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부가’로 유명한 농암 이현보의 집안은 10대에 걸쳐 80세 이상 장수한 것으로 유명하다. 농암 이현보의 영정. <사진 : 푸른 영정>
‘어부가’로 유명한 농암 이현보의 집안은 10대에 걸쳐 80세 이상 장수한 것으로 유명하다. 농암 이현보의 영정. <사진 : 푸른 영정>

조선시대에 이 집안만큼 엄청나게 장수한 집안은 아직 찾지 못했다. ‘어부가(漁夫歌)’라는 시조로 유명한 영천 이씨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집안의 장수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89세까지 장수한 농암을 비롯해 부친 98세, 모친 85세, 숙부 99세, 조부 84세, 조모 77세, 증조부 76세, 고조부 84세다. 그리고 아우 현우 91세, 현준 86세, 아들 문량 84세, 희량 65세, 중량 79세, 계량 83세, 윤량 74세, 숙량 74세. 또한 문량의 증손자와 고손자도 각각 94세, 82세까지 장수했다고 하니 10대에 걸쳐 장수한 것이다. 농암의 장수비결은 뭘까.

첫째, 강한 체질을 물려받아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농암은 ‘장수 유전자’와 뼈대가 강한 튼튼한 체격을 물려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한의학적으로 보면 신장의 정기를 잘 물려받은 것이다. 농암의 외모를 표현한 기록이 있는데, 어떤 벼슬아치가 선생을 무고하기를 “전날에 철면을 쓰고 수염이 길게 난 자가 바로 큰 죄인인데 누구인지 이름을 몰랐더니 그가 바로 이현보입니다”라고 했다.

이것을 보면 수염이 많고 얼굴이 검붉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한의학적으로 수염은 신장의 정기를 반영하므로 신장의 정기가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앙보다 외직 근무를 선호

농암이 태어나서 젊은 시절까지 살았던 마을이 안동시 도산면 부내(汾川·汾江村)인데, 낙동강의 물줄기가 굽이굽이 흘렀다. 그래서 주자의 고향에 있는 ‘무이구곡(武夷九曲)’에 빗대어 ‘도산구곡(陶山九曲)’이라 이름 지었다. 권시중의 <선성지>에 의하면 ‘조물주가 특별히 만들어 놓은 땅이며,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별천지’라고 했는데, 낙동강 중에서 도산을 지나는 20㎞ 정도만이 싱그럽고 다양한 아름다움을 연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최적의 주거지로 도산과 하회를 꼽았다.

둘째, 운동을 많이 했다. 어렸을 때 놀기를 좋아했고 성품이 호탕하여 학문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고 한다. 19세에 향교에 들어가고 20세부터 학문에 힘을 쏟았는데, 소과 합격이 29세 때이고 대과 급제는 32세 때였다.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는 바람에 건강을 해친 선비들도 많았지만, 농암은 사냥 다니며 운동한 탓에 38세 때 국문을 당하고 유배 됐다가 다시 이송돼 장형을 당하고 옥에 갇혔지만 회복됐다. 2년 뒤에 중종반정으로 관직에 복귀했다.

셋째, ‘욕심 없는 삶’을 살았다. 관리라면 누구나 중앙 근무를 선호할 것인데, 농암은 스스로 외직 근무를 선호해서 30년을 지방으로 떠돌아다녔다. 부모가 연로해서 가까이 모시고자 함이었고, 그 바람에 사화(士禍) 등으로 인한 권력 투쟁의 암투와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었다.

사실 농암은 갑자사화 때 서연관의 비행을 논박하다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안동으로 유배됐다가 또 무고를 당해 의금부로 이송돼 70여일을 옥에 갇혀 죽음을 당할 위기를 맞았다.

그런데 연산군이 석방자를 지목하기 위해 명을 내리는 붓에서 먹물이 실수로 농암의 이름 위에 떨어지는 바람에 기적적으로 풀려났던 것이다.

그러고는 고향에 돌아와 세상일에 귀먹은 체하고 지냈다. 고향 부내의 낙동강가에 솟아있는 바위 이름인 ‘농암(聾巖)’을 자호로 삼은 뜻은 뜬구름 같은 영화로부터, 복잡한 중앙정계의 권력다툼으로부터 무관심하게 지내며 마치 귀먹은 듯이 살겠다는 다짐으로 보인다.

농암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로서 능력이나 주변의 인기를 감안하면 판서나 정승도 충분히 될 수 있었지만 결코 높은 벼슬을 탐하지 않았다. 지방관으로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욕심 없는 삶의 면모는 76세에 관직에서 스스로 은퇴할 때의 모습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더 높은 벼슬을 할 수 있음에도 은퇴했고 한강에서 고향으로 떠나는 배에는 화분 몇개와 바둑판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넷째, 시와 노래와 더불어 살았다. 강호에서 시와 더불어 사는 삶은 얼마나 여유롭고 평화로울까. 게다가 직접 강에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낚았고 흥이 나면 가사를 지어 노래를 불렀다. 38세 이후에 남긴 120여편의 글 중에서 ̒어부가̓를 비롯한 90여편을 은퇴 후에 썼으며 양반·상민을 가리지 않았고 빈부를 차별하지 않았다. 게다가 시골노인들과 잘 어울리며 그들의 삶을 마음깊이 존중했기에 퇴계는 ̒어부가̓의 발문에 ‘신선’이라고 썼다.

풍류를 즐길 줄 알았기에 손님이 오면 강에 배를 띄우고 노래했고 철쭉꽃이 피면 벗과 같이 모여 시를 짓고 강물 위에 잔을 띄워 ‘유상곡수(流觴曲水)’를 했다고 한다. 심지어 어머니 권씨부인은 농암이 승진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한글로 시를 지어 계집종으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했다. 집안 분위기가 이 정도라면 건강 장수는 저절로 되지 않을까 싶다.


부친 생신 때 때때옷 입고 춤춰

다섯째, 효심이 지극했다. 농암은 53세 때 안동부사로 지내며 중양절을 맞아 경로잔치를 마련했다. 80세가 넘은 수백명의 노인들이 남녀 귀천 구별 없이 초청되었는데, 그때 농암은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또 부친의 나이가 94세였을 때 고을 노인들을 초대한 장수연에서도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는데, 당시 농암은 67세의 홍문관 부제학이었다.

잔치를 열었던 ‘애일당(愛日堂)’은 농암이 귀먹바위 주변에 지어드린 별당으로 부모님이 늙어 감을 아쉬워하며 살아계신 하루하루를 사랑한다는 의미다. 노인 아홉이 모였다 해서 ‘애일당 구로회’로 이름 지은 이 잔치는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농암의 집안이 장수한 것으로 증명이 되었듯이 효도하면 건강하게 된다.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선비라면 공자의 효경에 나오는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라는 글귀를 알 것인데, 자신의 몸을 건강하게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생활한다면 장수하지 않을까.


▒ 정지천
동국대 한의대 교수, 서울 동국한방병원 병원장, 서울 강남한방병원 병원장, 동국대 서울캠퍼스 보건소장, 대한한방내과학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