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결정이란 부서장이 회의 참석자의 발언을 다 들은 뒤 “잘 들었는데, 나는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라며 내리는 것이 아니다. 회의는 직급과 무관하게 최적의 아이디어가 선택되는 토론 과정이어야 한다.
의사 결정이란 부서장이 회의 참석자의 발언을 다 들은 뒤 “잘 들었는데, 나는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라며 내리는 것이 아니다. 회의는 직급과 무관하게 최적의 아이디어가 선택되는 토론 과정이어야 한다.

카투사 시절에 한탄강 둔치로 중대 단위 훈련을 나간 적이 있다. 부지런히 철조망을 치고 텐트를 세우고 나니 어느새 밥때가 됐다. 미군은 항상 계급의 역순으로 배식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분대장 차례쯤 되면 칠면조나 콩 요리 같이 인기 없는 것만 남는다. 내 바로 뒤에 따라오던 한국군 지원반장이 빈 스테인리스 통을 보며 한탄 조로 말했다. “야, 이 병장,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야. 한국군 같았으면 이 병장 짬만 되어도 애들이 제일 먼저 밥 타 갖고 올 텐데….” 대충 내 아버지뻘이던 지원반장은 장군일지라도 식판 들고 배식 줄에 서는 미군 부대를 잘 모르고 지원하신 것 같았다. 그분이 알던 군대는 계급이 높을수록 대우가 좋아지는 신분 사회였으나 미군은 내가 복무하던 1980년대 중반에 이미 리더십의 요체란 부하들의 존경을 얻는 데 있음을 실천으로 보여주는 조직이었다. 

스타트업에서 업무적으로 상하 관계인 사람, 흔히 상사 또는 부하직원이라 지칭되는 동료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할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깊게 고민하는 이는 많지 않다. 나이와 직급이라는 나름의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본인이 경험했던 학교 선후배, 군대 기수, 또는 가족 관계를 적절히 섞어 응용한다. 이런 민간요법 같은 처방은 여러 문제를 낳는데, 특히 상대방이 그런 관계에 동의할 생각이 없다면 퇴사까지 부르는 시한폭탄이 된다. 반말하는 상사, 친해지고 싶지 않은데 친한 척하는 상사, 팀장이 자기를 챙겨주지 않아 섭섭한 부하직원 등은 상대방에 대한 역할기대에서 오류가 났음을 보여준다. 이런 문제는 관리자 직급에 지위라는 허깨비를 부여하는 회사에서 종종 발생한다.

회사는 복종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군대와 달리, 부서장이라 할지라도 그 개인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할 까닭이 없다. 부서장의 권위라는 것은 신분 사회와 제조업 시대의 구습이다. 스타트업의 부서장은 명령을 내리는 위치가 아니라 부서원을 돕는 자리다. 부서에 할당된 업무는 부서원들의 공동 책임이며 부서장은 부서 전체 과업의 조정자다. 의사 결정이란 부서장이 회의 참석자의 발언을 다 들은 뒤 “잘 들었는데, 나는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며 내리는 것이 아니다. 회의는 직급과 무관하게 최적의 아이디어가 선택되는 토론 과정이어야 한다. 스티브 잡스는 “최고의 인재를 뽑아놓아도 의사 결정이 계급 위주로 이뤄지면 똑똑한 이부터 퇴사한다”고 지적했다.

부서장에게 권위가 부여된 배경에는 각자에게 부여된 역할마다 그에 따르는 권리나 의무, 규범, 기대 등이 정해 있어서 사람들이 그런 행동 양식을 따른다는 역할이론이 있다. 역할이란 원래 연극에서 쓰이는 용어다. 마치 연극에서 배역을 수행하듯 사람들은 사회가 제안한 각본을 따른다. 그런데 그 각본이 너무 옛날 것이라 업(業)의 개념이 바뀐 스타트업에 갖고 오면 잘 안 맞는다. 각본이 잘 안 맞으면 바로 고쳐야 하는데 역할이론은 사회적 규범에 복종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변화를 바로 반영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아직도 하위 직급자는 윗사람의 지시를 수행하는 역할이기에 생각이 많거나 지시에 반발해서는 곤란하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생각이 없고 의심하는 마음이 안 든다면 창의성이 자랄 여지가 없다. 그러면 스타트업의 핵심 성향인 주도적인 업무를 수행할 수 없다.

