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쿡이 5월 21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연방법원에서 열린 반독점법 재판에 출석하며 손가락으로 V 자를 그리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팀 쿡이 5월 21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연방법원에서 열린 반독점법 재판에 출석하며 손가락으로 V 자를 그리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김외현 플랫폼9¾ 이사 전 한겨레 기자·베이징특파원, 전 코인데스크코리아 편집장
김외현 플랫폼9¾ 이사
전 한겨레 기자·베이징특파원, 전 코인데스크코리아 편집장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5월 21일(이하 현지시각)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법정에 섰다. 게임 개발사인 에픽게임스가 애플을 상대로 낸 반독점법 위반 소송 때문이다. 에픽게임스는 애플이 30%의 수수료를 받는 앱 스토어의 결제 시스템이 불공정한 독점이며, 애플의 모바일 운영체계인 iOS 자체도 폐쇄형이어서 독점이라고 주장했다. 아이폰과 아이패드에서 앱을 설치하려면 앱 스토어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팀 쿡은 이날 재판에서 이용자 정보 보호와 안전을 위해 앱 스토어 출시 전에 애플이 모든 앱을 점검하는 현재 시스템 구조는 불가피하다고 반박했다. “기술은 사람들로부터 어떤 데이터건 빨아들일 수 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려는 것뿐이다.” 그러면서 수수료 수익은 이용자 정보 보호 등 기술의 연구·개발과 유지에 쓰인다고 그는 덧붙였다.

쿡은 이날 증언을 위해 상당한 준비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 출석에 앞서 나온 언론 보도를 보면, 그는 검찰 출신 ‘전관’들과 몇 시간씩 모의재판을 연습했다고 한다. 앱 스토어 수수료는 애플의 주요 수입원 가운데 하나인 만큼, 업계는 쿡의 증언이 애플의 플랫폼 사업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결국 이것은 오는 8월 CEO 취임 10주년을 맞이하는 팀 쿡의 애플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장면이 됐다.


팀 쿡 애플 CEO는 좀처럼 사생활을 공개하지 않는다. 그랬기에 2014년 그의 ‘커밍아웃’은 매우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팀 쿡 애플 CEO는 좀처럼 사생활을 공개하지 않는다. 그랬기에 2014년 그의 ‘커밍아웃’은 매우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앨라배마의 수재, 잡스와의 만남으로 인생 전환

팀 쿡은 1960년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 모빌에서 태어났다. 조선소 노동자 아버지와 약국 직원 어머니 사이에서 난 세 아들 가운데 둘째다. 팔다리가 길어서 눈에 띄었던 쿡은 학교에선 학구적이고 성실하고 꼼꼼한 아이로 선생님과 학생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 고등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앨라배마 양대 대학 중 하나인 오번대학에 진학한 쿡은 산업공학을 전공했다.

남부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나온 자신의 출신과 관련해, 쿡은 2013년 한 연설에서 “1960년대 앨라배마에서 자라면서 나는 충격적인 차별을 접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사람이 기회를 박탈당하고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내가 사는 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크로스버닝’을 본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크로스버닝은 백인우월주의 집단 KKK가 흑인들을 위협하기 위해 십자가를 태우는 의식이다.

대학을 졸업한 쿡은 IBM의 개인 PC 사업부에서 12년 동안 근무했다. 듀크대 경영전문대학원(MBA)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것도 이 시기였다. IBM에서 쿡의 최종 직책은 북미 유통 담당 임원이었다. 쿡은 이후 인텔리전트 일렉트로닉스의 리셀러 부문 최고운영책임자(COO)로 3년 동안 일했고, 컴팩의 부사장으로 6개월가량 일했다. 그는 공급망 관리 분야에서 자질이 돋보였다.

그러던 중 1998년 초 어느 날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의 권유로 애플에 입사하게 됐다. 쿡은 이미 애플의 영입 제안을 거절한 상태였지만, 잡스를 직접 만난 뒤 마음을 바꿨다. 많은 이를 의아스럽게 했던 과감한 결정이었다.

