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중반에 벌어진 독·소 전쟁은 인류사 최대의 비극이다. 전선의 군인뿐 아니라 이데올로기 때문에 많은 민간인이 비참하게 죽어갔다. 사진 위키피디아
20세기 중반에 벌어진 독·소 전쟁은 인류사 최대의 비극이다. 전선의 군인뿐 아니라 이데올로기 때문에 많은 민간인이 비참하게 죽어갔다. 사진 위키피디아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명분이 어떠하든 전쟁이 벌어지면 필연적으로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물산이 파괴된다. 그 때문에 전쟁은 결코 좋은 행위가 아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반복돼왔다. 수많은 전쟁 중에서도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벌어진 독·소 전쟁은 가장 거대하고 참혹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한 부분으로 취급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지옥이었다.

최대 2000㎞에 이르는 전선에서 양측 합쳐 항상 1000만 명의 병력이 투입돼 쉬지 않고 싸웠다. 최소 추정만으로 3000만 명이 죽었는데 그중 2000만 명이 소련인이었다. 더불어 물적 손실도 어마어마했다. 13세기 몽골의 정복 전쟁처럼 인류사에 이보다 피해가 컸던 사례는 있으나 불과 4년 만에 이런 참혹한 결과가 나온 경우는 없었다.

소련이 엄청난 피해를 감내하고 전쟁 내내 독일군의 8할을 붙잡아 놓은 덕분에 서유럽은 쉽게 해방됐다. 그래서 종전 후 소련이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며 동유럽 일부를 병합하고 많은 나라를 위성국화할 때 연합국은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역설적으로 이런 참화를 극복하고 소련은 초강대국이 되었고 미국과 더불어 20세기 후반을 선도했다.

소련이 이겼으면서도 더 많이 피해를 본 이유는 부지기수다. 최초 반년 동안 무려 500만의 병력을 상실했을 만큼 전쟁 초반에 너무 심각하게 당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다. 일단 소련이 무방비 상태에서 얻어터졌다는 표현이 나올 만큼 독일의 기습은 대성공이었다. 최초 3개월 동안 잃은 영토를 소련이 되찾는 데 3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것으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

그런데 독일과 동맹국에서 동원한 병력이 총 350여만 명이고 엄청난 장비도 준비되다 보니 전쟁 직전까지 보안을 완벽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시 말해 소련도 전쟁 징후를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분명히 위기라는 경고가 여러 곳에서 울렸는데도 독일군의 기습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어떻게,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흥미롭게도 이는 당시 양국의 지도자와 관련이 많다. 우선 히틀러는 독⋅소 전쟁 발발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그가 옥중에서 저술했다는 ‘나의 투쟁(Mein Kampf)’만 봐도 소련 침공에 대한 그의 의지는 상당히 뿌리가 깊었다. 당연히 그러한 이가 이끄는 나치 독일과 공산주의 세계화를 노리던 볼셰비키 소련의 관계는 절대로 좋을 수 없었다.


1939년 8월 23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왼쪽)과 면담하는 독일 외상 리베트로프. 견원지간이던 양국은 순식간 동맹국이 됐다. 이를 믿고 스탈린은 독·소 전쟁 징후를 무시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1939년 8월 23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왼쪽)과 면담하는 독일 외상 리베트로프. 견원지간이던 양국은 순식간 동맹국이 됐다. 이를 믿고 스탈린은 독·소 전쟁 징후를 무시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대처할 시간 놓친 스탈린

그러나 아무리 양국의 관계가 적대적이더라도 전쟁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더구나 냉전 시대를 지배한 상호확증파괴이론(Mutual Assured Destruction·핵무기를 보유하고 대립하는 2개국이 있을 때, 둘 중 어느 한쪽이 상대방에게 선제 핵 공격을 받아도 상대방이 핵전력을 보존시켜 보복 핵 공격을 할 수 있는 경우 핵무기의 선제적 사용이 쌍방 모두를 파괴시키므로 2개국 간에는 핵전쟁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주장의 이론이자 전략)처럼 양측의 무력이 비슷한 수준이거나 전쟁을 벌여서 이겨도 내가 감당해야 할 피해가 심각할 것으로 예상된다면 대치로만 끝나는 경우가 많다. 독⋅소 전쟁 직전에 실전 경험은 독일이 풍부했지만, 규모는 소련군이 훨씬 컸다. 아무리 히틀러가 호전적이라도 이런 상태에서는 함부로 전쟁을 벌일 수 없다. 오히려 전쟁 직전 두 나라는 형식상이기는 하나 엄연히 동맹 관계였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으로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면서 벌어진 모습이었다. 그 때문에 굳이 침략을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소련을 정복하려는 히틀러의 의지는 대단했다. 다만 앞에 언급된 이유로 히틀러도 막상 전쟁을 시작하려니 스트레스가 극심했다. 소련 침공 하루 전인 1941년 6월 21일, 유일한 친구인 무솔리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오랫동안 고뇌해왔으므로 이제 나는 자유인이 된 느낌입니다’라고 의견을 피력했을 정도였다.

당연히 국경에서 독일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연일 크렘린에 전해졌다.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간첩들은 물론 도쿄에서 암약하는 거물 간첩 조르게(Richard Sorge)도 날짜까지 정확히 지목하며 전쟁이 확실하다고 보고했다. 이런 징후가 나타나면 1급 경계 태세를 내리는 것이 당연히 올바른 조치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탈린은 그러지 않았다.

당시 그는 독일이 영불 해협과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과 싸우고 있기에 소련 침공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소련을 속이기 위해 추후 영국의 식민지를 분할하게 되면 일부를 넘기겠다는 독일의 허위 제안을 믿었다. 그래서 선제공격하자는 군부의 주장을 각하했다. 위기의 징후를 무시한 결과의 대가는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혹독했다.

1997년 12월 3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기로 발표했다. 하지만 그해 여름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시작으로 많은 경고음이 들렸던 상태였다. 우리는 그들과 상황이 다르다며 눈과 귀를 막았고 경제 주권이 IMF로 넘어가는 참담함을 겪었다. 이처럼 위기는 경고 없이 오지 않는다. 다만 이를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대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