역할이론은 인간의 선택의지도 무시한다. 그래서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수행 수준이 급추락하거나 의욕 상실로 퇴사해버리는 개성 강한 젊은 세대와 안 맞는다. 더구나 스타트업에는 한 가지 역할만 맡는 이들이 드물다. 부서장이라고 결재만 하는 게 아니라 실무자로 기획도 하고 영업도 다닌다. 다중 역할을 수행하다 보면 종종 역할 충돌의 혼란을 겪는다.


개인 능력 극대화해야 사는 스타트업

계급장을 벗어버린 권위적이지 않은 부서장의 리더십은 어떤 모습일까? 그는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는 최선의 방법을 늘 고민하고 공유하는 사람이다. 조직의 역량은 구성원 개개인의 역량 합계와 내외부 자원과의 협력에서 오는 시너지의 합이다. 개개인이 최대한 역량을 발휘하려면 일하는 재미와 결과가 주는 보람을 느껴야 한다. 협력의 시너지는 벡터 합이 최대치가 되도록 동일 목표를 지향한다. 주도적으로 일하고 쉴 때는 전혀 긴장하지 않도록 재미있게 풀어주는 것이 스타트업 조직문화의 요체다. 직원의 마음을 얻는 리더는 다음 세 가지 태도를 지닌다.

첫 번째, 상대주의적 관점의 유지다. 나는 나의 입장이 있고 직원은 직원의 입장이 있다. 나의 입장을 강요하거나 지시한다고 일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특정 직원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면 당신은 그의 입장에 서보지 않은 것이다. 직속 부서원과 상사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봐야 한다. 창업자는 자신의 회사가 몇백억원 가치의 자랑스러운 존재이겠지만, 직원에게는 신용대출도 못 받고 소개팅도 안 들어오는 ‘듣보잡(듣지도 보지도 못한 잡것)’ 회사로 느껴질 수 있다.

두 번째로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독립적인 사건이 아니라 맥락으로 이어져 있음을 이해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과거가 오늘을 만들었고 오늘이 미래를 만든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 그러면 퇴사하는 동료는 배신자가 아니고, 장래에 다시 도움을 주고받을 동지가 된다. 맥락을 보는 시각이 생기면 예측이 가능하기에 특정 사건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근태가 별로 안 좋고 상사의 농담에 웃어주지 않는 직원이 있다면 퇴사가 임박했음을 예상할 수 있으니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

세 번째는 불확실성을 포용하는 태도다. 스타트업에서 판단에 필요한 모든 정보가 갖춰진 상태란 타이밍이 매우 늦은 것이다. 창업자는 항상 부족한 정보에 기반해 판단할 수밖에 없다. 불확실성이 주는 두려움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동료와의 공유다. 책임을 나누라는 것이 아니라 고민을 나누며, 뜻을 모은 다음에는 결과를 다 같이 감수하기로 다짐하고 실행에 옮긴다. 이 작업의 반복 수행이 사업이다. 불확실성은 누구에게나 스트레스로 작용하지만, 실제로 불확실성이 가져오는 부정적 영향은 불안감 외에는 별로 없다. 따라서 불확실성을 줄일 요량으로 자료 더 찾아오라며 귀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동료와 함께 견디면서 맷집을 키우자.

재벌의 핵심 역량이 정부로부터 사업 면허를 받는 능력에 있다면 스타트업의 핵심 역량은 직원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보여주는 자발적인 파이팅에 있다. 핵심 역량이 다르기에 대기업과 스타트업은 소중하게 여겨야 할 대상도 다르다. 스타트업이 인사 시스템을 설계할 때는 남들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고 베낄 이유도 없고 창업자의 대기업 근무 경험에 기대서도 안 된다. 스타트업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진짜 인재는 자기가 할 일을 상사에게 하청받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일할 준비가 끝났으니 당신만 바뀌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