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요 ‘고향의 봄’ 에서 ‘울긋불긋 꽃 대궐’로 등장하는 조각가 김종영의 생가. <사진 : 이우석>
동요 ‘고향의 봄’ 에서 ‘울긋불긋 꽃 대궐’로 등장하는 조각가 김종영의 생가. <사진 : 이우석>

어린 시절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하는 동요 ‘고향의 봄’은 대체 어디일까 하는 것이었다. 산골이라 했으니 강원도가 아닐까. 인터넷 검색이 없던 시절, 셜록 홈스 식으로 몇 번 추리를 전개해봤는데 힌트는 얼마 없었다.

시간이 꽤 흐른 후, 고향의 봄이 바로 시인 이원수가 살았던 창원시 소답동 일대란 것을 알게 됐다. 직접 가보려 했다. 기어코 봄에 맞춰 창원의 ‘꽃대궐’을 찾아 떠났다. 뭔가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궁금증이 해소될 것을 기대하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창원은 산업도시로 알려졌지만 사실 전원적 풍경을 오롯이 품은 도시다. 통합되면서 이젠 마산 가포 앞바다도, 흩날리는 벚꽃비의 진해 여좌천도 창원시다. 올봄은 벌써 향기로운 그 발자국을 창원에 찍어놓았다. 뚜렷하게.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교민이나 남과 북이 만나면 그 자리엔 언제나 ‘고향의 봄’이 울려 퍼진다.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애창하는 노래, 고향의 봄은 동원 이원수(1911~1981)가 쓴 시에 홍난파가 곡조를 붙인 것이다. 동원은 심금을 울리는 이 동시를 15살(1926년) 때 써서 ‘어린이 잡지̓에 투표해 당선됐다.

동원은 경남 양산에서 태어났다. 창원에 살던 조각가 김종영의 집에서 자취하다 마산에 유학왔다. 당시 이미 번화한 도시였던 마산에는 꽃이 별로 없었던지 동원은 어릴 적 놀던 창원의 꽃대궐을 그리며 이 시를 썼다고 술회했다.

좀 더 알아보고자 창원 고향의봄도서관을 찾았다. 이곳엔 이원수문학관이 있다. 먼저 동원의 삶과 문학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짧은 영상을 봤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다. 한평생 아동을 위해 동화와 동시를 써온 동원은 한때 징용을 독려하는 등 친일 행위를 한 적 있었다. 그래서 2000년대 초 고향의 봄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고향의 봄’ 작사가 이원수의 고향 창원

반면 그가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강압에 대한 저항의 내용이 담긴 동화를 쓰고 한글 시를 쓰는 등 저항했고, 1935년에는 농민문학을 공부하다 불온단체 활동가로 몰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됐다.

동원과 평생을 함께한 반려자 최순애(1914~98)의 얘기도 알게 됐다. 그는 동원보다 1년 먼저 ‘어린이’에 등단한 선배다. 최순애는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로 시작하는 ‘오빠 생각’을 지었다. 소파 방정환에게 감명받아 동시를 써오던 열다섯 살의 동원은 ‘오빠 생각’을 읽고 열세 살 최순애와 편지로 교류했고, 결국 둘은 만나 결혼에 이르렀다.

동원이 살았던 김종영 저택에 봄이 왔다. 어린 동원의 눈에는 꽃대궐이었겠지만 생각보다 집은 작았다. 100여년의 세월을 거스른 낡은 집이지만 새봄의 기운이 훈훈하고 따뜻하게 빈집을 채우고 있었다. 아직 일러 복숭아꽃, 살구꽃은 없었다. 나무도 없었다. 하지만 샛노란 산수유가 피어났고 정원에는 외로운 벚꽃과 목련이 서로를 벗삼아 봄을 찬양하고 있다.


마산에서는 술값을 내면 푸짐한 제철 음식들이 상에 오르는 ‘통술’ 문화가 유명하다.
마산에서는 술값을 내면 푸짐한 제철 음식들이 상에 오르는 ‘통술’ 문화가 유명하다.

꽃향기가 짙어서 진해라 불렀나

꽃 보러 진해구로 넘어갔다. 속천항에서 봄 냄새 물씬 풍기는 ‘도다리쑥국을 코로 혀로 맛보고 나니 꽃 생각이 간절하다. 아직 벚꽃은 살짝 일렀다. 멀리 일직선으로 뻗은 레일, 열차가 벚꽃터널을 통과할 때 연분홍 꽃비가 내린다면 누가 앞서 간 겨울을 서러워하리오.

