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은 되었지만 해방도 된 것일까?”
올해 우리는 광복 70주년을 맞았다. 그 동안 우리의 주권은 공고히 되었지만, 과연 일본과 근대서구사상이 남긴 ‘근대주의적 사고’에서도 진정한 ‘해방’이 되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근대주의적 사고의 대표적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의 관점에 맞춰 타자를 규정하는 것이다. 예술을 통해 이를 타파하기 위해 평생 노력을 계속한 작가가 이우환이다.

그는 평소에는 낮은 목소리로 말하지만, ‘근대주의’라는 주제에 관해서는 갑자기 어조가 높아지고 목소리도 날카로워진다. “근대주의란 마치 제국주의나 식민주의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가령 일제강점기 때 우리는 이미 우리의 성(姓), 언어, 습성 등을 가지고 있는데도, 일본인들이 쳐들어와서는 이를 다 갈아치우려고 했다. 그게 바로 근대주의다. 20세기 중반까지도 기세를 떨치던 식민지주의나 제국주의는 특정 개념의 가치만을 인정하는, 즉 ‘자아 동일성’이 진리다.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발상만 펼치며 지배자의 생각대로 영토를 경영한다. 마찬가지로 화가가 캔버스를 자신의 식민지처럼 생각해서 식민지를 경영하듯이 자기 생각을 거기에 몽땅 실현하거나 혁명한다고 캔버스 안에 주먹을 그려 넣으면 이것은 완전히 제국주의를 하는 것이다. 혁명이 아니라 파시즘을 하는 것이다.”

식민사관적 근대주의 혐오
이우환 작가가 이처럼 식민사관적 근대주의에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그가 일제강점기 동안, 또한 그 후로 일본에 머물면서 그 폐해를 직접 느꼈기 때문이다. 이 혐오감은 이우환 뿐만 아니라 나치를 경험한 서구 사상가들이나 예술가들도 똑같이 느꼈다. 이들은 플라톤 이래 2500여 년간 세상을 지배해온 자기 동일화적인 관점을 철저히 비판하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사상과 예술의 도래를 촉구했다. 예술가가 자기의 생각대로 마티에르를 두드려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캔버스, 틀, 붓, 물감, 작가의 행위 등 모든 것의 물질성이나 가능성을 존중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제각기 존재이유를 가지고 화면 위에서 만나게 한다. 그래서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아무 것도 그리지 않은 빈 캔버스를 전시했고, 이우환은 아무 것도 쓰지 않은 종이 전지 그대로를 출품했다. 작가의 생각이나 사상으로 마티에르를 식민화하지 않고 캔버스나 종이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존재하도록 하자는 의미다.

20세기 후반 미셀 푸코의 ‘인간은 죽었다’라는 선언은 인문과학과 예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푸코는 모든 것을 결정하고 만들어 내며 만물의 척도인 ‘인간’의 죽음을 선포했다. 이러한 영향 하에 일본에서는 연극, 음악 등 모든 예술분야에 비판적인 운동이 시도되었고, 미술 쪽의 운동이 바로 모노하(Mono-ha. ‘Monoもの’는 ‘사물’, ‘ha派’는 ‘그룹’을 의미)였다. 1968년 근대주의 및 산업사회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 모노하가 더욱 깊이 있고 세계적일 수 있었던 것은 이우환을 비롯한 외국인들의 도움이 있었다. 이들을 통해 좀 더 적극적으로 외부와의 소통이 추진됐으며, 외부의 시각에 서서 자기중심적·인간 중심적인 비판이 가능했다. 일본에서 늘 타자였던 이우환은 자신의 경험과 철학을 기반으로 모노하 운동의 이론적 배경을 탄탄히 만들어 주었다. 모노하 작가로는 이우환을 비롯한 세키네 노부오, 스가 기시오, 고시미즈 스스모, 요시다 가쓰로 등이 있다. 모노하와 비슷한 운동이 서구 여기저기서 발생되었는데,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가난한, 빈약한’ 미술)’도 그 중 하나다. 2013년 베니스 비엔날레 병행전시로 역사적인 전시가 개최됐는데 바로 아르테 포베라와 모노하를 비교하는 <프리마 마테리아>(Prima Materia·미술관 푼타 델라 도가나, 2013.5~2015.2)였다.

- 지난 4월10일 부산시립미술관의 ‘이우환 공간’ 개관전 오프닝 당시의 이우환 작가.
- 지난 4월10일 부산시립미술관의 ‘이우환 공간’ 개관전 오프닝 당시의 이우환 작가.

이우환, 모노하 운동의 세계화에 기여
모노하 작가들은 ‘인간’이 만든다는 행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한계를 지적하며, 만들지 않은 것과 어떻게 연관 지을 수 있는지 고민한다. 이우환은 모노하의 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노하는 ‘만들어진 것만이 세계라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는다. 너무 많은 것이 만들어져서 포화 상태에 있는 지구를 바라보며, ‘만드는 것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날 것을 촉구한다. 그래서 물건을 덜 가공하거나 덜 만들고, 이를 시간이나 공간과 관련시키며, 이런 방식으로 예술을 다시 생각해 보자며 출발한 것이 ‘모노하’다. 강요된 인간의 개념 작용을 가지고 세계를 객관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을 배운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했을 때 ‘인간화된 신의 죽음’을 의미한 것처럼, 푸코가 ‘인간은 죽었다’고 한 것은 ‘신격화된 인간의 죽음’을 말한다. 이우환은 글을 쓸 때나 자신의 작품을 설명할 때 ‘창조’나 ‘창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이우환과 모노하 작가들은 ‘창조자’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을 다시 제시하는 ‘재제시자’ 들로서 모든 형태의 식민화를 그 근본부터 거부한다.

1.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앞의 <관계항-대화X>(2014.6.17~11.2). 2. 부산시립미술관 ‘이우환 공간’ 전시 풍경. 자연석 하나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다. 3. 일본 나오시마 ‘이우환 미술관’의 <관계항-신호>(2010).
1.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앞의 <관계항-대화X>(2014.6.17~11.2).
2. 부산시립미술관 ‘이우환 공간’ 전시 풍경. 자연석 하나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다. 3. 일본 나오시마 ‘이우환 미술관’의 <관계항-신호>(2010).

 

※ 심은록 감신대 객원교수·미술평론가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철학인문과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후 과정을 밟은 뒤, 2008~11년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에서 초청연구원[CNRS-CEIFR(UMR CNRS 8034)]을 지냈다. 현재 프랑스에서 미술비평가 및 예술 전문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나비 왕자의 새벽 작전—오토니엘의 예술세계(ACC프로젝트, 2011)’, ‘내 머릿속의 섬(그림 장 미셀 오토니엘. 재미마주, 2012)’,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가 10—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특별하게 만드는가?(아트북스, 2013)’, ‘양의의 예술, 이우환과의 대화 그리고 산책(현대문학, 201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