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9 자주포는 현재 국군 포병의 중추다. 좋은 성능에 비해 가격이 저렴해 해외 판매에도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K9 자주포는 현재 국군 포병의 중추다. 좋은 성능에 비해 가격이 저렴해 해외 판매에도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무기는 공산품이지만 정치적, 군사적 변수 때문에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더구나 자국에서 개발된 무기가 아닌 경우나 원천 기술을 제삼국이 보유하고 있는 경우라면 더욱 제약이 많다. 우리나라는 1974년부터 시작된 국방부의 군대 현대화 군사 계획인 율곡사업을 통해 본격적으로 국산 무기 개발에 나섰다. 출발이 늦은 만큼 당연히 수출 역사도 길지 않다. 기반이 없어 미국의 M16A1 소총을 면허 생산한 것이 무기 국산화의 시작일 만큼 어려움이 많았다. 이후 하나하나 기술을 습득하며 영역을 넓혀나갔다. 처음에는 국군을 무장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점차 자신감을 얻어 해외 시장을 노크했다. 그리고 2021년에는 총 46억달러(약 5조6000억원) 규모의 무기를 해외에 판매했는데, 이는 세계 9위에 해당한다.

소총부터 최첨단 미사일, 전투기, 전투함에 이르기까지 품목도 다양하다. 그야말로 괄목상대한 성장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많은 무기 중에서 최고의 성공작을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코 K9 자주포다. 현재 7개국에 680여 문의 기술, 부품, 완제품 수출이 이뤄졌고 향후 이집트를 비롯한 많은 나라에 수출을 추진 중이다.

도입국 중에는 미국이나 서유럽 강국들의 텃밭이라 할 수 있는 노르웨이, 호주 같은 국가도 있다. 특히 최근에 계약을 체결한 호주는 미국·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5개국의 기밀 정보 동맹체인 ‘파이브 아이즈(Five Eyes)’의 일원이자 영연방의 주요 구성원이어서 파급력이 상당하다. 한화디펜스는 이를 기반으로 자주포 도입을 고려 중인 영국과 미국에도 진출을 도모하고 있다.

K9이 이렇게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이유는 가격 대비 성능이 좋기 때문이다. 현재 실전 배치된 모든 자주포 중에서 성능은 자타가 독일의 PzH2000 다음으로 손꼽을 만큼 뛰어나지만, 가격이 30%에 불과하다. 무기는 후속 지원도 중요한 문제인데 K9은 1800문 이상이 배치되거나 조만간 배치될 예정이어서 걱정이 없다. 여기에 더해 냉전이 종식된 후 PzH2000을 비롯한 경쟁작들의 수요가 축소되거나 개발 자체가 취소되면서 자주포 시장이 재편된 이익도 충분히 누렸다. 우선 개발국인 한국이 1300문 이상을 운용한다는 점이 도입국으로부터 신뢰를 받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개발한 나라의 군대조차 사용하지 않거나 도입을 축소하는 무기라면 해외 판매가 어렵다.


1. 빅커스 Mk. E 전차는 정작 개발국에서 채택하지 않았지만 여러 나라에 판매됐고 소련, 폴란드, 미국, 일본, 이탈리아 등이 개발한 경전차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사진 위키피디아 2. 소련의 T-26은 빅커스 Mk. E를 기반으로 개발된 경전차로 흔히 소련 전차의 시조새로 불린다. 이후 전차 역사에서 소련 그리고 현재 러시아의 위상을 생각한다면 빅커스 Mk. E가 끼친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1. 빅커스 Mk. E 전차는 정작 개발국에서 채택하지 않았지만 여러 나라에 판매됐고 소련, 폴란드, 미국, 일본, 이탈리아 등이 개발한 경전차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사진 위키피디아
2. 소련의 T-26은 빅커스 Mk. E를 기반으로 개발된 경전차로 흔히 소련 전차의 시조새로 불린다. 이후 전차 역사에서 소련 그리고 현재 러시아의 위상을 생각한다면 빅커스 Mk. E가 끼친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엉뚱한 곳에서 꽃이 피다

그러나 무기는 특수성이 있다 보니 종종 예외도 등장한다. 개발국에서 성능 부족을 이유로 도입을 거부했지만 해외 판매에 엄청난 성공을 거둔 예가 있다. 그것도 이를 도입한 나라에서 해당 무기의 시조새 같은 노릇을 담당하기도 했다. 놀랍게도 도입한 나라들이 이후 해당 무기 분야를 선도하는 국가가 됐다.

영국의 빅커스(Vickers) Mk. E 전차가 이런 희귀한 사례의 주인공이다. 전차는 제1차 세계대전 말에 등장했지만 종전 이후에서야 제대로 된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1920년대에 당시 기술을 고려해서 제일 먼저 실용화된 것이 경전차였다. 작고 가벼워서 기동력은 좋지만 방어력과 공격력은 빈약해서 신속히 전선을 돌파하는 용도로 운용했다.

이런 시대상을 배경으로 1928년에 탄생한 전차가 바로 빅커스 Mk. E다. 이전 전차들은 구동 계통에 결함이 많아서 개발사인 빅커스는 안정성 확보에 초점을 맞췄다. 그런데 정작 영국 육군은 외형상으로 약해 보인다는 이유로 채택을 거부했다. 다만 대공황의 여파로 경영상 어려움이 심각했던 업체의 사정을 고려해 해외 판매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이에 빅커스가 대대적으로 해외 판촉에 나서자 핀란드, 불가리아, 그리스, 태국처럼 기갑부대를 창설하거나 폴란드처럼 자력으로 전차를 개발하던 나라들이 관심을 보였다. 그러한 나라 중에는 소련, 미국, 일본, 이탈리아도 있었다. 특히 소련이 이를 기반으로 개발한 T-26은 자국 전차의 시조로 대접받으며 이후 많은 후속 전차에 영향을 끼쳤다.

영국에서 만든 빅커스 Mk. E가 137대인 반면 T-26이 1만 대 이상이 제작됐다는 점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빅커스 Mk. E와 이를 카피한 전차들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경전차라는 한계로 말미암아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지 못했지만, 자국에서 거부된 빅커스 Mk. E는 이처럼 전차 역사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국내에서 팔도도시락은 컵라면 제품 중에서 인기가 많은 편이 아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국민 라면 대접을 받으며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2021년 현재 러시아 현지 매출이 국내 매출의 5배 정도이고 다쉬락(도시락)이라는 이름이 제품을 상징하는 명사로 정착되었을 정도다. 90년 전 빅커스 Mk. E의 사례가 같은 곳에서 반복되는 것 같아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