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급자 코스까지 꽉 찬 슬로프, 인공설(雪)의 딱딱한 질감에 지친다. 해외 리조트로 나가 보지만 곧 싫증나긴 마찬가지. 하지만 산 정상에서 시작되는 천연 슬로프,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활강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당신이 헬리 스키에 주목해야 할 이유다.

마치 제임스 본드처럼

젓지 않고 흔들어 만든 마티니를 마시며 금발 미녀와 침대에서 뒹굴면서도 느긋하게 사건을 해결하던 007은 아무리 급해도 전력으로 달리지 않았다. 대신 그의 곁엔 언제나 근사한 탈 것이 있었다.

스포츠카, 자가용 제트기, 제트 스키 등…. 당대의 첨단 기술을 집약한 듯 끝내주는 ‘머신’들을 모두 섭렵한 제임스 본드가 이들만큼이나 자주 타던 것이 있으니 바로 스키다.

피어스 브로스넌이 제임스 본드로 등장한 1999년작 <007 월드 이즈 낫 이너프>는 시리즈 역사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스키 장면 중 하나가 나온다. 프랑스 동부의 산악 도시 샤모니(Chamonix)를 배경으로 피어스 브로스넌과 소피 마르소가 스키를 신은 채 헬기에서 뛰어 내려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깨끗한 눈 위를 DNA 이중 나선처럼 우아하게 교차하며 시원스럽게 활강하는 모습이다.

‘헬리 스키.’ 헬리콥터를 타고 산에 올라, 아무도 없는 설원 위에 자신만의 궤적을 남기며 스키를 타는 환상적인 경험을 일컫는 말이다. 리프트를 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릴 필요도 없이 헬리콥터로 몇 분만 올라가면 산 정상에 도착한다. 그리고 스키장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길고 변화무쌍한 코스를 지칠 때까지 마음껏 탈 수 있다. 스노보드로도 가능하다.


천연 슬로프를 즐겨라

헬리 스키의 역사는 1960년대 중반, 오스트리아 출신의 산악가 한스 모저(Hans Moser)가 캐나다 서부 록키 산맥을 찾은 여행자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 헬리콥터로 산 정상에 올라 스키를 타고 내려올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을 구상하며 시작되었다. 보통 4~5년 이상 스키를 꾸준하게 탄 중상급자 이상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헬리 스키를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산악 스키는 잘 다져진 평평한 슬로프에서의 스키와는 분명히 다르다. 파우더리한 눈은 부드럽지만 그 강도를 예측하기 어렵고, 지형은 변화무쌍하며 도처에 존재하는 장애물에 표시가 되어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눈 덮인 나무에 너무 가까이 가면 주위에 움푹하게 파인 나무 우물(Tree well)에 거꾸로 처박힐 수도 있고, 산사태는 자칫 조난 상황에까지 이를 수 있는 헬리 스키의 가장 큰 위험요인이다. 언제 어디서 위험이 다가올지 모르는 헬리 스키의 특성상 그 지역을 잘 알고 인솔 경험이 많은 가이드의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능숙한 가이드라면 날씨와 스키어의 수준에 따라 꼭 맞는 코스를 제안할 수도 있다.


북미가 최상, 가까운 일본에서도 가능

문명과 떨어진 깊은 산속에 지어진 가건물과 헬기 하나가 전부였던 한스 모저의 회사, 캐나디언 마운틴 홀리데이(CMH)는 빠르게 성장해 50년이 지난 지금, 캐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 지역에 12개의 롯지(Lodge)를 소유한 세계 최대의 헬리 스키 업체가 되었다.

미국 알래스카의 추가치(Chugach) 국립공원은 가장 최근 헬리 스키를 위해 개발된 지역이다. 연중 지속되는 엄청난 강설량으로 3000㎢가 넘는 방대한 설원을 가득 채우는, 가장 이상적인 헬리 스키 여행지라 할 만하다. 캐터필러가 달린 스노캣(Sno-Cat) 차량으로 헬기가 뜰 수 없는 악천후에도 스키를 즐길 수 있다.

물론 전 세계 헬리 스키 액티비티의 80% 이상이 이뤄지는 북미 이외의 여러 지역에서도 헬리 스키를 즐길 수 있다. 산사태나 지형의 변화, 장애물 등은 경험 많은 가이드의 도움으로 피할 수 있지만, 날씨는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변수다. 대부분의 헬리 스키 업체는 악천후로 헬리콥터가 뜨지 못할 경우 환불 정책을 마련해 놓고 있지만 값비싼 항공료와 날아가버린 휴가 일정은 보상받을 수 없다. 이럴 땐 아무래도 가까운 곳일수록 부담이 덜하다. 일본 북부 홋카이도에도 헬리 스키를 즐길 수 있는 지역이 있다. 스키 리조트와 결합된 형태라 북미 지역에서처럼 깊은 산속 외딴 롯지에서 몇 날 며칠 헬리 스키만 즐길 수는 없더라도, 헬리 스키를 타지 못할 만약의 경우 슬로프에서 스키를 즐기거나, 근처 도시에서 쇼핑과 관광을 즐길 수 있다. 뉴질랜드 퀸즈타운 근처 여러 스키 리조트에서도 비교적 완만한 수준의 헬리 스키 액티비티를 제공한다. 인도와 러시아, 히말라야 산맥이 위치한 네팔, 칠레와 아르헨티나 등에서도 헬리 스키가 행해지고,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지만 헬리 스키 초심자를 위한 코스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