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줬던 오스트리아 뵈르터제(Worthersee) 호수. <사진 : 위키피디아>
수많은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줬던 오스트리아 뵈르터제(Worthersee) 호수. <사진 : 위키피디아>

푸른 하늘 아래 시원하게 펼쳐진 호수 그리고 눈부신 햇살. 누구든 바쁜 일상에서 나와 이 그림 같은 풍경으로 스며든다면 절로 콧노래를 흥얼대지 않을까요. 쌓였던 긴장과 스트레스를 가라앉히고 자연스레 여유를 맞는 이 순간이 예술가들에게도 가장 영감이 샘솟는 시간일 것입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곳은 오스트리아 남부 케른튼 주에 자리 잡고 있는 뵈르터제 호수입니다. 이곳은 아름다운 자연경관 덕분에 예나 지금이나 휴양지로 명성이 높습니다. 푸르른 알프스가 감싸고 있는 에메랄드빛 호수는 수많은 작곡가에게 영감을 선물해줬죠. 특히 19세기 중반부터 당시 예술 후원의 중심이었던 빈 상류층의 여름 휴양지로 이름이 나면서 여러 예술가들이 자연스레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호수가 자리 잡고 있는 이 조용한 시골 마을은 곧 유럽 예술계가 주목하는 중요한 사교의 장이 됐습니다.


브람스 명곡에 영감 준 뵈르터제 호수

1877년 어느 화창한 여름날 뵈르터제 호수를 처음 방문한 요하네스 브람스는 “호수, 숲, 그 위를 어우르는 파란 산등성이 그리고 눈처럼 점점 밝아지는 저 새하얀 빛깔… 이곳이야말로 가장 사랑스러운 곳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곧 그는 이 호수 한쪽에 자리 잡은 휴양지 푀르차(Pörtschach)에 머물며 바이올린 소나타 사장조, 교향곡 제2번, 바이올린 협주곡 라장조 등을 작곡합니다. 이 곡들은 이곳의 고요한 삶을 즐겼던 작곡가의 감성이 담겨 있어 한없이 부드럽고 다정한 성격을 띱니다.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어보면 여러분도 이 호수가 어떠한 감성이 흐르는 곳일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케스트라의 고요한 서두부터 즐거움이 벅차오르는 피날레까지, 그는 이곡을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고 대가의 손길로 품위 있게 풀어냅니다. 이 곡이 노래하는 뵈르터제 호수가 얼마나 따스하고 행복한 곳인지 느껴지시나요? 멜랑콜리한(구슬픈) 선율로 유명한 제1악장의 2주제를 들을 때면 고요한 호수 앞에 서서 본인의 삶을 감사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중년의 브람스가 떠오릅니다.

“뵈르터제 호수는 순결한 곳이다. 누구도 이곳으로 들여보내선 안 된다. 왜냐하면 이곳엔 멜로디가 흐르기 때문이다.”

브람스는 이렇게 말했지만 이곳에 흐르는 멜로디를 귀 기울여 들은 이가 한 명 더 있습니다. 바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입니다.

‘말러’ 하면 거대한 규모의 교향곡 작품들이 떠오릅니다. 1000명이 무대에서 연주한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교향곡 제8번 ‘1000인 교향곡’이 단적인 예죠.

작품 규모를 보면 말러는 호탕하고 패기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지만 사실 그는 내성적이고 괴팍하며 소심하고 또 소음에 극단적으로 민감했다고 합니다. 지휘자로 국제적인 명성을 떨쳤지만 음악 앞에서 타협하지 않았던 그의 독선적인 성격은 주변과 항상 마찰을 빚었습니다. 당시 팽배했던 반유대주의 정서도 유대인인 그를 힘들게 했죠. 그런 그에게 여름철의 뵈르터제 호수는 도시의 소음, 말 많은 빈 사교계의 소용돌이에서 그를 구해주는 탈출구 역할을 했습니다.

말러는 아터 호수 등 다른 오스트리아의 휴양지에서 종종 여름휴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소음에 점점 더 예민해지면서 사람들의 간섭이 없는 깊은 자연의 품 안으로 들어가길 원했고, 결국 1900년 뵈르터제 호수가 있는 마이어닉(Maiernigg) 마을로 가게 됐습니다. 그는 여름마다 이곳에 머물며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고 두 딸을 얻는 등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전해집니다.

1907년 당시 5살이던 첫째 딸 안나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이곳을 도망치듯 떠나기 전까지 그는 뵈르터제 호숫가에서 교향곡 4~8번,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등 주옥같은 곡들을 작곡했습니다.


한 시대 풍미한 작곡가들의 음악 성지

사실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는 그가 죽은 딸을 생각하면서 작곡한 곡이 아니었습니다. 말러는 두 아이를 잃은 아버지의 비통한 심정을 담은, 독일 시인 뤼케르트의 시를 읽고 이 곡을 작곡했는데, 작곡 당시인 1901년만 해도 그는 미혼이었습니다.

이 곡의 초연은 안나가 3살 때인 1905년 말러의 지휘와 바리톤 ‘프리드리히 바이데만’의 독창, 빈 오케스트라의 협연으로 이뤄졌습니다. 2년 뒤 안나는 세상을 떠났고 말러는 자신의 작곡이 딸의 죽음을 불러왔다는 심한 자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곡을 작곡한 장소인 뵈르터제 호수를 도망치듯 서둘러 떠나게 됐죠.

말러의 슬픈 사연이 담겨 있는 뵈르터제 호수는 말러가 떠난 후에도 알반 베르그, 안톤 폰 베베른, 후고 볼프 등 20세기 초 서양 음악사의 한 시대를 풍미한 이들의 사랑을 계속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호수가 선물한 영감으로 탄생한 그들의 곡들은 지금까지도 우리의 사랑을 오롯이 받고 있습니다.


▒ 안종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국립음대 학사·석사, 독일 함부르크 국립 음대 연주학 박사, 2012년 프랑스 파리 롱 티보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 현재 함부르크 국립 음대 기악과 강사


Plus Point

추천음반
고요한 에메랄드빛 호수가 영감 줘 브람스·말러 등 대가의 작품 탄생

요하네스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라장조’
바이올린 :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
지휘 : 조지 셀 |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전설적인 두 거장이 만나 만들어진 이 음반은 지금까지도 명반 중의 명반으로 꼽힌다.


구스타프 말러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바리톤 : 피셔 디스카우 |
지휘 : 카를 뵘 | 베를린 필하모니카

바리톤 피셔 디스카우와 지휘자 카를 뵘의 고전적인 해석이 돋보이는 음반이다. 특히 가사의 단어 하나하나가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디스카우의 섬세한 감성은 그를 단연 독일 가곡의 명장으로 꼽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