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밝은 밤의 강원도 평창 봉평 메밀꽃밭. <사진 : 이우석>
달 밝은 밤의 강원도 평창 봉평 메밀꽃밭. <사진 : 이우석>

몇년 전 달이 가득 차올랐을 때 ‘그 메밀밭’을 갔다. 달은 휘영청 밝았지만 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다. 이듬해 또 한 번 갔다. 꽃은 제법 피었지만 달이, 그 큰 달이 창호처럼 얇은 구름 뒤로 숨었다. 자연이란 늘 마음 같지 않다. 지난해 마침내 달을 만났다. 넓은 꽃밭을 하얗게 비추는 ‘흐뭇한’ 그 달을. 반갑다. 소설 속 그 달과 꽃은 어두운 밤의 터널 속 서로를 비춘다. 황송하고 고맙다.

지금은 해가 바뀐 9월 초. 도망치듯 여름이 사라져버리고 난 가을 평창에 젖니처럼 희고 자그마한 메밀꽃이 툭툭 터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엉덩이 무거운 여름을 밀어낸 서늘한 바람과 초가을 땡볕이 순식간에 봉평 푸른 들을 온통 뒤덮을 기세다.

차가운 평창강에는 기운 센 열목어가 돌아다닌다. 시린 물에서 더욱 힘찬 꼬리짓을 펼치는 열목어를 보고 꾼들이 모인다. 팽팽한 낚싯줄이 가을바람을 가른다. 산 그림자 아래 계곡에 서서 캐스팅(플라이낚시에서 미끼를 원하는 곳으로 던지는 것)을 척척, 신바람 내며 계절을 낚는다. 아, 가을이다.


월하의 백화원

하얀 꽃이 모두 그렇듯 메밀꽃은 풀벌레 우는 밤에 봐야 좋다. 추석 즈음이라 마침 휘영청 둥근 달이 떴다. 음력 사흗날. 소설 속 보름달은 아니지만 그나마 수막새보다는 볼록한 구분(九分) 달이 어두운 하늘을 가득 채웠다. 오늘로써 기필코 볼 수 있을까, 창백한 달빛 아래 빛나는 메밀꽃밭을. 고운 달이 부끄러워 숨어들지만 않으면 됐다. 준비는 끝났다. 월하의 정인처럼 어스름한 빛을 온몸에 받으며 걸었다. 수정체를 가득 열고 나니 어느새 능선까지 또렷하게 보인다. 고막도 열렸는지 섬세해진다. 풀벌레가 움직이는 소리까지 들린다.갑자기 형광 같은 꽃밭이 펼쳐진다. 허생원이 대화장으로 향하던 고된 여정 속 길가 메밀꽃밭이 마침내 내 앞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배추 위에 뿌린 굵은 소금, 아니 어느 고관대작이 쏟아버린 다이아몬드 한 자루처럼 아무튼 새하얀 꽃잎이 각각의 빛을 낸다. 싸구려 촌스러운 발광이 아니라 은은한 빛을 발한다. 꽃잎이라고 해봐야 겨우 날벌레 크기나 될락말락한 놈이다. 콧속에 구수한 향을 가득 채우고 입안에 까끌까끌 혓바닥을 문지르는 소중한 메밀 싱아를 잉태한 꽃을 보노라니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산그림자까지 펼쳐진 봉평의 달밤. 이따금 바람이 불어와도 나풀거리지 않고 꼿꼿이 선 메밀은 꽃이기 전에 소중한 작물로 자존심을 세운다. 만산홍엽의 가을을 앞두고 순백의 서막이 열렸다. 하얀 꽃 위 또 하얀 달, 솜씨 좋은 누군가 관상용으로 가꾼 것도 아닐진대 극히 아름답다. 꽃밭에 하반신을 담근 채 하얀 바다를 헤엄치고 싶다. 머리 위로 점점 타오르는 달이 허연 빛살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한 장면을 형상화 한 조형물. <사진 : 이우석>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한 장면을 형상화 한 조형물. <사진 : 이우석>

가을의 꽃밭

평창강변에는 백일홍도 한가득 피었다. 순백의 메밀꽃과 올해 평창읍 평창강 일대 둔치에 조성해놓은 붉은 백일홍은 메밀꽃과는 또 다른 화려한 컬러로 유혹한다. 수십종의 백일홍이 탐스럽게 피어나 진녹의 둔치, 푸른 강물과도 퍽 조화롭다. 가을볕을 받아 현란한 색을 발하는 꽃밭은 가을님이 오시는 길을 환영하는 ‘레드 카펫’이라 할 수 있다.

