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4월 18일 파리에서 있었던 ECSC 창립식. 경제기구였지만 제2차세계대전의 참화를 경험한 후 전쟁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탄생했고 이후 EU로 발전했다. <사진 : www.cvce.eu>

6월 23일, 영국의 EU(유럽연합) 탈퇴를 놓고 벌인 국민투표 결과는 세계를 엄청난 충격에 빠뜨렸다. 그 여파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자 EU와 영국, 하다못해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를 이끈 주도 세력조차도 정작 마땅한 후속 대책을 내놓지 못하며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EU를 한마디로 단정하려면 조금 애매모호한 측면이 있지만 1951년 결성된 ECSC(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으므로 경제적인 목적이 가장 중요한 공동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영국도 빈부 격차, 고용 등에서 문제가 있지만 여타 EU 국가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양호한 성장률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단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국민들이 EU 탈퇴에 더 많은 표를 던진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사회적·문화적인 요인도 복합적으로 내재됐기 때문이다. EU에 속하다 보니 제약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동유럽으로부터의 이민자, 시리아 내전 이후 급격히 늘어난 중동 난민 그리고 연이어 발생하는 테러 행위로 인한 이슬람에 대한 혐오증 등이 어우러진 결과다. 만일 이주민이 많이 들어와도 안전과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고 오히려 도움이 된다면 투표 자체가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경제와 정치를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고, 실제로 EU는 이사회와 의회를 발판으로 다양한 현안을 다루는 정치적 조직이기도 하다. 사실 앞서 언급한 EU의 전신인 ECSC도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한 대책 수립 과정에서 등장한 해법 중 하나였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질서 재편에 나선 당시 유럽인들은 전쟁의 원인으로 경제적 문제를 꼽았고 이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지 않고는 앞으로의 평화를 장담하기 어렵다고 봤던 것이다.



독가스 공격으로 시력이 손상된 영국 병사들. 독일과 사이가 나빴지만 엄밀히 말해 영국은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약을 이행해 유럽의 일원으로 남기 위해 희생을 감내했다. 최근 브렉시트 사태를 보면 영국은 이전 세대가 어려움을 감내하며‘명예로운 고립’을 포기했던 이유를 모르는 것 같다.

19세기 산업화 이후 우월적 지위 사라져

이번 브렉시트의 근원적 문제를 따지면 당연히 정치적, 외교적 더 나가 군사적 문제까지도 거론될 수밖에 없다. EU 탈퇴에 찬성 결과가 나온 후, 각 언론사가 앞다퉈 영국의 행보를 ‘명예로운 고립(Splendid Isolation)’으로 언급한 것이 바로 그러한 증거다. 이 단어 자체가 대영제국 시절 영국이 추구한 정치, 외교의 기본적인 패러다임이었기 때문이다.

국가 고립은 쇄국정책을 펼친 조선이나 현재의 북한처럼 세계 시스템에 참여하기를 일부러 거부해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굳이 주변과 관계를 맺지 않더라도 충분히 잘살 수 있었던 수퍼파워들이 종종 행사하던 정책이기도 했다. 제2차세계대전 이전의 미국, 강건성세(康乾盛世) 말기의 청(淸) 등이 대표적이다. 20세기 이전의 영국도 그러한 경우지만 바로 옆에 마땅한 경쟁자가 없었던 미국이나 청과는 다른 점이 있다.

16세기에 대서양의 패권을 거머쥔 이후 영국은 광대한 식민지를 차지하며 제국으로 성장했으나 가장 강력한 적대 세력들이 바로 유럽 대륙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이들이 서로 세력 다툼을 벌였고 바다가 대륙과 영국을 분리하고 있어 안보 유지에 유리했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영국은 대륙 국가들이 계속 그 수준에 머물면서 어느 특정 국가가 너무 강대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국은 대륙 국가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합집산 행위에 적극 가담하지 않고 나폴레옹 전쟁처럼 특정 국가의 득세가 우려되면 잠시 반대편에 서서 힘을 보태는 식으로 세력 균형의 조정자 역할만 담당했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 타도에 힘을 보탰지만, 승리 후에는 영토를 비롯한 전리품 획득에 눈이 멀었던 여타 승전국들과 달리 보복에 반대해 오히려 나폴레옹의 영국령 유배를 요청했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영국은 혼자서도 잘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발판으로 자발적 고립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식민지에서의 혹독한 수탈과 탄압이 있었지만 영국은 유럽 대륙에 있는 경쟁자들과 관계 맺지 않고 한걸음 떨어져 있어도 자신들이 구축한 세계에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이후 현대 산업화 시대가 본격 시작되면서 영국의 압도적인 우위는 서서히 사라져갔다.

다급해진 영국은 프랑스를 견제하려고 독일 통일을 용인하고 후원했지만 정작 20세기가 시작되자 독일 국력은 영국의 경제력을 능가할 만큼 성장해 프랑스보다 더 위협적인 상대로 바뀌었다. 특히 독일이 대외 진출을 추진하며 벌인 대대적인 건함(建艦)은 지난 400년간 바다의 패권을 잡고 있던 영국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이처럼 강력한 경쟁자의 등장은 이전처럼 고립만으로 안전을 담보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다. 결국 100년전쟁 이래 견원지간이던 프랑스와 1904년 영·불협상(Entente Cordiale)을  체결한 것을 시작으로 다자간 협력체제에 적극 가담함으로써 그동안 영국이 유지했던 명예로운 고립 정책은 완전히 파기됐다. 비록 서류에 참전 조항은 없었으나 영국은 과거처럼 대륙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고난 후 저울질하다가 간섭 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은 채택할 수 없었고 처음부터 함께 싸워야 할 의무를 부과받았다.


과거 경험 잊은 브렉시트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즉각 교전국이 됐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세르비아 분쟁 때문에 영국과 독일이 전면전을 벌여야 하는 현실이 이해되지 않았던 메리(Mary of Teck) 대비가 “이런 바보 같은 이유 때문에 전쟁을”이라며 통탄했지만 어느덧 영국은 하기 싫은 힘든 의무도 수행해야 국익을 보존할 수 있는 상태로 처지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리고 NATO(북대서양 조약기구)체제에 속한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그러했던 영국이 EU에서 분리해 독자적인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다. 탈퇴파는 세계를 지배하던 대영제국 당시의 명예로운 고립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환호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고 또한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영국이 현재도 세계 5위의 경제 강국이지만 대영제국 당시처럼 문을 걸고 홀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압도적인 패권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제 패권국조차도 벽을 쌓고 살 수는 없다. 국민투표 형식을 빌렸지만 소수 정치인들의 권력욕에 의해 국론이 양분되며 영국은 어려운 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후 나쁜 결과가 나오면 고통은 이런 선택을 유도한 이들이 아니라 국민들의 몫이 된다. 20세기 초의 동맹과 현재의 EU가 같은 시스템은 아니지만 현대 영국인들이 이전 세대가 명예로운 고립을 포기하고 유럽의 일원이 되고자 노력했던 이유를 망각했기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 남도현
럭키금성상사, 한국자동차보험 근무, 무역 대행업체인 DHT에이전스 대표, 군사칼럼니스트로 활동, 주요 저서 <무기의 탄생> <발칙한 세계사> 등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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