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의 초상화.

이번 휴가에는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의 건강법에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 연암은 <양반전>, <허생전> 등의 소설을 지은 문장가로 유명하지만 과거를 포기해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지내다가 사은사(謝恩使)로 가는 삼종형(三從兄)을 따라 청나라에 다녀와서 쓴 <열하일기(熱河日記)>로 인해 일약 사회 명사로 떠올랐다. 가난한 살림에다 지인들의 배신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69세까지 살아서 당시로서는 비교적 장수했던 편이다.


연암 박지원의 대표 소설인 <양반전>. <사진 : 한국학중앙연구원>


평소엔 동 트기 전 일어나 일해

연암은 여름이면 연암골의 더위를 피해 서울 집에서 혼자 지냈다. 그때의 생활을 묘사한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에 “경조(慶弔)의 인사치레도 전폐하는가 하면 며칠씩 세수도 안 하고, 열흘 동안이나 망건도 안 쓴다. 졸다가 책 보고, 책 보다가는 졸고 해도 아무도 깨우는 사람이 없다.

진종일 자기만 하는 날도 있었다. 더러는 글도 쓰고 혹은 새로 배운 철금(鐵琴)을 뜯기도 한다”고 했다. 과연 이렇게 생활하는 것이 건강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시기의 연암은 옛 선비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스스로 일탈해 평소와는 달리 느긋하게 살기로 작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몸이 비대하고 더위를 잘 타는 편인데다 평소 연암골에서 워낙 힘들게 살았기에 한 철은 느긋하게 지냈던 것이다. 늘 바쁘게 살던 사람은 가끔 긴장을 풀고 게으름을 부릴 필요가 있다. 독일의 페트 악스트 교수는 마라톤이나 스쿼시 같은 운동 대신 게으름을 피우거나 낮잠을 자는 사람이 더 오래 살 수 있다고 했다. 직업적 긴장을 해소하는 방법과 장수의 비결로 목표 없는 게으름을 꼽았다.


연암의 <열하일기> 필사본. <사진 : 양승민 선문대 연구교수>

연암이 그렇게 게으름뱅이로 지냈던 것은 여름 한 철뿐이었고 평소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늘 자정이 지나 닭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취침했으며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났다고 한다. 특히 40대 초반에 가족을 이끌고 연암골로 피신해 은거할 때는 엄청 부지런하게 일했다. 그의 수기를 보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칠팔리를 걷지 않으면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 마을에 당도하지 못할 만큼 인적이 드물었으며 호랑이와 이리가 어슬렁거리고 다람쥐와 어울려 사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런 곳에서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고 밤과 배 등 여러 과실수를 키우고 벌을 쳐 꿀을 채취하는 등 다각적인 영농법을 실천했다. 반남 박씨 가문은 왕비와 부마를 여러명 배출하고 숱한 정승과 판서가 나온 대단한 명문집안이다. 그럼에도 대대로 부귀와 안일을 추구하지 않았고 기름진 음식도 별로 먹지 않았으며 심지어 ‘탈속반(脫粟飯·첫 번 찧은 쌀로 지은 밥)’을 먹었다고 한다. 도정하지 않은 곡물로 지은 밥은 대사증후군이 올 위험을 크게 줄이는 건강식이다.

연암의 조부인 박필균(朴弼均)은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지만, 청렴결백하고 근검절약을 실천했다. 자손들에게 가르치기를 “너희들이 장차 벼슬하여 녹봉을 받는다 할지라도 넉넉하게 살 생각은 하지 말아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청빈(淸貧)하였으니, 청빈이 곧 본분이니라”고 했다. 실제로 연암 부친의 여러 형제들이 사랑방의 좌우에서 조부를 모셨으므로 연암 형제가 책을 펴놓고 공부할 공간조차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연암이 16세에 혼인했는데, 집이 너무 좁아 그 부인은 거처할 곳이 없어 친정에서 지낼 때가 많을 정도였다.

연암은 금강산, 묘향산, 속리산, 가야산, 평양, 화양동, 단양 등 여러 명승을 유람했다. 만약 과거 공부에 매달리거나 벼슬길에 올라 업무와 당파싸움에 지쳤다면 건강이 온전하게 지켜지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고 봐야겠다. 젊었을 때는 술을 마시지 않았으나 산수를 유람할 때부터 술을 즐겼다.


연암이 그린 <국죽도>.


유람과 적당한 음주·음악 즐겨

그렇지만 연암골에서나 가끔 취했을 뿐 평소에는 취하도록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집에는 생황, 거문고 등의 여러 악기가 있어 손님이 오면 연주하게 했다고 한다. 뒤에 경상도 안의(安義·함양) 현감이 된 뒤에는 연못을 파서 고기를 기르고 연꽃을 심은 뒤 사람들을 초대해 술자리를 마련했다.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시를 읊었고 때때로 기악을 베풀기도 했다. 그림도 그렸는데, 국죽도(菊竹圖)가 전해온다.

그럼에도 연암이 훨씬 더 장수하지 못한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마음의 병이 왔던 것이다. 중년 이래 험난한 일들을 겪으며 울적한 마음을 펴지 못해 늘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병이 있었다. 특히 66세에 조부님의 묘를 포천으로 이장한 뒤 조상의 묘소가 파헤쳐지거나 훼손당하는 산변(山變)을 당했다. 그로 인해 더욱 애통해하고 상심하는 바람에 68세 때의 여름 이후 병세가 극도로 심해졌으나 약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둘째, 친한 벗들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과거를 단념하자 그의 집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고 절친했던 벗과 제자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나마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당시로서는 보편적인 50대 나이로 사망했다.

호주 연구팀이 70세 이상 노인 1477명을 10년간 추적 조사한 결과, 교우관계가 가장 좋은 492명은 하위 492명에 비해 22% 더 오래 살았다고 한다. 셋째, 부인을 일찍 사별하고 홀로 지낸 것이다. 51세에 부인이 세상을 떠났지만 재혼하지 않았고, 기생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음양으로 보면 남자는 양(陽)이고 여자는 음(陰)인데, 연암은 순양(純陽) 체질인데다 여인 없이 홀로 지냈으니 음양의 균형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 시카고대학 노화센터에서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심장병을 앓고 있는 기혼 남성이 건강한 심장을 가진 독신 남성보다 4년 정도 더 오래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 정지천
동국대 한의과대학 졸업, 한의학박사, 동국대 한의대 한방내과 교수, 서울 동국한방병원 병원장, 서울 강남한방병원 병원장 역임

정지천 동국대 일산한방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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