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은 1980년대부터 강렬한 붉은색 또는 푸른색 실크 넥타이를 고수해왔다. 이 ‘80년대 타이’는 1980년대 미국 경제의 호황기를 떠올리게 해 대선에서 긍정적 역할을 했다. <사진 : 블룸버그>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은 1980년대부터 강렬한 붉은색 또는 푸른색 실크 넥타이를 고수해왔다. 이 ‘80년대 타이’는 1980년대 미국 경제의 호황기를 떠올리게 해 대선에서 긍정적 역할을 했다. <사진 : 블룸버그>

이것은 남자 슈트의 재앙이다! 매년 ‘옷 잘 못 입는 리더’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던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 캠페인 기간에도 패션 언론들의 혹평 세례를 받았다. 그는 이탈리아 명품 슈트 브랜드 ‘브리오니(Brioni)’의 애호가로 유명한데, 한 벌에 5000~6900달러(약 580만~800만원)를 호가하는 고가 슈트를 형편없이 만들어버린다. 그의 캠페인 슬로건을 빗대 ‘트럼프는 브리오니를 위대하게 만들 수 없다’는 비난의 타이틀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길이가 길고 어깨가 넓은, 유행 지난 스타일의 재킷, 헐렁한 배기팬츠, 게다가 그 비싼 재킷과 팬츠는 쭈글쭈글 구김이 있는 경우가 많다. 넥타이는 매듭은 너무 작고, 벨트 아래로 지나치게 길게 늘어져 있다. 슈트를 입는 매너 또한 엉망이다. ‘서 있을 때는 재킷 윗 단추를 채우고, 앉을 때는 풀어야 함’을 잊을 때가 많다. 마치 1980년대에서 멈춘 듯한 ‘냉동인간 패션’과 남을 의식하지 않는 ‘막장 슈트’ 매너도, 그의 ‘막말’처럼 일종의 전략일까.


트럼프는 자신의 슬로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가 쓰인 트러커 캡을 활용해 블루칼라와 저소득층을 사로잡았다. <사진 : 블룸버그>
트럼프는 자신의 슬로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가 쓰인 트러커 캡을 활용해 블루칼라와 저소득층을 사로잡았다. <사진 : 블룸버그>

레이건 시대 유행한 ‘80년대 타이’

도널드 트럼프의 ‘막장 슈트’는 ‘의도된 방치’라 볼 수 있다. 거침없는 막말이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 불허의 행동, 비호감 이미지가 그의 ‘막장 슈트 룩’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언론이나 대중의 혹평에 개의치도 않고, 오히려 이슈화되는 걸 이용하는 ‘노이즈 마케팅’ 효과를 얻어낸다.

대표적인 예가 도널드 트럼프의 ‘80년대 타이’다. 그는 80년대부터 변함없이 강렬한 붉은색 또는 푸른색 실크 넥타이를 고수해오고 있다. 트럼프의 반질반질한 실크 타이는 1980년대 월스트리트와 ‘여피(yuppie)’들을 떠올리게 한다. 성공지향의 삶을 좇고, 젊은 나이에 축적한 부를 온갖 명품과 고급차로 과시하던 여피들의 시대에 도널드 트럼프는 톱스타였다. 온갖 미디어를 도배한 트럼프를 보며 1980년대 미국인들은 그의 성공신화에 열광했고, 이민자들은 아메리칸 드림에 빠져들었다. 1990년대 거품 경제가 붕괴되며 중상류층에서 서민층으로 몰락한 일부 미국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1980년대를 ‘좋았던 시절’로 추억한다.

‘강하고 풍족한 미국’을 외치며 ‘레이거노믹스’를 강력하게 추진했던 레이건 시대의 ‘호황’을 재현해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하는 듯하다.


“가장 옷 못 입는 美 대통령 가능성”

도널드 트럼프의 80년대 타이와 함께 이번 대선 기간 트레이드마크가 된 건 ‘트러커 캡(trucker cap)’이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ke America Great Again)’란 슬로건이 적힌 이 노동자 모자는 대히트를 쳤다. 이 역시 농담의 소재가 돼, 수많은 패러디를 생산했다. ‘미국이 다시 책을 읽게 만들자’ ‘미국을 다시 멕시코로 만들자’ 등의 문구를 새긴 모자들이 등장했고 불티나게 팔렸다. 그의 촌스러운 ‘80년대 냉동 패션’만큼 ‘노이즈 마케팅’ 효과를 톡톡히 누린 셈이다. 민주당 소속 브랜드 마틴 의원은 “트럼프는 마케팅 천재”라며 “어쨌거나 이 모자로 인해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트럼프의 슬로건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동시에 트러커 캡은 트럼프가 지닌 아웃사이더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억만장자 상류층으로 그는 기득권층이지만, 정치계에서 트럼프는 아웃사이더다. 트러커 캡을 쓰고 정치 기득권층에 막말을 퍼부어대는 ‘이단아’ 이미지 전략이 실제로 트러커 캡을 즐겨 쓰는 블루칼라 계층이나 정치에 관심 없던 저소득층의 시선을 집중시켰다고 평가된다.

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가장 옷 못 입는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번 대선 결과처럼 트럼프의 막장 슈트 룩이나 80년대 냉동인간 패션도 대반전을 일으켰다. 조롱거리가 되면서도 속내를 숨긴 은밀한 트럼프 지지자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의 막말 효과처럼 옷을 잘 입는 것만이 최선의 전략은 아니라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 김의향
보그 코리아 뷰티&리빙, 패션 에디터·디렉터, 콘셉트&콘텐츠 크리에이팅 컴퍼니 ‘케이노트(K_note)’ 크리에이터·스토리텔러, 패션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