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얀스크 비행장에 착륙한 Ju-52 수송기에서 보급품을 하역하는 모습. 공군의 지원 덕분에 고립된 독일 제2군단은 계속 저항할 수 있었고 결국 승리했다. <사진 :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데미얀스크 비행장에 착륙한 Ju-52 수송기에서 보급품을 하역하는 모습. 공군의 지원 덕분에 고립된 독일 제2군단은 계속 저항할 수 있었고 결국 승리했다. <사진 :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1942년 2월 8일, 남북으로 나뉘어 동시에 진격한 소련군 선도 부대들이 마침내 잘루츠예에서 조우했고, 곧바로 후속 부대들이 속속 자리를 잡으며 전선을 단단히 연결시켰다. 그렇게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를 연결하는 중간에 위치한 데미얀스크(Demyansk) 일대에 형성된 지름 20㎞의 포위망 안에 약 10만명의 독일 제2군단이 고스란히 갇혔다. 그런데 이는 소련, 독일 모두 처음 겪는 생소한 순간이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침공으로 독·소전쟁이 발발한 이래 포위전은 수없이 있어왔던 레퍼토리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예외 없이 포위한 주체는 독일군이었고 반대로 그물 안에 갇혔던 것은 소련군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독일에는 영광을, 소련에는 참혹함을 안겨줬다. 민스크, 스몰렌스크, 키예프 등에서 수없이 벌어진 포위전에서 무려 300여만명의 소련군이 고스란히 섬멸됐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데미얀스크에 형성된 거대한 포켓은 최초로 소련이 성공한 포위였고, 반대로 독일은 처음 겪는 위기였다. 그런데 그동안 있었던 전과 때문에 독일은 포위된 적을 섬멸하는 효과적인 방법에 대한 노하우가 있었던 반면 수없이 포위당하며 섬멸되기만 했던 소련은 자신들이 포위망을 완성한 이후에 어떻게 후속 공격을 해야 하는지 제대로 몰랐다.


독일의 사상 초유의 공수작전

이러한 낯선 상황에서 시작한 전투는 이후 두고두고 교훈으로 삼을 만한 엄청난 선례를 남겼다. 미시적으로는 압도적인 적에게 포위당했어도 살아남는 혁신적인 방법을 발견하는 훌륭한 기회가 됐지만, 거시적으로는 이후 엄청난 참화를 불러온 잘못된 선택을 이끄는 동기가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데미얀스크 전투는 독·소전쟁에서 벌어진 전투 중에서 그다지 규모가 크지 않지만 많은 의의를 가지고 있다.

앞에서 소련군이 독일군을 포위했다고 설명했지만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고립을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크다. 당시 제2군단은 단독으로 포위망을 뚫고 독일군 본진이 위치한 로바트 강 서쪽으로 탈출할 수 있는 역량이 충분했으므로, 결코 소련군이 뛰어나서 포위망을 완성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후퇴가 맞았지만 히틀러(Hitler)가 현지 사수를 엄명하면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데미얀스크에 남게 됐던 것이다.

히틀러가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모스크바에 대한 집념 때문이었다. 독·소전쟁이 발발한 이래 파죽지세로 공세를 펼쳤던 독일은 모스크바 부근까지 다가갔지만 일찍 다가온 겨울 혹한으로 고생하다가, 1941년 12월 5일 시작된 소련군의 대반격을 받고 이듬해 1월 말까지 약 150여㎞를 밀려나야 했다. 이때 일부 부대들은 소련의 진격을 저지하기도 했는데 데미얀스크를 사수한 제2군단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좌우 부대들이 밀려나면서 위기에 처했다.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라면 함께 후퇴해야 했지만 히틀러는 나중에 모스크바에서 가까운 데미얀스크를 발판으로 공세를 재개하고자 현지 사수를 명했고 결국 포위당했다. 소련군이 봉쇄만 하고 있으면 제2군단은 배고파서라도 항복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히틀러는 살릴 수 있다고 자신했다. 당시 독일에는 세계 최강을 자부하는 공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이미 공군 수뇌부로부터 항공 수송을 통해 제2군단의 생존에 필요한 1일 270t의 보급이 가능하다고 보고받은 상태였다. 이에 사상 초유의 공수 작전이 개시됐다. 그렇게 73일이 흐른 4월 22일, 독일군 본진과 고립된 제2군단을 연결하는 통로가 뚫려 포위망이 무너질 때까지 1만4500여회에 이르는 비행을 통해 6만5000여t의 각종 물자와 3만여명의 증원 병력이 보급됐다.

