 2019년 2월 열린 전년도 결산 설명회에서 여러 방정식을 화면에 띄워놓고 설명하고 있다. 손정의는 ‘25-4=9?’라는 수식을 화면에 띄웠다. 소프트뱅크 보유 주식 가치(25조엔)에서 그룹 부채 및 이자(4조엔)를 빼면 21조엔인데, 소프트뱅크의 시가총액(9조엔)과는 큰 괴리가 있어 자사주 매입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사진 블룸버그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이 2019년 2월 열린 전년도 결산 설명회에서 여러 방정식을 화면에 띄워놓고 설명하고 있다. 손정의는 ‘25-4=9?’라는 수식을 화면에 띄웠다. 소프트뱅크 보유 주식 가치(25조엔)에서 그룹 부채 및 이자(4조엔)를 빼면 21조엔인데, 소프트뱅크의 시가총액(9조엔)과는 큰 괴리가 있어 자사주 매입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사진 블룸버그

3│발명가에서 사업가로 손정의는 “대학 때 나보다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을 아끼려고 식사할 때도 오른손에 책, 왼손에 포크를 쥐었다”고 말한다. 여유롭지 않은 유학생 시절 그는 ‘하루 5분은 발명에 머리를 쓴다’면서 하루에 하나씩 발명 아이디어를 냈다. 이 과정에서 ‘전자 번역기’를 고안했고, 물리학 교수에게 ‘성공 보수’를 약속하고 도움을 받아 시제품을 완성했다. 그리고 일본 전자제품 강국 시대의 주역인 샤프의 사사키 다다시로부터 계약을 따냈다. 사사키는 훗날 소프트뱅크의 첫 대형 계약을 돕는 등 손정의의 ‘은인’이 됐다.

손정의는 전자 번역기 수익 1억엔(약 10억원)을 종잣돈 삼아 미국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일본에서 유행한 중고 게임기를 수입해 샌프란시스코 카페 등에 설치해 학비와 생활비 외에도 졸업 뒤 사업 밑천이 될 만큼의 큰돈을 벌었다.

유수의 명문대 대학원으로부터 장학금 제안이 있었지만, 손정의는 대학을 마치면 돌아오겠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켜 일본으로 귀국했다. 이때가 23세였다.


4│소프트뱅크의 시작 1981년 소프트뱅크를 창업한 손정의는 직원 2명을 앞에 놓고 귤 상자에 올라 “우리 회사는 세계 디지털 혁명을 이끌 것”이라며 한 시간 동안 연설을 했다. “30년 후 우리는 두부 가게처럼 매출을 1조, 2조 단위로 셀 것이다!” 일본어에선 두부를 세는 단위와 숫자 단위 조(兆)의 발음(초)이 같다. 2명의 직원은 질린 듯이 도망가버렸다. 그때 그 귤 상자는 지금 소프트뱅크 대회의실에 놓여 있고, 25년 뒤인 2006년 소프트뱅크 매출은 실제로 1조엔(약 10조원)을 돌파했다.

소프트뱅크는 그 이름에서 보듯 소프트웨어 유통업으로 출발했다. PC 대중화 시대가 올 것이므로 소프트웨어는 필요할 것이었고, 직접 개발하기보다는 유통하는 것이 시장을 장악하기에 유리하다는 손정의의 판단이었다. 사업 데뷔는 기습 작전으로 이뤄졌다. 창업 자금 1000만엔(약 1억원) 가운데 800만엔(약 8000만원)을 털어 대규모 전시회에 부스를 열었다. 소프트뱅크는 파산할 지경이었지만 삽시간에 업계 인지도를 얻었고, 그 덕에 종합 전자제품 판매상인 조신전기와 소프트웨어 독점 공급 계약을 맺었다. 또 최대 소프트웨어 기업이던 허드슨과 독점 판매 계약을 했다. 처음엔 허드슨 쪽이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지만, 손정의는 “나는 천재입니다”라며 자신의 인생사와 목표를 들려줬고 허드슨은 결국 그에게 매료됐다. 제조업과 판매업의 양대 거물과 독점 계약을 한 소프트뱅크는 일약 중견기업으로 날아올랐다.

다른 한편에서는 출판업을 시작했다. 경쟁사 소유 잡지에서 소프트뱅크 광고를 받아주지 않자 추진한 사업으로, 독자 수요 파악 등을 통해 여러 잡지를 간행하며 성공 궤도에 올랐다.

매일 아침 8시 조회부터 자정 넘어까지 일하던 1983년 어느 날 손정의는 만성간염 진단을 받았다. 5년 뒤 간경변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사실상 시한부 선고였다. 25세의 손정의는 입원해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