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게 썬 듀록(밤을 먹여 키운 돼지)에 참치 소스를 가미한‘듀록등심’.
얇게 썬 듀록(밤을 먹여 키운 돼지)에 참치 소스를 가미한‘듀록등심’.

애니메이션 ‘라따뚜이’의 부주방장처럼 푸근하게 생긴 서버가 접시를 내려놓는다. 손이 복스럽게 두툼하다. 슬쩍 눈을 마주쳤다. 그는 서버라기보다 ‘셰프’스러웠다. 접시 위의 묵직한 철판으로 시선을 고쳐 잡더니 낮은 톤으로 읊조린다. “시칠리안 라이스볼과 대구튀김입니다.”

아란치니를 받치고 있는 비트 소스의 색이 선정적이다. 화장품 연구원들이 루즈 색깔로 개발했더라면 남자 여럿 울렸겠다 싶을 만큼 육감적이다. 노릇하게 튀겨진 아란치니를 반으로 갈라 입에 넣는다. 조심스레 깨물자 튀김옷의 바삭거림이 귀로 전해진다. 혀 위로 쏟아진 밥알들을 조심스레 비벼본다. 진득한 소스에 코팅돼 있다. 나머지 반쪽은 비트 소스를 듬뿍 묻혀 입에 넣었다. 은근한 산미가 아란치니를 품는다. 여태 먹어본 아란치니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이런 흐뭇한 일이 다 있나! 입꼬리가 스르르 올라간다. 이탈리아 음식점 ‘서촌김씨’의 오너인 김도형 셰프에게 꼬치꼬치 캐물었다. “원칙을 지킵니다. 시간 아끼려고 잔머리 쓰지 않고 원래 레시피 그대로 진정한 음식을 만들려고 애쓸 뿐입니다.”

이런 재미없는 친구 같으니라구! 뭔가 대단한 노하우가 있을 거란 기대가 산산이 깨져버렸다. 쌀을 볶으면서 샤프란으로 색을 입히고, 정통 리소토를 만든단다. 여기에 8시간에 걸쳐 만든 라구 소스와 치즈를 곁들여 모양을 잡고 튀김옷을 입혀 튀겨낼 뿐이라니…. 기본이 맞다. 허나 이리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수고스러움과 디테일이 감동을 자아내기 마련이다. 수다가 길었다. 자칫 감흥이 길어지면 동행한 바칼라(소금에 절여 말린 대구)의 열기가 식을 가능성이 높다. 오래된 그들의 전통 식재료다. 새끼손가락만한, 튀김 안에 든 요녀석 때문에 인간은 여러 차례 전쟁을 치러야 했다. 반사적으로 향을 맡고 입에 넣었다. 생선요리는 식감도 식감이지만 향으로 먹는다. 어금니에 옮기고 슬쩍 깨무는데 겉옷이 찢어지며 대서양의 향취를 뿜어낸다. 이 작은 덩어리에서도 대구의 풍미가 느껴지는구나. 간이 아주 잘 맞는다. 간은 음식의 기본이자 완성이다. 그래서 간 하나만으로도 요리를 평가하기에 충분하다. 셰프도 동의하는 모양이다. “요리는 신선한 식재료와 간이에요. 그 이상도 이하도 없습니다.”


“신선한 식재료와 간이 중요해”

김도형 셰프는 사회학과 출신이다. 얼마나 요리가 좋았으면 대학시절 사회학과 학생의 가방에 칼이 들어있었겠는가! 한식 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할 만큼 요리에 미친 그였지만 삼성그룹 공채 합격을 거부할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았다. 삼성카드에서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며 2년여를 보냈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은 꼭 해야겠다 싶어 그 번듯한 직장을 때려치우고 2달 만에 겁 없이 레스토랑을 오픈했다.

그 뒤의 이야기는 대부분 초보 사업자처럼 처량하기만 하다. 두발 빨랐던 콘셉트는 대중에게 먹히지 않았다. 그래서 제대로 공부하기로 결심한 뒤 ‘일 쿠오코 알마(이탈리아요리 전문학원)’를 수료한다. 물론 레스토랑 영업은 병행했다. 쓰러질 만큼 피곤함의 연속이었지만 강철이 단련되듯 그렇게 단단해졌다. 하지만 비즈니스는 달랐다. 단련이 된다고 고객이 찾아주는 건 아니었다. 3년을 버틴 가게를 접고 나니 남은 건 빚뿐. 6개월간 이를 악물고 칼을 갈았다.

