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욱 고은법률사무소 변호사 연세대 경영학·법학, 베이징대 법학 박사, 사법시험 43회, 사법연수원 33기, 전 법무법인 율촌 상하이 대표처 대표
허욱
고은법률사무소 변호사 연세대 경영학·법학, 베이징대 법학 박사, 사법시험 43회, 사법연수원 33기, 전 법무법인 율촌 상하이 대표처 대표

청나라 말, 복잡하기 그지없는 시장통에 도자기를 든 남자가 나타난다. 남자의 두 눈은 바쁘게 주변을 살핀다. 그때 정면의 교차로에 지체 높아 보이는 마차가 지나간다. 걸음을 재촉한 남자는 마차에 슬쩍 자신의 몸을 부딪치면서 들고 있던 도자기를 떨어뜨린다. 산산이 조각난 도자기는 사실 가짜였지만, 남자와 한 패거리인 바람잡이들이 몰려와 “비싼 도자기가 깨졌다”며 분위기를 돋운다. 갑작스레 발생한 문제를 키우고 싶지 않은 마차 주인은 서둘러 가짜 도자기에 비싼 값을 치르고 현장을 떠난다.

‘팽자(碰瓷)’라는 말의 유래다. 팽자는 직역하면 ‘도자기를 부딪친다’는 말인데, 이런 유래로 ‘자해공갈’이라는 의미로 쓰이게 됐다. 현대의 자해공갈이 보험사를 상대로 하면 보험 사기가 된다.

2020년 9월 22일 최고인민법원·최고인민검찰원·공안부는 ‘팽자 위법범죄사건의 의법 처리에 관한 지도의견(關於依法辦理‘碰瓷’違法犯罪案件的指導意見)’을 반포했다. 지도의견에 따르면 팽자는 ‘행위자가 고의로 피해를 당했다는 거짓 형상을 만들어 기망·공갈 등의 방법으로 위법하게 재물을 요구·획득하는 행위’를 뜻한다.

중국 판례에 나타난 팽자 사례를 보면, 음주 운전한 차를 고의로 들이받은 뒤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겁박하며 거액을 요구하고, 더 나아가 합의금 마련을 도와주는 척하며 고리의 사채를 쓰게 하고, 그 돈을 돌려달라며 집 앞에서 협박하는 식이다. 지도의견은 이렇게 팽자로 허위 형상을 만들어 진상을 숨기고 배상을 받아내면 형법상 사기죄로 처벌하고, 보험금을 편취하면 보험 사기죄로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지도의견은 팽자의 방법으로 ‘연폭력(軟暴力)’을 제시하고 있다. 연폭력은 ‘부드러운 폭력’이란 의미다. 즉 경미한 폭력을 행사하거나, 사람을 에워싸거나, 저지·미행하거나, 소란을 피우거나, 치근대거나, 모여서 위세를 과시하거나, 재물을 빼앗는 등의 행위를 말한다. 일찍이 최고인민법원·최고인민검찰원·공안부·사법부가 공동 반포한 ‘연폭력 형사사건 처리의 약간의 문제에 관한 의견(最高人民法院, 最高人民檢察院, 公安部, 司法部關於辦理實施‘軟暴力’的刑事案件若幹問題的意見)’은 기망·공갈 사건에 연폭력의 개념을 도입했다. 구체적인 폭행·협박의 정도에는 이르지 못하나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것처럼 불안한 심리 상태를 유도하거나 귀찮게 하는 괴롭힘 등이 포함됐다.

연폭력은 주로 범죄단체 관련 사건에서 많이 인용되는 용어였다. 직접적인 폭행을 행사하지 않아도 여럿이 모여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는 행위 등에 적용됐다. 연폭력은 합법과 불법의 중간에 있는 회색지대였는데, 명문의 규정을 통해 불법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한 중국 드라마에는 흠모하는 여인과 오붓한 시간을 위해 여인이 나올 문 앞을 지키고 있다가 들고 있던 화분을 일부러 떨어뜨려 차 한 잔의 기회를 배상으로 요구하는 팽자 사례가 등장한다. 자신의 신체나 재산을 해쳐 불법적인 이익을 편취하는 건 절대로 금지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짝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얻기 위한 팽자, 과거 시장통에서의 가짜 도자기 팽자는 지금의 그것들과 비교하면 조금은 낭만이 있었던 것 같다. 점점 더 법의 잣대로 재단해야 할 일이 많아진다는 게 꼭 바람직한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