진해 중심가 여좌천 일대는 가장 많은 꽃과 사람이 몰리는 곳이다. 시내를 세로진 여좌천을 따라 봄으로 향하는 1.5㎞의 꽃터널을 만들어 낸다. 가로수가 모두 수령 60년 이상의 왕벚나무다. 천변에는 샛노란 유채꽃이 잔뜩 피어나 색 대비를 이룬다. 자연의 캔버스에 계절의 팔레트로 낭만을 찍어 봄을 그린다.

꽃 구경 나온 이들이 가장 많은 곳이 여좌천이다.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어오면 하늘 높이 셀카봉을 들어올린다. 새로운 시대의 봄을 찬양하는 방법이다.

창원에서 마산은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형성된 영화가 지금도 남아 있다. 1760년 한양으로 세곡 공출을 위해 마산에 조창을 뒀는데 이때부터 도시의 위용이 당당했다. 일제강점기 경남 최대 어시장을 품었고, 한일합섬 등 섬유 산업 도시로서 위상을 과시했다. ‘마고(마산고)’와 ‘마상(마산상고)’이 있는 등 교육도시로도 유명했다. 한때 마산은 전국 6대 도시에 꼽히던 대도시였다.

주변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규모의 마산항엔 하늘을 찌를 듯 높은 크레인이 우뚝 섰고, 어시장 새벽 위판장엔 멀리 산청·함양·진주 심지어 대구에서도 제수용 생선을 사러왔다. 당연히 오동동 통술 거리엔 밤새 젓가락이 춤을 추었다.

곳간이 차면 예술혼이 무르익는 법. 조각가 문신, 시인 김춘수·이은상·천상병·정진업 등이 이곳 마산에서 자라며 예술혼을 키웠다.

마산창이 있던 창동(倉洞), 화려했던 마산의 원도심이다. 서울 명동 부럽지 않았던 창동은 이제 과거의 영화를 되찾고 있다. 낡은 거리에 문화·예술을 덧입히는 방식으로 도시 재생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옛 마산의 잃어버린 상권 기능을 재생시키기 위해 창동예술촌 등을 조성했는데 그것이 주효했다. 부림시장과 골목 점포에 문화·예술인이 상주하며 작업하고, 작품을 판매한다. 예술상업골목에는 50여개 입주시설과 12개 체험공방, 트렌디한 커피숍과 식당이 낡은 골목을 비집고 들어왔다.

걸핏하면 깡그리 갈아엎는 서울과는 달리 마산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오랜 세월 마산 시민의 약속 장소였던 학문당 서점과 ‘빠다빵’이 맛있은 고려당 빵집도 그대로 있다. 부림시장에 들러 6·25떡볶이에서 국물떡볶이를 맛보거나 문신미술관이 있는 성호동 쪽으로 올라 ‘가고파 꼬부랑길’을 걸으면 마산의 속살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다.


▒ 이우석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여행기자협회 회장, 14년째 여행·맛집 전문 기자로 활동 중


여행수첩

즐길 거리 문신미술관은 마산 시민의 자존심이다. 세계적인 조각가 문신(文信·1926~95)의 작품을 간직한 곳이다. 우주의 생명과 운율을 시각화한 대형 스테인리스 조각품들과 작품을 만들기 위한 석고 원형(原型)을 모아놓은 원형미술관 등을 통해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미술관은 언덕배기에 있기 때문에 마산항을 조망할 수 있는 명소다.
날이 맑으면 저도(猪島)에 가면 좋다. 저도는 육지와 다리로 연결된 육계도다.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 속‘콰이강의 다리(태국)’를 빼닮은 연륙교를 지나 닿는 저도에선 푸른 바다를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 저도 비치로드는 해변을 따라 섬을 한바퀴 도는 코스다. 때마침 고혹적인 분홍색을 뽐내는 아기 진달래가 피어나 옥색 바다와의 색 대비를 더욱 아름답게 하니 발걸음이 가볍다.

먹거리 마산하면 역시 아귀찜이다. 전국적으로 아귀찜집에는 보통 마산을 붙인다. 생아귀와 건아귀 두가지 종류의 맛이 있으며 좀 더 고급스러운 아귀수육도 별미다. 생아귀찜을 주로 취급하는 다정식당은 아귀수육과 찌개를 잘하는 집. 큼지막한 간을 비롯해 내장과 쫀득한 껍질이 곁들여진 수육이 특히 맛 좋다. (055)223-9959.
통술집도 빼놓을 수 없다. 통술집은 통영 ‘다찌집’이나 전주 막걸릿집처럼 술만 주문하면 싱싱한 각종 안주를 한상 차려내는 술집을 말한다. 신마산 통술거리의 ‘홍시통술’은 2인 기준 6만원에 실로 다양한 안주를 낸다. (055)222-7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