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도 초상화
윤선도 초상화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로 유명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남인(南人)의 거두로서 노론(老論)의 우암 송시열에게 맞섰던 정치가이기도 했다.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격 때문에 세 번에 걸쳐 무려 14년 7개월간이나 귀양살이를 했지만 85세까지 장수한 불굴의 화신이었다. 그것도 마지막 유배는 74세에서 81세까지의 노구에 최북방의 추운 곳인 함경남도 삼수(三水)에서 주로 보냈지만 잘 극복해 내고 여생을 보길도(甫吉島)에서 마쳤다.

고산의 장수비결을 다른 선비들과 비교해 보면 강한 정신력은 같았다. 하지만 집안이 전라도에서 16세기부터 대단한 부잣집이었기에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 최상급의 음식과 약으로 건강관리를 할 수 있었던 점은 차이가 있다.

첫 번째 장수비결은 적선(積善), 즉 기부를 많이 한 것을 꼽아야 할 것 같다. 고산의 고택인 ‘녹우당(綠雨堂)’은 인근에서 관용과 적선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으니, 이 집안에는 ‘삼개옥문 적선지가(三開獄門 積善之家)’라는 말이 전해온다.

‘세 번이나 옥문을 열어준 적선의 집’이라는 뜻이다. 가난해서 세금을 내지 못한 지역민들이 감옥에 갇힐 때마다 고산의 고조부가 세금을 대신 내고 세 번이나 꺼내줬다는 일화에서 나온 것이다. 해남 윤씨 가문에서 적선은 가훈의 핵심덕목이라 할 수 있다. 기부를 하는 사람은 마음이 넓고 편안해져 건강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고산의 집안 여건이 건강에 걸림돌이 된 적도 있었다. 고산은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으나 8세에 큰집에 양자로 들어가 종손이 되었는데, 그 역할이 막중해 심리적 부담감이 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22세에 양모를, 23세에 생모를 여의는 슬픔을 겪었다. 26세에는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했지만 생부의 건강이 위중해져 간병을 했는데,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다. 20대의 대부분을 상복을 입고 지낸 셈이니 상당히 힘들었다고 봐야겠다.

노년에 힘든 곳에서 오랜 기간 귀양살이를 하고도 멀쩡하게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비결에는 고산이 뛰어난 한의사였다는 것이 크게 작용했지 않나 싶다. 인조, 효종, 현종 때 중궁전과 대비전의 의약을 위해 고산을 불러들인 것을 보면 그가 대단한 의술을 가졌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치열하게 당파싸움을 벌였던 정적인 원두표가 중병으로 위독해져 죽을 지경에 이른 것을 낫게 해 준 적도 있다.


고산 윤선도의 고택인 ‘녹우당’ 입구에는 5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그 뒤편으로 울창하게 비자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사진 : 조선일보 DB>
고산 윤선도의 고택인 ‘녹우당’ 입구에는 5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그 뒤편으로 울창하게 비자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사진 : 조선일보 DB>

부모 질병 치료하려 익힌 탁월한 의술

고산은 임진왜란 중에 산속의 절에 들어가 거의 독학으로 공부했다. 유학 외에도 역사, 역학, 산수, 풍수, 지리, 복서, 의약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했다. 특히 한의학 공부를 많이 하게 된 것은 연유가 있다.

공조참의라는 벼슬을 사직하려고 올린 글에 보면 부모의 질병을 치료하려고 한의학을 연구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것은 송나라의 유학자였던 정이천의 “어버이를 섬기는 자는 또한 의술을 알아야 한다”는 말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집안 분위기도 그랬다. 해남 윤씨 가문은 항상 약장을 비치해 놓고 살았을 정도로 의약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고산이 집안에서 약포(藥鋪)를 직접 운영해 인근에 사는 병든 사람들을 구했다는 기록과 약화제(藥和劑) 등이 남아 있다.

고산은 일생토록 자연을 노래하는 시를 쓰고 음악과 더불어 지냈기에 귀양살이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건강을 유지하며 장수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다.

그의 시조를 보면 자연 속에서 안락과 평화를 느꼈던 것으로 생각되고 정치무대에서의 비인간적인 투쟁과 욕망 등으로부터 해방된 속 시원함을 즐겼을 것으로 보인다.

고산은 음악을 사랑했고 조예가 깊었던 풍류인이었다. 그것도 음악 감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작곡과 거문고 연주도 했다. 그에게 음악은 마음을 다스리는 도구였던 것이니, ‘시가무합일(詩歌舞合一)’이라는 동양의 예악사상이 반영돼 있었다. 시와 노래와 춤은 모두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닦고 시정을 더욱 깊고 오묘하게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음악을 즐기는 이유를 “음악이 기쁨을 돕는 소용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음악으로부터 평화롭고 장엄하며 너그럽고 치밀하며 치우치지 아니하고 바른 뜻을 추구하고 있다”고 했다. 음악을 생활화했다는 것은 참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노인 건강에 중요한 건강식 ‘비자’

고산의 집안은 대단한 부호였으니 당연히 좋은 음식도 많았을 것이고 게다가 뛰어난 한의사였으니 최고의 보양식을 먹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건강음식은 녹우당 뒤에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 비자나무 숲에 저절로 떨어져 있는 열매를 이용해서 만든 ‘비자강정’이다.

비자(榧子)는 남해안과 제주도가 산지인데, 열매가 한약재로 쓰여 왔다. 열매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중간 성질로 살충 효능이 있어 회충으로 인한 복통에 특효약이다. 옛날에는 각종 기생충이 많아 문제가 됐었는데, 이 집안사람들은 비자로 만든 음식을 늘 먹어서 기생충으로 인한 장애가 적었다. 다른 지방에서는 매실, 은행, 살구, 유근피, 마늘, 고추, 생강, 산초 등으로 살충효과를 거뒀다.

비자 열매는 폐와 대장 경락으로 들어가 작용하는데 응어리를 삭여주며 건조한 것을 윤택하게 하는 효능이 있다. 건조한 기침, 변비, 치질 등의 치료에 사용돼 왔다. 그러니 노인의 건강관리에 중요한 음식이 된다. 비자를 대신할 약이 되는 음식으로는 살구, 호두, 잣 등이 있는데, 모두 노화 억제 효과도 크다.


▒ 정지천
동국대 한의과대학 졸업, 한의학박사, 동국대 한의대 한방내과 교수, 서울 동국한방병원 병원장, 서울 강남한방병원 병원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