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자끄 상뻬(Jean-Jaques Sempe)의 그림 속 인물들은 어쩐지 친숙하다. 처음 만나는 사이인데도 그냥 모른 척 지나가기 쑥스러울 정도로. 허리를 깊이 숙여 상뻬가 가느다란 펜선으로 빼곡하게 화면에 담아낸 인물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면 더 놀랍다. 많기도 많은 사람 가운데 같은 표정을 짓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수많은 얼굴 속에 숨어 있는 내 가족, 친구, 이웃의 얼굴을 발견하며 웃음짓다 보면 그 안에 숨은 내 얼굴도 보이는 것 같아 걸음을 멈추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뉴욕의 상뻬> <좀머씨 이야기> 등 인쇄물로 국내 독자와 만났던 상뻬의 대표작도 원화로 만나볼 수 있다. <사진 : KT&G 상상마당>
이번 전시에서는 <뉴욕의 상뻬> <좀머씨 이야기> 등 인쇄물로 국내 독자와 만났던 상뻬의 대표작도 원화로 만나볼 수 있다. <사진 : KT&G 상상마당>

장 자끄 상뻬의 이름을 잘 모르는 사람도 <꼬마 니콜라>의 삽화가라는 설명을 들으면 무릎을 탁 친다. 유머작가 르네 고시니와 상뻬가 의기투합해 탄생한 니콜라는 말썽쟁이 아이들의 학교생활을 익살맞으면서도 사랑스럽게 그려내 전 세계에서 사랑받고 있다. 상뻬가 단독으로 낸 <얼굴 빨개지는 아이> <속 깊은 이성친구> 등의 작품은 그를 따뜻한 감성, 귀여운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 알리는 데 한몫했다. 그런데 마냥 귀여운 삽화를 기대하고 전시장을 찾는다면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익살맞은 동화 삽화를 벗어난 상뻬는 생각보다 어둡고 날카롭고 공격적이다. 약간은 ‘꼬여 있는’ 사람 같다는 느낌도 든다.

KT&G 상상마당 갤러리가 프랑스 마틴 고시아 갤러리와 함께 기획한 ‘장 자끄 상뻬 - 파리에서 뉴욕까지’는 작가 상뻬의 작품 세계 전체를 조명하는 전시다. 전시 제목에서부터 상뻬에게 으레 따라붙는 ‘니콜라 삽화가’란 수식어를 뺐다. 그 대신 상뻬가 처음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파리에서 출발해 미국 주간지 <뉴요커(The New Yorker)> 표지 작업을 위해 도착한 뉴욕에서의 작업까지, 그의 작품활동 60여년을 따라가보는 전시다. 다섯 가지 주제로 분류한 150여점의 원화에는 상뻬의 섬세한 펜선은 물론, 수정테이프로 덧칠한 자국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불행한 유년기 보낸 상뻬

이 전시회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일반적인 전시회 풍경과는 영 딴판이다. 우아하게 뒷짐을 진 채 그림을 응시하는 관객 대신, 허리를 잔뜩 숙이거나 몸을 웅크린 채 그림 구석구석을 뜯어보는 관객이 더 많다. 전시회장을 한 바퀴 둘러본 뒤에 출구로 향하는 대신 왔던 길을 돌아가 작품을 되새김질하는 관객도 종종 눈에 띈다. 그럴 수밖에. 상뻬의 그림은 쓱 보고 지나가면 놓치는 것이 너무 많다. 쓱쓱 그린 것 같은 그림 구석구석에 숨겨둔 유머, 풍자적인 문장까지 읽은 뒤에야 비로소 작품에 붙은 제목이 보이는 그림들이다.

1932년 프랑스 보르도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상뻬는 어머니와 양부 아래에서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다. ‘너무 멍하다’는 이유로 14살 때 학교에서 제적돼 학업을 그만뒀고 치약 판매 세일즈맨, 와인 중개업 등의 일자리를 전전했다. 1950년에 “일자리를 주고 먹여주고 재워주는 곳은 이곳뿐”이라며 군에 입대했지만 문서 위조 혐의로 구금당하고 보초를 서면서 그림을 그리다 쫓겨났다. 그제야 비로소 상뻬는 파리로 향했다. 그해 어느 날 마침내 한 잡지사가 그의 그림을 받아주면서 작가의 삶이 시작됐다.

상뻬가 파리에서 그린 그림 중에는 유난히 음악가, 재즈 연주가를 그린 작품이 많다. 상뻬는 어린 시절부터 라디오를 즐겨 들었고 한때 재즈 악단 입단을 꿈꾸기도 했다. 특히 피아노를 좋아한다는 상뻬가 젊은 날부터 꾸준히 그려온 음악가의 다양한 면면을 전시에서 만날 수 있다.

상뻬의 명성을 탄탄하게 다진 <꼬마 니콜라> 삽화들도 이번 전시에 함께 나왔다. 1950년대 프랑스 초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니콜라와 친구들의 좌충우돌 이야기는 순수한 동심과 함께 허세와 비굴함을 오가는 어른들의 현실도 날카롭게 보여주는 상뻬의 대표작이다. 어딘지 하나씩 결점을 안고 있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 <얼굴 빨개지는 아이> <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 작가 파크리트 쥐스킨트와의 합작 소설 <좀머씨 이야기> 등 상뻬의 대표작 원화 작품도 여럿 만나볼 수 있다.


한국에서 따뜻하고 순수한 그림으로 유명한 장 자끄 상뻬는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을 담아내는 ‘가장 프랑스인다운 작가’로 꼽힌다. <사진 : 위키미디어>
한국에서 따뜻하고 순수한 그림으로 유명한 장 자끄 상뻬는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을 담아내는 ‘가장 프랑스인다운 작가’로 꼽힌다. <사진 : 위키미디어>

재즈음악가 그린 작품 많아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여겨볼 요소는 상뻬의 작품 속에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유머와 풍자다. 그의 작품은 마냥 감성적이거나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스포츠카와 늘씬한 모델들이 잔뜩 늘어선 화려한 광고 촬영 현장의 주인공이 사실은 자그마한 데오드란트(탈취제)라거나 수많은 장정이 비장한 얼굴로 온 힘을 다해 끌어올리고 있는 그물이 낡은 구두로 가득 차 있다는 설정은 우리 삶을 아프게 꼬집는다. 젊은 날 따뜻하고 밝게 세상을 바라보던 작가가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도 엿볼 수 있다. 한때 따뜻한 파스텔톤 색감으로 채색됐던 도시 파리는 상뻬의 최신작 <병든 종이> 시리즈에서 물질 만능주의가 만연한 회색 도시로 바뀌었다.


TIP 전시회 정보

<꼬마 니콜라>의 좌충우돌하는 동심 속에 유머와 풍자가 가득한 60년 작품 세계

▶일정|2016년 8월 31일까지

▶장소|서울 마포구 서교동 KT&G 상상마당 갤러리(2층)

▶관람시간|월~일 11:00~22:00 (입장 마감 20:30, 휴관 없음)

▶관람료|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