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의 가장 가까운 조력자 팻 해캣은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로 워홀의 작업실 ‘팩토리(The Factory)’에서 타이핑 작업을 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더 정확하게는 앤디 워홀의 일기를 대필해주는 일을 했다. 그러니 그는 그 누구보다도 앤디 워홀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워홀의 일기를 편집하거나 그와의 인연을 소개하는 책을 여럿 내기도 한 팻 해캣은 훗날 워홀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예의 바르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일을 ‘시키는’ 적은 거의 없었다. 대신 기대에 찬 어조로 ‘이거 할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물어보곤 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고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지금까지 워홀처럼 감사하다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고, 말 뿐만 아니라 정말로 고마워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죽기 전 나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고마워요’이다.”

예술을 비즈니스로 생각한 이단아(異端兒)로 숱한 염문과 화제를 몰고 다닌 그였지만, ‘팩토리’의 경영자로서 그는 사람을 제대로 쓸 줄 알았던 경영자였던 것이다. 스타 마케팅과 홍보, 획기적인 기획과 전략적 노이즈 마케팅의 대가였지만, 자신의 공장에서 그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의사소통과 인간관계를 누구보다 중요시했다. 업무를 지시하는 상관이기보다는 상대방의 능력을 먼저 인정하고, 기대하며, 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는 파트너로서의 공장장이었다. 이는 곧 직원들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고 ‘팩토리’에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작품들이 잘 팔리고, 공장이 잘 돌아가도록 하는 원동력이 됐다. 오너 혹은 관리자가 본인을 인정하고, 본인에게 기대하고 있다는 느낌은 분명 생산 효율성을 높이는 일이다.


-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작업실 ‘팩토리’는 슈퍼스타 드나드는 아지트
모더니스트 예술가들의 덕목이자 숙명과 같은 ‘고독하고 가난한 예술가’라는 말은 현대 대중문화 현상에서 슈퍼스타를 아티스트라고 지칭하는 순간 전복되고 마는 표현이다. 앤디 워홀은 대중의 심리와 현대 자본주의의 속성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맨해튼 47번지에 있는 모자 공장을 리모델링해 ‘팩토리’를 차렸을 때, 그 곳엔 엘리자베스 테일러,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등이 드나들었다. 그들의 얼굴을 폴라로이드에 담아 실크스크린에 전사(轉寫)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이지만, 완성되는 한 컷을 위한 과정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수십~수백 장 중 한 장의 사진을 고르는 일도 쉽지 않거니와 모델의 이미지와 가장 어울리는 컬러를 찾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앤디 워홀은 보색과도 같은 색이 겹치거나 어긋나면서 마치 매직아이나 3D 화면을 보듯이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그의 작품 속에서는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화면이 연출되어, 대중이 바라보는 가장 완벽한 슈퍼스타의 모습이 드러난다. 슈퍼스타는 대중과 일상을 같이 하면서도 같이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대중의 욕망을 채워주고 돈을 버는 예술가였다. ‘팩토리’를 차린 이후 그는 철저히 사업가로 변모했다. 1960년대 처음 미국의 미술계에 등장한 그는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기계적인 것이다. 기계는 문제가 별로 없다”라는 말로 기존의 예술가들로부터 반감을 샀다. 그를 단번에 미술계의 이단아로 만든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가 추구한 기계적인 것은 상업적인 대중성과 맞물려 그를 스타 아티스트로 만들어 갔다.


- 앤디 워홀

미술 작품 외에도 잡지, TV 쇼 등 새로운 것에 도전
코카콜라는 상류층도 빈민들도 즐겨먹는 음료이다. 앤디 워홀 하면 떠오르는 캠벨수프 캔 역시 마찬가지다. 마릴린 먼로에 대한 대중의 동경도 그렇다. 그가 만드는 미술품은 반복적이며, 대량 생산되는 복제품들이므로, 태생적으로 상류층만의 전유물이 될 수가 없다. 미술품을 가장 대중적이고도 상업적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동시에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잘 이용한 사업 모델이었다. 대중이 동경하거나 혹은 그들도 누릴 수 있는 것 사이의 교묘한 행보는 그가 만든 영화를 통해서도 드러났다.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영화와는 달리 저예산 영화이며, 전위적(前衛的)이지만, 언제나 대중에게 화제거리를 제공했다. 종종 유명인들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매춘부와 부랑아, 배우 지망생 등이 출연해 일약 스타덤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팩토리’는 슈퍼스타 제작소이기도 했던 것이다. <오럴 섹스>, <키스> 등의 영화에 출연했던 이름 없던 친구들이 앤디 워홀에 의해 포르노스타가 되어 장차 미국의 포르노산업에 기여했다고 평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1969년에는 잡지 <인터뷰>를 창간했으며, 1980년대엔 그의 이름을 내 건 TV 쇼 <앤디 워홀 TV>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과 실험적인 시도를 했고 이는 계속해서 대중들의 시선을 끌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1987년 앤디 워홀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 그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따르고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삶은 대중을 향해 일관된 방향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팝아트를 상징하는 가장 대중적인 예술가로 앤디 워홀을 주저 없이 떠올리는 이유가 아닐까.   

 

하진욱 미술전문해설사 
동아대학교에서 철학과 예술학을 전공하고 현재 동아대학교 미술학과와 문화예술대학원에서 미학, 예술론, 문화정책 등을 강의하고 있다. ‘미술 해설이 있는 음악회’ 등 여러 공연을 기획하고 출연한 바 있으며, 공공 기관 및 기업 특강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7년 문화예술교육 부문 문화부 장관 표창을 받은 바 있다.

하진욱 미술전문해설사 / 사진 :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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