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불을 이용해 공격을 가하는 모습을 묘사한 12세기 비잔틴 삽화. 사진 위키피디아
그리스의 불을 이용해 공격을 가하는 모습을 묘사한 12세기 비잔틴 삽화. 사진 위키피디아

불을 자유롭게 다룰 줄 알게 되면서 인류는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던 반면 동전의 양면처럼 불에 의한 피해도 함께 커졌다. 이처럼 불은 상당히 무서운 수단이 될 수도 있기에 이를 이용한 화공(火攻)은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온 전투 기법이다. 다만 화공을 펼치려면 필요한 곳에만 불을 집중하고 상대가 쉽게 끌 수 없도록 제어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중세 말까지 비잔틴 제국(동로마)이 사용한 ‘그리스의 불(Greek fire)’은 그러한 기술을 바탕으로 개발된 대표적인 화공 무기다. 화염방사기처럼 불이 붙은 액체를 멀리까지 분사하는 방식이어서 오늘날 기준으로 보자면 특별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공격을 받는 쪽에서 이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한마디로 당대 최고의 필살기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사라센이 헬리오폴리스를 침공했을 당시에 비잔틴으로 피난한 칼리니쿠스(Callinicus)가 672년 그리스의 불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무기라고 볼 수 있는 여지도 충분하다. 만일 비잔틴 시대에 개발되었다면 굳이 그리스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기원전 850년쯤 아시리아인들이 유황, 기름, 역청을 혼합한 나프타에 불을 붙여 화공을 펼쳤다는 기록이 있다. 기원전 424년 벌어진 델리움 전투에서도 열세에 몰린 보에오티안군이 화염을 이용해 아테네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칼리니쿠스로부터 따져도 그리스의 불은 최소 1500년 전에 탄생했다고 볼 수 있을 만큼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무기다.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원정, 로마의 전쟁 중에도 나프타를 이용한 무기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로마는 오늘날 화염병처럼 항아리에 나프타를 담아 불을 붙인 후 투척기를 이용해 날려 보내는 방식으로 사용했다. 이처럼 오래전부터 존재한 무기라고 추정은 되지만 그리스의 불이 전쟁사에 엄청난 명성을 남긴 때는 비잔틴 시절이다.

7세기 중반 중동,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들불같이 일어난 새로운 ‘슈퍼 파워’가 흔히 사라센으로 통칭되는 이슬람 세력이었다. 힘을 키운 이들이 동방의 보고(寶庫)인 콘스탄티노플을 노렸던 것은 당연했고 그때부터 11세기 중반까지 비잔틴과 사라센 사이에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다. 이때 사라센을 물리친 결정적인 병기가 바로 그리스의 불이었다.

불붙은 나프타는 물속에서도 계속 탈 정도여서 비잔틴 병사들도 상당히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해전에서 많이 사용했고 그리스의 불로부터 공격당한 적함은 침몰할 때까지 타올랐다. 이처럼 그리스의 불은 압도적이었던 사라센이 콘스탄티노플을 번번이 포위해 놓고도 공략에 실패한 하나의 이유이기도 했다.


 

브라운관은 최신 디스플레이와 비교할 때 단점이 많아 이제는 상업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이처럼 필요 없는 기술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사진 위키피디아
브라운관은 최신 디스플레이와 비교할 때 단점이 많아 이제는 상업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이처럼 필요 없는 기술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사진 위키피디아

‘노하우’가 전수되기 위한 조건

이 때문에 그리스의 불은 역대 황제들에 의해 직접 제조 방법이 통제되어 왔던 비잔틴의 일급 전략 무기였다. 비잔틴이 멸망하기 직전 벌어진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전투 당시에 도와주러 온 이탈리아 병사들에게도 끝까지 제조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을 정도였다. 결국 비잔틴이 오스만에 굴복해 역사에서 사라지면서 오늘날 그리스의 불은 명맥이 끊겨버렸다.

반면 수백 년간 이어진 매서운 공격을 끄떡없이 막아낸 그리스의 불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마다 좌절했던 사라센의 고충은 실로 대단했다. 처음에는 불을 끄는 방법을 생각했지만, 그보다 ‘나는 없는데 상대방만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엄청난 자괴감을 느꼈다. 그래서 사라센에서도 유사한 무기가 등장한 것은 역사의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다.

1187년 아랍 역사의 영웅인 살라딘이 예루살렘 왕국을 함락시킨 후 비잔틴 출신의 기술자를 생포하면서 재료와 혼합 비율이 비밀이었던 나프타 제조법이 외부로 전해졌다. 비록 분사기 기술까지는 확보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확보한 노하우를 이용해 그리스의 불과 비슷한 위력을 발휘하는 투척용 화공 무기를 생산해 사용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또한 그리스의 불처럼 현재 제조 방법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사라센이 그리스의 불로부터 가장 고통을 많이 받았지만, 마치 오늘날 일부 국가만 보유한 핵폭탄처럼 이런 무기를 비잔틴과 자신만이 가지고 있기를 원해서 기밀로 유지한 결과다. 이 때문에 그리스의 불은 마치 고려청자처럼 오늘날 재현하기 어려운 기술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이는 일종의 오해다. 이보다 강력하고 사용하기 편리한 무기들이 등장하면서 굳이 그리스의 불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는 무기뿐 아니라 일반 상품도 마찬가지다. 코카콜라 제조법처럼 120년 넘게 유지되는 비밀도 있지만, 이제는 브라운관을 수리할 수 있는 기술자를 찾기 어려운 것처럼 더는 필요 없는 기술은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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