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정책이 유니콘의 환상에 젖어 있다.
정부 정책이 유니콘의 환상에 젖어 있다.

정권이 바뀌면 지난 정권의 정책은 조용히 묻어버리는 게 세상 인심이지만, 정부 지원을 통한 창업 생태계 활성화 의지는 이번 정부에서도 여전하다. 굳이 달라진 점이 있다면 ‘창조경제’ 명패 대신 ‘혁신성장’이 등장하는 정도의 사소한 변화다. ‘제2의 벤처 붐’을 주도한다는 중기벤처부 장관은 5월 말,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한 강연에서 “12조원짜리 펀드를 만들어 유니콘 기업을 더 키우겠다”고 말했다. 2022년이 되면 유니콘 수가 20개를 넘기리라는 예상도 얹었다.

서울시는 서울시대로 2조원을 투입, 2022년까지 유니콘 여덟 개를 더 만들겠단다. 중앙정부와 서울시가 유니콘을 각자 키우는 게 가능할지 고개가 갸우뚱해지지만, 더 석연찮은 것은 세금으로 유니콘을 키워 정책 성과로 삼겠다는 발상이다.

상상의 동물 유니콘을 성공한 스타트업에 처음 쓴 사람은 카우보이 벤처라는 벤처캐피털(VC)의 창업자 ‘아일린 리’이다. 신생 기업의 가치가 1조원를 넘기는 경우는 드물다는 의미로 유니콘이 차용되던 2013년, 전 세계의 유니콘은 불과 39개였다. 유니콘의 생애를 보면, 주로 수천억원대의 대규모 투자를 받은 시점에 유니콘으로 태어났다가 주식시장에 상장되면서 유니콘으로서의 삶을 마감한다. 우리나라도 넷마블의 전신인 CJ게임즈가 한때 유니콘이었다가 2017년 코스피에 상장되면서, 당시 세 개였던 한국의 유니콘 수가 두 개로 줄었던 적이 있다.

기업은 수익을 내지 못하면 망한다. 유니콘이 되는 스타트업들은 이 평범한 상식을 버리고 시장점유율 증가에 모든 자원을 쏟아붓는다. 경영 적자는 VC의 투자금으로 메운다. 어떤 스타트업이 조원 단위 가치로 평가받으려면 남의 돈이 수천억원 투자돼야 한다. 그런데 밑천이 세금이라 매사에 조심스러운 국내 VC들은 몇 백억원 투자도 버겁다. 결국 유니콘이 되기 위해서는 해외 자본이 들어와야 하고, 현재 국내산 유니콘 여덟 회사의 주요 투자자는 해외 자본이다. 해외 자본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시대마다 다르다. 산업 성장기의 외자 유치는 선한 것이었으나, IMF 경제위기 때의 론스타는 먹튀 이미지로 남았다. 해석이야 어찌 됐든 국내에서 유니콘이 하나 만들어질 때마다 수천억 내지는 조원 단위의 이익을 보는 해외 자본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제 300개를 상회하는 전 세계 유니콘의 반은 미국에 그리고 4분의 1은 중국에 있다. 이 두 나라는 거대한 시장과 자본이 있으니 유니콘의 대량 배출이 당연해 보인다. 다음으로 인도와 영국이 각각 열 몇 개씩을 보유하면서 3위권을 구성한다. 경제 강국인 일본은 유니콘이 있다가 없다가 하고 독일은 채 열 개가 안 된다. 독일과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을 합치면 영국과 인도의 합보다 60% 이상 큼에도 불구하고 유니콘 숫자만은 인도와 영국의 3분의 1밖에 안 된다. 그 까닭은 규제 방식의 차이다. 스타트업들이 사업을 펼칠 수 있는 유효시장(Service Available Market)의 크기는 실제 시장 규모에다 해당 국가의 규제를 반영해 가늠한다.

따라서 금지 목록에만 들어있지 않다면 뭐든지 시도해볼 수 있는 네거티브 규제 국가들이, 허용된 것만 정해놓은 포지티브 규제 국가들보다 유효시장이 크다. 경제 규모와 유니콘 수의 불일치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영국과 인도는 네거티브 규제 국가이고, 독일과 일본은 우리와 같은 포지티브 규제 시스템이다.


