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째 세계에서 가장 비싼 서구 작가는 장 미셀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이며, 동양에서는 쩡판즈(曾梵志, 1964~)이다(1945년 이후 출신 작가 대상, 아트프라이스 통계). 이 두 작가는 그림 스타일, 문화적·정치적 배경, 피부 색깔 등 모든 것이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면, 두 작가 모두 잔인한 ‘왕따’의 대상이었으며 이는 그들의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이 경우 ‘예술가는 고독해야 성공한다’라는 격언을 떠올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왕따’는 ‘고독’의 수준을 넘어 범죄와 같기 때문이다.

- 쩡판즈가 예술적 영감을 많이 얻는 베이징 아틀리에의 정원.
- 사진 제공: 심은록


수년째 세계에서 가장 비싼 서구 작가는 장 미셀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이며, 동양에서는 쩡판즈(曾梵志, 1964~)이다(1945년 이후 출신 작가 대상, 아트프라이스 통계). 이 두 작가는 그림 스타일, 문화적·정치적 배경, 피부 색깔 등 모든 것이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면, 두 작가 모두 잔인한  ‘왕따’의 대상이었으며 이는 그들의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이 경우 ‘예술가는 고독해야 성공한다’라는 격언을 떠올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왕따’는 ‘고독’의 수준을 넘어 범죄와 같기 때문이다.

바스키아는 백인 중심 사회였던 미국에서 자라며 흑인으로서 차별받았다. 그는 자신이 유명해지면 이러한 차별도 사라지리라 여기고 최선을 다했다. 마침내 그는 앤디 워홀을 비롯한 저명한 백인 인사들과 막역한 사이가 될 정도로 유명해졌지만, 그의 피부는 여전히 검은색이었다. 쩡판즈는 중국의 문화혁명이 절정에 이를 때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의 담임선생님은 단지 쩡판즈의 눈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그를 미워하고 불순분자 취급을 했다. 당시 마오쩌둥에 대한 충성심의 상징인 붉은 스카프는 자부심과 긍지의 원천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붉은 스카프를 받지 못한 사람은 쩡판즈 혼자였다.

이전의 미국은 백인 우위 사회라고 할지라도 그나마 민주주의 국가였기에, 바스키아는 내부에서 뛰쳐나와 헤맬 수 있는 바깥의 세계가 있었다. 하지만 쩡판즈의 경우에는 뛰쳐나갈 외부조차도 없었다. 동양의 공동체 전통에 공산주의의 집단주의 체제가 맞물려 당시 중국에는 공산당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내부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공동체주의는 개인주의보다 훨씬 더 위협적이다. 쩡판즈만이 아니라, 당시 불온 사상가로 낙인이 찍혔던 모든 사람들은 ‘외부가 없는 세계의 외부인’이었기에, 물리적인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신적인 죽음의 상태를 겪어야 했다.

왕따 트라우마 미술 통해 극복
바스키아와 쩡판즈가 겪은 차별과 소외감의 고통은 이후 그들의 작품에 그대로 반영된다. 검은 피카소인 바스키아는 결국 불행하게 요절했으나, 다행히도 쩡판즈는 그의 트라우마를 미술을 통해 꾸준히 치유하는 듯하다. 쩡판즈가 그의 예술에서 어떻게 ‘왕따’의 고통을 표현하고, 이를 극복하고 예술로 승화시키는지 살펴보자.

문화혁명이 끝나고, 쩡판즈는 그림 안에서 자신이 설 수 있는 외부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 나갔다. 1990년대 초반 그는 시뻘건 날고기 덩어리와 사람들의 벗은 몸이 구분되지 않는 표현주의 스타일이 농후한 <고기> 연작을 했다. 그의 고향 우한(武漢)에서 <고기> 연작들이 전시되자 충격적인 이미지에 놀란 일부 관람객들은 전시 중단을 요구했다.

