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일 시민들이 가을 낙엽이 떨어진 서울 덕수궁 돌담길을 걷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11월 2일 시민들이 가을 낙엽이 떨어진 서울 덕수궁 돌담길을 걷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가을이 끝나간다. 여자는 봄을 타고 남자는 가을을 탄다는데, 나는 이 계절만 되면 늘 멜랑콜리해진다. 사춘기부터 시작해서 오십이 넘은 이 나이까지도 그런다. 이번에는 유난히도 가을을 심하게 탄다. 떨어지는 낙엽에 마음이 허전해지고 파란 하늘을 보면 눈물이 핑 돈다.

중년의 나이에 이런 감성이 사치스러운 것일까. 십 년 전쯤은 가을이 오는지 가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일에 치이고 사는 게 바빴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아! 내가 가을을 잊고 살고 있구나!’ 내 감성이 메말랐다는 생각이 뒤따랐다. 그러다가 어느 해부터 다시 가을이 내게 왔고 역시나 가을을 심하게 탔다.

왜 남자가 가을을 탈까? 호르몬 영향이라는 설이 제일 많다. 일조량 부족으로 세로토닌이나 멜라토닌이 감소하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남성호르몬의 변화가 원인이라고도 한다. 한편으로 심리적인 이유를 들기도 한다. 성공 지향적인 남자들이 결실의 계절에 자기가 이룬 결과에 대해 성취 여부를 떠나 왠지 허망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가장 와닿는 주장은 ‘바이오리듬’ 이론이다.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마다 생체 주기가 있듯이 가을 타는 현상은 사계절의 바이오리듬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상승의 기운인 봄에는 여자의 바이오리듬이 살아나고 하강의 기운이 시작되는 가을에는 남자의 바이오리듬이 민감해지는 것이다.

심리적으로 보면 가을을 타는 것도 두 가지 성향이 있다. 하나는 긍정적이고 하나는 부정적이다. 긍정적인 측면은 감성이 살아나는 것으로 나타난다. 소위 ‘센티멘털’해진다. 평범한 삶과 세상을 새로운 감각으로 다시 보게 된다. 자연을 새롭게 느끼고 사람을 정 깊게 만나고 내 삶을 돌아본다. 때로 훌쩍 여행을 떠나는 일탈의 자유도 누리고 못 만났던 오랜 친구를 만나기도 한다. 가을을 타는 건 새로운 나를 만나고 나를 정화시키는 긍정적인 시간이 될 수 있다.


감성 살아나거나 무기력해져

하지만 때로는 가을 남자가 위험할 수 있다. 부정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감성에 깊이 빠지다 슬픔으로 가라앉게 된다. 소위 ‘멜랑콜리’ 스타일이다. 기분이 가라앉고 작은 일에 슬퍼진다. 생활이 심드렁해지고 인생이 허망하게 느껴진다. 이 상태에서 더 가라앉으면 우울증으로 들어간다.

우울증이 신체 통증처럼 명확하게 나타나면 좋으련만 그러질 않는다. 우울증은 피곤함이나 피로같이 슬며시 온다. 피곤하다고 내과를 찾지는 않듯이 가을을 심하게 탄다고 정신과를 찾지 않는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무기력 상태가 오래가고 괜히 슬퍼진다면 우울증이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거기에 일상적으로 하던 일이 버겁게 느껴지고 직장도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마저 든다면 더욱 주의해야 한다.

가을 남자 중에 가을에서 시작해서 봄까지 반년 이상을 경미한 우울증 상태로 지내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가을 남자라고 분위기 잡을 게 아니라 심리적인 도움을 청해야 한다. 안타까운 일은 정신과 문턱이 너무 높다는 것이다. 심하게 가을 탄다고 정신과 진료실을 찾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신과 문턱이 약국 문턱처럼 쉽게 넘는 시절이 왔으면 좋겠다.


▒ 윤우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밝은마음병원 원장, ‘엄마 심리 수업’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