유니콘이 홈런이라면, 대기업 협력 모델은 안타

특정 산업에서 제일 잘나가는 스타트업을 골라 돈을 부어 넣고 이들이 상장하면 비율대로 나눠 갖는 유니콘 모델은 국부 유출 외에도 생각할 점을 여럿 지니고 있다. 우선 유효시장이 크고 자체 자본으로 충분히 돌아가는 미국과 중국에 최적화돼 있다. 우리나라처럼 유효시장이 작은 포지티브 규제 국가가 거대 유효시장에 최적화된 유니콘 모델을 무리하게 정책 지표로 삼으면 시장이 왜곡된다. 유효시장을 키우기 위해 규제를 없애주는 정부도 아니지 않은가.

정부가 할 줄 아는 것은 자금 투입밖에 없다. 이미 스타트업 업계에는 과잉 공급된 자금으로 인해 경쟁력 없는 스타트업들이 망하지 않고 ‘좀비’로 연명하는 현상이 흔하다. 잘하는 스타트업이라 할지라도 외부 유동성에 의해 부풀려진 기업 가치는 인수·합병(M&A)과 후속 투자를 방해한다. 돈이란 중립적 가치를 지닌다지만, 시장의 선택을 방해할 정도로 넘치는 유동성은 부정적 효과가 더 크다.

스타트업 말이 나오면 다들 실리콘밸리만 쳐다보는데, 한 번쯤 주목할 만한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의 스타트업 정책에는 배울 점이 크게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아베 총리가 직접 ‘암반 규제’ 철폐 회의를 주재하며 실질적인 변화를 주도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스타트업의 성장으로 인한 혜택을 산업계 전체가 함께 누린다는 점이다.

집계 방식이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2015년까지는 일본 스타트업에 투자된 총액이 한국보다 적었다. 2016년 양국은 2조1000억원대에서 만났고 이후에는 일본이 여러 면에서 앞섰다. 우선 투자 총액에서 한국이 추경까지 반영해가며 3조4000억원을 기록한 2018년, 일본은 4조5000억원으로 앞서나갔다. 질적인 면에서는 비교할 수 없이 일본이 우위에 있다. 우리나라의 스타트업 투자금은 대부분 VC의 펀드이며, 구성을 보면 세금과 연기금 같은 공적 영역의 자금이 주류다. 반면 일본은 민간인 기업의 투자액이 49%를 차지하며, VC의 투자액이 10%, 정부와 대학 쪽 자금은 합쳐서 5%에 그친다(일본 entrepedia의 ‘Japan Startup Finance 2018’ 자료 참조).

일본 대기업들은 ‘오픈 이노베이션’에도 매우 적극적이다. 기업이 경계를 허물어 외부 자원을 받아들이는 오픈 이노베이션은 구글이나 애플 같은 미국 IT 기업들이 워낙 잘하는 영역이지만, 일본 기업들도 빠르게 도입했다. 지난해 일본 대기업들이 스타트업에 10억엔 이상 투자한 경우가 34건에 달했다. 같은 기간 한국 대기업들의 100억원 이상 투자는 9건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에서 지난 4년간 스타트업 투자를 위해 투자 전문 계열사 CVC(Corporate VC)를 세운 기업은 55개 회사에 달한다. 반면 오픈 이노베이션 역할을 하는 국내 CVC는 열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재벌의 고루한 지배구조와 정부의 금산분리 정책 힘겨루기가 빚어낸 결과다.

우리 스타트업 정책도 대기업과 스타트업이 협업하는 오픈 이노베이션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스타트업의 장점으로 꼽히는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빠른 실행력을 대기업이 활용한다면 한 차원 높은 시너지가 날 것이다. 유니콘이 화려한 솔로 홈런 같은 것이라면, 오픈 이노베이션은 차곡차곡 점수를 내는 적시 안타와 밀어내기다. 정부도 유니콘은 그만 세고, 어떻게 하면 대기업들이 투자나 M&A를 적극적으로 하는 환경이 만들어질지 고민하기 바란다. 그렇다고 대기업이 스타트업 몇 개씩 사주는 할당제 같은 카드는 꺼내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