꽃만으로는 도저히 엉덩이가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시원한 청정 고원에서 놀거리를 찾아보면 된다. 땅이 하도 높아서 ’하늘이 겨우 석자’라는 북평창 봉평땅은 해발 700m에 가까운 고원으로 1000m 고산준령이 즐비하다. 각 산의 신령이 모인다는 회령봉(1324m)에는 모처럼 시원하게 걸어볼 수 있는 산행로가 있다. 덕거리 연지기 마을로부터 완만한 임도의 오르막길을 서너시간 이상 걸으며 폐부를 씻고 올 수 있다.

면온 휘닉스파크 앞에서 출발해 숲길을 따라 봉평장으로 이어지는 고랭길도 있다. 봇짐과 나귀 대신 물과 간단한 간식거리만 준비해서 다녀올 수 있다. 가는 길 곳곳에 메밀꽃밭이 펼쳐진다. 만약 산행길이 버겁다면 곤돌라를 타고 오를 수 있다. 태기산(1261m)에 위치한 휘닉스파크 정상 몽블랑(1050m)도 있고 차량으로 오를 수 있는 하늘목장도 있다. 몽블랑에는 양과 염소 등 동물농장과 전망대, 카페 등이 있어 구름과 산이 수평선처럼 이어진 절경의 파노라마를 눈에 담아 올 수 있다.


열목어 낚시

평창강에 돌아다니는 열목어를 공략할 플라이낚시의 계절이기도 하다. 플라이낚시는 조금 낯설다. 1990년대 초반부터 서서히 알려지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1992년 때마침 개봉한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의 영향도 제법 컸다. 영국의 귀족 낚시 게임에서 시작됐다는 플라이낚시는 영화처럼 미국에서 가장 인기가 높다. 노끈과 실을 묶어 직접 만든 미끼를 쓰고 ‘캐치 앤드 릴리즈(잡고 놓아주기)’ 등 친환경 낚시다. 공격적이면서도 방어적이고 동적이면서 정적인 묘한 매력이 가득한 것이 플라이낚시다. 플라이낚시 마니아 박상현씨는 “팔을 들어 ‘메트로놈’처럼 8시와 10시 방향 사이로 왔다갔다 흔들다 순간 멈추면 살짝 내려앉는다”고 조언했다.


▒ 이우석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여행기자협회 회장, 14년째 여행·맛집 전문 기자로 활동 중


TIP 여행정보

봉평 고랭길
휘닉스파크 고랭길 입구~초봉~계곡광장~삼구쉼터~중봉~무이밸리 삼거리~최고봉~움치 사거리~정자~이효석문학의숲~이효석생가터~이효석문학관~남안교~봉평장터(총 9.3㎞) 약 2시간 30분 소요.

먹거리
봉평 일대에는 메밀 식당들이 많은데 막국수는 물론 다양한 토속 먹거리를 맛볼 수 있다. 메밀막국수는 물과 비빔 등 2종류가 있지만 사실 현지 토박이들은 물막국수를 거의 먹지 않는다. 냉면과 달리 막국수는 쓱쓱 양념장에 비벼먹다 육수를 부어 훌훌 마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메밀마당은 국수를 잘 말아낸다. 순면은 아니지만 메밀면의 투박한 질감이 그대로 살아있는 면에 매콤달콤한 양념을 넣고 비벼먹는 재미가 있다.

배추 한 장 넣고 얇게 부쳐낸 메밀전과 메밀만두, 김치와 두부 등 속을 다져넣고 말아낸 메밀전병 등 온가족이 즐길 수 있는 메밀요리를 가득 차려낸다. 봉평면 창동리 메밀마당 (033)334-3383.

가을을 맞아 지방을 축적하기 시작하는 한우를 맛보기에도 최고다. 평창한우마을 봉평점은 저렴한 값에 질 좋은 한우를 맛볼 수 있는 식육식당이다. 봉평점 (033)334-97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