청담동에 ‘그리시니’라는 레스토랑이 오픈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무작정 찾아갔다. 꽤 이름이 알려진 외국인 셰프에게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판단에서였다.

6개월 만에 급여가 2배로 뛸 정도로 기염을 토했다. 오너는 김도형의 실력을 믿고 수석 셰프의 자리에 그를 앉혔다. 이후 그의 행보는 무서울 정도다. 수없이 많은 레스토랑을 오픈하고 컨설팅해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결국 CJ에서 개발팀장까지 지내며 그만의 성을 쌓아나갔다. 그러나 몸이 근질근질했다. 회사가 원하는 요리에 치중하다보니 칼이 무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울타리를 벗어나 날개를 펴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곳이 바로 ‘서촌김씨’다. 다들 한식집인 줄 안다. ‘서촌’도 한국적인데 거기에 ‘김씨’까지 붙여 놨으니….


듀록등심, 참치소스, 케이퍼, 허브

세 번째 접시가 테이블에 오른다. 5월의 꽃밭처럼 애교스럽다. 얇게 썬 핑크빛 듀록(밤을 먹여 키운 돼지) 밑을 짙은 상아 빛의 참치 소스가 두툼하게 받치고 있다. 위에서 바라보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눈높이를 낮춰 보면 훨씬 더 근사하다. 마치 숲 속을 걷는 것처럼 입체적이고 깊이가 있다. 슬라이스한 고기 한 점에 소스를 잔뜩 묻혔다. 녹진한 점도 덕분에 케이퍼가 따라 붙는다. 눈이 스르르 감긴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눈이 한껏 커지고 더 맛있는 음식을 입에 넣으면 눈이 감긴다. 씹을수록 풍미가 살아난다. 어라? 바스락거리는 녀석이 있다. 뭐지? 튀긴 케이퍼는 처음이다. 보통은 절임 상태로 즐기는 식재료다. 이걸 튀기다니! 매칭이 신선하다. 눈여겨보지 않았던 참치 소스가 마지막에 고개를 빼꼼 내민다. 목 넘김을 수월하게 만드는 일등공신이다. 목으로 넘기자마자 참치의 향이 은은하게 퍼진다.

이번에는 라비올리(이탈리아식 만두)다. 엉덩이를 의자 깊숙이 밀어 넣었다. 좀 더 식탐을 부려보겠다는 굳은 의지다. 탈레지오 치즈는 향이 강하고 진하다. 이베리코 라구도 묵직하기는 마찬가지다. 미들급 둘이 만났으니 자칫 헤비해질 수 있다. 이걸 막기 위해 경쾌한 산미를 가진 시트러스 퓨레로 플레이트에 밑그림을 그렸다.

아주 짧은 탐색전을 마치고 나이프를 들었다. 어디부터 공략할까.

스테이크의 핵심은 크러스트다. 얼마나 시어링이 잘 됐느냐에 따라 바삭하면서도 복잡 미묘한 맛을 만들어 낸다. 그리하여 가장자리부터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포크로 살짝 지지하고 날이 선 나이프로 썰어 내린다. 표면의 질감이 손끝에 느껴진다. 입으로 쑥 들어온 녀석이 요동을 친다. 깨물면 깨물수록 바사삭 소리가 귀에 전달된다. 오호라! 혹자는 그릴에서 구운 스테이크가 제 길이라지만 내 판단의 기준은 시어링이다. 얼마나 바삭하게 구워졌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기술점수 예술점수 모두 다 주고 싶다. 마늘 향이 은은하게 오르는 퓨레도 만족스럽다. 무장해제가 되고 말았다.


▒ 김유진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MBC 프로덕션 예능제작국 PD, 주요 저서 <장사의 신>


Recommends Menu

1 서촌김씨 점심 코스 아란치니, 바칼라, 가프레제, 듀록등심, 라비올리, 채끝등심 스테이크를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대표 메뉴 5만9000원

2 채끝 등심 스테이크 바삭한 크러스트가 인상적인 수비드 등심 4만8000원

3 서촌술국 바지락, 홍합, 보리, 조개육수, 바질페스토로 만든 술국 2만2000원

4 바칼라 튀김 염장대구를 튀겨 만든 요리 1만2000원

주소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 16길 4
전화번호 02-730-77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