이처럼 놀라운 보급 작전을 바탕으로 제2군단이 강력하게 저항하자 소련은 4배나 많은 40만의 병력을 투입하고도 독일군 섬멸에 실패했다. 결국 데미얀스크 전투는 5월 20일, 소련군이 방어로 전환하면서 독일의 승리로 종결됐다. 포위된 10만의 병력을 공수 보급을 통해 살려내고 오히려 불리한 전황을 반전으로 이끈 독일은 전쟁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반면 그물 안에 먹이를 잡아 놓고도 놓친 것도 모자라 크게 다치기까지 했던 소련에 데미얀스크 전투는 그야말로 대망신이었다. 그러나 이때 얻은 독일의 자신감과 소련의 굴욕은 이후 독·소전쟁사를 완전히 바꾸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


약 10만명의 독일 제2군단이 히틀러의 명을 받아 데미얀스크를 사수하다가 적진에 고립돼 포위됐다. 이후 이곳을 두고 격전이 벌어졌는데 그 결과는 독·소전쟁의 향방을 가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약 10만명의 독일 제2군단이 히틀러의 명을 받아 데미얀스크를 사수하다가 적진에 고립돼 포위됐다. 이후 이곳을 두고 격전이 벌어졌는데 그 결과는 독·소전쟁의 향방을 가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히틀러, 과거 경험 안주하다 대실패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11월 22일, 소련 남부의 스탈린그라드 일대에서 비슷한 상황이 재현됐다. 독일 제6군이 도심 일대에 몰려있을 때 소련군이 좌우에서 진격해 포위망을 완성한 것이었다. 데미얀스크 전투의 승리를 기억하고 있던 히틀러는 또다시 공수 작전을 펼쳐 제6군을 지원하는 동안 외부에서 구원군이 뚫고 들어가 포위망을 분쇄할 생각으로 현지 사수를 엄명했다.

하지만 이번에 고립된 제6군은 무려 33만명이어서 데미얀스크의 3배가 넘었던 반면 공군이 수송할 수 있는 능력은 그때와 차이가 없었다. 데미얀스크 전투가 공군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이었음을 히틀러는 간과한 것이었다. 그는 달콤한 기억 때문에 공수 작전을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했으나 변동성이 크고 다양한 전쟁터에서 과거의 성공 사례가 다음에도 무조건 같은 결과를 낼 수 없다는 점을 외면했다.

반면 소련의 대응은 달랐다. 독일군 본진을 최대한 멀리 밀어붙여 통로 재개통을 막았고 동시에 충분한 포병으로 대대적인 타격을 가한 후 기갑부대로 압박해 포위망 제거에 들어갔다. 지난 전투에서 치욕을 겪었던 소련은 포위망 섬멸 방법을 다양하게 연구했고 마침내 결실을 본 것이다. 결국 소련의 대승으로 끝난 스탈린그라드(Stalingrad) 전투는 독·소전쟁의 방향을 바꾼 거대한 전환점이 됐다.

경영도 마찬가지다. 노키아나 야후처럼 한때 최고로 군림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라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로 몰락한 기업의 사례를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실패의 이유는 많지만 과거의 성공에서 얻은 경험을 과신하는 행태도 그중 하나다. 전쟁도, 경영도 과거의 성공은 단지 참고 자료일 뿐이다. 판단을 내려야 하는 이라면 항상 기억해야 할 명제라 할 수 있다.


▒ 남도현
럭키금성상사, 한국자동차보험 근무, 무역 대행업체인 DHT에이전스 대표, 군사칼럼니스트로 활동, 주요 저서 <무기의 탄생> <발칙한 세계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