대도시 베이징에서는 좀 더 인정받고 예술적 교감을 나눌 수 있으리라 믿고, 1993년 그는 고향을 떠나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러나 20세기의 급변하는 중국 역사의 치열한 현장이자 급속한 경제성장의 심장이었던 베이징에서 그는 부조리와 이질감, 가식과 고독을 느꼈다. 참된 인간 교류가 어려운 시대의 혼란과 고통을 작품에 표현됐고, 그렇게 그의 <가면> 연작이 탄생됐다. 이 연작에는 쩡판즈가 어렸을 때 소유하지 못했던 붉은 스카프가 자주 등장하고, 무표정한 가면 위로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는 <가면> 연작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2000년 초, 그는 과감히 <가면>을 벗어 던지고 <난필> 연작과 <풍경> 연작을 시작했다. 잘나가는 작품 스타일을 바꾼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컬렉터, 갤러리스트, 미술 비평가들은 <가면> 연작을 계속할 것을 설득했지만 그는 되돌아가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의 <풍경> 연작은 그를 진정한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로 올려놓았다. 물론 여기에는 쩡판즈가 속해 있는 가고시안 갤러리, 세계적인 중요 컬렉터인 프랑소아 피노, 세계 1위의 중국미술시장 등의 도움이 지대했다.




- 1. 홍콩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병원> 연작 앞에 선 쩡판즈.
- 2. 쩡판즈가 베이징 아틀리에에서 필자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뒤의 그림은 베니스의 푼타 델라 도가나 미술관에 전시하기 위해 작업 중인 작품이다.
- 사진 제공: 심은록



<가면>에 이은 연작 시리즈 연이어 흥행
쩡판즈의 초대전이 2011년은 홍콩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2012년은 영국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개최되었다. 베니스의 피노 미술관인 푼타 델라 도가나에서 쩡판즈의 풍경화가 전시(2013년 5월~2014년 12월)되고 있다. 이 기간에 파리 시립 현대 미술관에서 쩡판즈의 회고전(2013년 10월~2014년 2월)이 있었다.

이번에는 세계적인 미술관인 루브르가 그를 초청했다(2014년 10월22일~11월17일). 루브르 미술관에는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이와 똑같은 크기의 쩡판즈의 풍경화 ‘1830년부터 지금까지, No.4’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쩡판즈는 의도적으로 들라크루아의 ‘자유의 여신’을 그려 넣었으나, 전혀 다른 느낌이다. 우선 쩡판즈의 여신이 오른손에 높이 들고 있는 깃발은 들라크루아의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과 같은 형태이지만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가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백기’이다. 또한 들라크루아 여신의 왼손에 들린 창은 쩡판즈의 그림에서는 하단부는 창처럼 보이지만, 상단부로 가면서는 화면에 수없이 난무하는 나뭇가지의 하나를 잡고 있는 것 같다. 들라크루아의 여신은 금방이라도 튀어 나와 다시 한 번 자유를 소생시킬 듯하지만, 쩡판즈의 창백한 여신은 이미 화석화된 전설이 된 듯 조각 받침대 위에 굳어있다.

서구적 자유와 이성의 힘을 추구했던 1830년(들라크루아가 위의 작품을 그린 해)은 이미 까마득한 오래 전이다. 프랑스 혁명은 종결되었지만, 화면 전체에 나뭇가지 같기도, 줄 같기도, 균열 같기도 혹은 번개 같기도 한 정체불명의 검고, 파랗고, 빨갛고, 노란 선들은 그 강한 힘으로 여전히 캔버스를 부셔버릴 듯 요동친다.

쩡판즈의 풍경화는 중국의 정신과 전통을 서구적인 마티에르(matiere: 재질감)로 표현하며, 죽음의 정적에서부터 폭발적인 희열까지의 극단적인 감성이 폭넓게 전개된다. 그의 그림에서는 수천 년 된 미스터리한 강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서구 미술업계 관계자들이 중국현대미술에 매료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무리 분석해도 알 수 없는 바로 이 잠재된 역동적 에너지에 있다.






심은록 미술 평론가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철학인문과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후 과정을 밟은 뒤, 2008~2011년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에서 초청연구원[CNRS-CEIFR(UMR CNRS 8034)]을 지냈다. 현재 프랑스에서 미술비평가 및 예술 전문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나비 왕자의 새벽 작전—오토니엘의 예술세계(ACC프로젝트, 2011)’, ‘내 머리 속의 섬(그림 장 미셀 오토니엘. 재미마주, 2012)’,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가 10—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특별하게 만드는가?(아트북스, 2013)’, ‘양의의 예술, 이우환과의 대화 그리고 산책(현대문학, 2014)’ 등이 있다.

심은록 / 사진 : 심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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