“비용과 이익을 순전히 이성적으로 따진다면 컴팩에 있는 것이 유리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컴팩에 머물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직관에 귀 기울였다. 잡스를 처음 만난 지 5분 만에, 나는 조심성과 논리 따위는 내버리고 애플에 오기로 했다. 나의 직관은 애플에 들어오는 것이 이 창조적인 천재를 위해 일하면서 위대한 미국의 기업을 재건하는 경영진에 속하는 평생에 한 번뿐인 기회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쿡이 말한 대로 이 시기는 애플이 ‘재건’을 도모하던 때였다. 1976년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의 창업 이후, 애플은 애플1, 애플2, 매킨토시 등으로 1980년대 중반까지 하드웨어의 신화를 이어갔다. 그러나 쿡이 일했던 IBM이 두각을 보이면서 애플은 위기를 맞이했고, 1985년 잡스는 쫓겨나기까지 했다. 애플은 이후에도 좀처럼 실적을 회복하지 못했고, 1995년 등장한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95에 밀려 실적은 더욱 나빠졌다. 침체일로의 회사를 구하기 위해 애플은 1997년 잡스를 복귀시켰고, 바로 그 이듬해 쿡이 입사했다.


폭스콘 통한 위탁생산 모델 정립

잡스는 제품 라인업을 재정비하고 대규모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쿡은 해외 사업 담당 수석부사장을 맡아 해외 공장 및 창고를 정리하고 위탁생산 체제로 전환했다. 세계 최초로 아웃소싱을 본격화한 공급망 관리 모델로, 잡스의 복귀작이었던 아이맥은 LG전자와 폭스콘의 손을 빌려 만들어졌다. 특히 폭스콘은 애플2 조립을 위탁받은 적이 있었지만, 아이맥에서 아이폰, 아이패드로 이어지는 팀 쿡 시대 애플과의 공조를 통해 글로벌 혁신을 주도하는 모델을 정립했다. 쿡은 ‘재고는 악’이라며 애플(사과)은 신선할 때 팔아야 하는 유제품 같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30일 치 이상이던 재고량을 6일 치로 줄였다.

2004년 쿡은 매킨토시 하드웨어 부문 총괄로 승진했고, 잡스가 췌장암으로 자리를 비우면서 임시 CEO를 맡은 뒤, 2005년 애플 COO로 다시 승진했다. 잡스는 이런 과정을 통해 쿡을 후계자로 키웠다. 애플의 성공적인 재건은 잡스의 통찰과 아이맥,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로 이어지는 혁신적 상품으로 상징되지만, 막후에서 쿡이 이끌었던 효율적 공급망과 운영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을 잡스도 인정했던 셈이다. 쿡은 2005년 이후 장기계약 등의 방식으로 플래시메모리 등 주요 부품의 안정된 공급을 확보하는 등 비용 절감과 수익 창출의 선순환을 만들었다.

잡스가 2009년 다시 투병하게 되면서 쿡은 다시 임시 CEO가 됐고, 2011년 8월 쿡이 CEO로 정식 취임한 지 한 달여 만에 잡스는 세상을 떠났다. CEO가 된 쿡은 매일 오전 4시 30분에 이메일을 보내 업무 지시를 했고, 매주 일요일 저녁에 전화를 걸어 다음 주 업무 준비 지시를 했다.

쿡이 CEO가 되고서 애플은 굵직굵직한 변화를 겪었다. 애플은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이 됐고, 주가는 9배 상승했다. 아이폰은 크기가 다양해졌다. 잡스 시절 애플은 세금을 회피하고, 기부액은 없다시피 하며, 노동 착취 논란과 살벌한 내부 경쟁으로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팀 쿡의 애플은 달라졌다. 재생에너지와 사회 소수자 교육 등에 투자하고 각종 기부를 늘려왔다. 팀 쿡 자신도 해마다 8월이면 500만달러(약 57억원)어치의 주식을 기부하며, 죽기 전까지 자신의 자산을 모두 기부할 거라고 발표했다.

그는 다양성, 기후변화, 인권 등에 대해 본인의 의견을 적극 밝혔고, 2014년엔 “애플 CEO가 게이라는 사실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프라이버시를 희생하겠다”며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스스로 밝혔다. 애플의 성공적 재건에 쿡의 공로가 적지 않다는 것은, 지난 10년간의 성과가 잘 설명해준다. 사회 공헌을 유독 강조하는 쿡 CEO가 반독점법 논란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지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