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웨스트월드 (West World), 파견의 품격 (ハケンの品格), 불모지대(不毛地帶), 높은 성의 남자(The Man in the High Castle), 비명(碑銘)을 찾아서. 사진 HBO·니혼TV·후지TV·아마존· 최원석 기자
왼쪽부터 웨스트월드 (West World), 파견의 품격 (ハケンの品格), 불모지대(不毛地帶), 높은 성의 남자(The Man in the High Castle), 비명(碑銘)을 찾아서. 사진 HBO·니혼TV·후지TV·아마존· 최원석 기자

‘제품을 공급하는 입장이 아니라 사용하는 입장이었다면’ ‘상대를 이용하는 입장이 아니라 이용당하는 입장이었다면’ ‘그때 다른 사건이 일어나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면 우리와 상대편은 어떻게 됐을까.’

경영전략을 세울 때는 역지사지(易地思之)가 필요하다. 제품이든 서비스든 나(공급자)보다 상대방(사용자) 관점에서 살펴보는 게 기업에 결국 득이기 때문이다. ‘결과’에만 얽매이지 않고 그 과정에 어떤 선택지가 존재했고 어떤 결단이 내려졌는지를 냉정히 분석해봐야 한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할 때도 ‘관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가 중요하다. ‘역지사지 경영’에 도움 될 만한 콘텐츠 5편을 소개한다. ‘웨스트월드’ ‘파견의 품격’ ‘불모지대’는 국내외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를 통해 쉽게 즐길 수 있다. ‘높은 성의 남자’는 아마존 프라임 가입자 한정이지만, 아마존 프라임 1개월 무료체험 서비스를 통해서 전편을 감상할 수 있다.


1│웨스트월드(West World)

미국 유료 케이블 채널 HBO가 ‘왕좌의 게임’에 이어 내놓은 블록버스터 드라마. 천재과학자 포드(앤서니 홉킨스) 박사가 창조한 체험형 테마파크 ‘웨스트월드’가 무대다. 서부 개척시대가 재현된 거리에서 인간과 구분이 어려운 안드로이드가 호스트로서 게스트인 인간에게 봉사한다. 1박당 4만달러 입장료를 낸 손님은 자기 욕망대로 폭력과 섹스 혹은 살인까지도 마음대로 즐길 수 있다. 호스트는 개별적으로 시나리오가 프로그래밍돼 있어 역할이 끝나면 기억이 리셋된다. 하지만 몇 명의 호스트가 자아에 눈을 뜨고, 프로그램에 없는 비정상적 행동을 일으키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앤서니 홉킨스, 에드 해리스, 탠디 뉴튼, 에번 레이철 우드 등 호화 배역이다. 할리우드에서 ‘떡밥의 제왕’으로 불리는 J. J. 에이브럼스가 제작을 맡았다. ‘쥬라기공원’의 원작자 마이클 크라이튼 감독·각본·제작, 율 브리너 주연의 영화 ‘웨스트월드(1973년)’가 원안이다. 인공지능(AI)의 진화를 통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현대적 테마를 다루면서도, 실은 만물의 영장이 가진 탐욕과 폭력성을 인간과 똑같은 모습의 안드로이드를 통해 거울처럼 보여준다. 2016년 시즌 1, 2018년 시즌 2에 이어 2020년에 시즌 3까지 나왔다.


2│파견의 품격(ハケンの品格)

특A급 파견사원인 오마에 하루코(시노하라 료코)와 식품회사 S&F의 마케팅부 동료 사원들 사이에 벌어지는 얘기를 다룬 일본 드라마. 시즌 1은 2007년에 나왔고, 시즌 2가 13년 뒤인 2020년에 나왔다.

3개월마다 계약이 갱신되지 않으면 고용이 해지되고, 휴일이 많으면 한 달에 받는 임금도 줄어들기 때문에 식비마저 줄여야 하고, 서비스 잔업(임금을 못 받는데도 어쩔 수 없이 하는 추가 노동의 일본 용어)이나 계약 이외 일을 지시받아도 거절할 수 없고, 사원 식당 카레마저 정사원보다 비싸게 주고 사 먹어야 하는 등 파견사원이 직면한 현실이 차례로 그려진다.

드라마 성격은 코미디이지만, 슈퍼 파견사원 오마에를 통해 ‘지금 당신이 있는 곳에선 개개인의 업무 능력에 맞는 합당한 대우와 위치가 주어지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묻는다. 특히 한국·일본처럼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이 상대적으로 쉽지 않은 나라에서 빈발하는 ‘사람과 일 사이의 거대한 미스매치’에 대한 것이다.

오마에는 파견사원만이 아니라, 조직에 있지만 공정한 환경에서 충분한 능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수많은 정사원, 오마에가 말끝마다 ‘월급도둑’이라 부르짖는 정사원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만 일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MZ 세대(밀레니얼+Z 세대·1981~2010년생)가 감정 이입할 만하다.

13년 전 시즌 1이 파견사원을 약자로 설정하고 정규직을 강자·악역으로 설정하는 단순명료한 전개였던 것에 비해, 시즌 2는 좀 더 복잡하다. 오마에는 일본의 정사원들이 조직이라는 온실 속에 안주하기만 한다면, 결과는 ‘일본 침몰’이라고 말한다. 여성 파견직 오마에의 일성은 일본뿐 아니라 한국의 많은 정사원 중심 직장에도 똑같이 적용될지 모른다.


3│불모지대(不毛地帶)

‘역사에서 패하거나 죄인이 된 인물이 이를 만회하거나 속죄할 수는 없을까’. 후지TV가 2009년 개국 50주년 드라마로 방영한 ‘불모지대’는 이런 물음의 답을 찾는다. 소설 ‘하얀 거탑’ 등을 쓴 야마사키 도요코(山崎豊子)가 1978년 완간한 5권짜리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육군대학을 수석 졸업하고 일본군 대본영(大本營·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최고 사령부) 참모로 작전을 입안했던 이키 다다시(壹岐正)는 만주에서 소련군에 붙잡힌 뒤 시베리아에 11년간 억류된다. 귀국 후 긴키상사의 다이몬 이치조 사장 요청으로 긴키상사에 취직해 상사맨으로서 국가에 헌신하려 한다.

원작 소설은 육군 참모 출신으로 시베리아에 억류됐다가 귀국한 뒤 이토추상사에 스카우트돼 회장까지 지낸 세지마 류조(瀬島龍三)를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저자 야마사키는 어디까지나 사실에서 영감을 받은 픽션이라고 말했다.

이 작품에 대해 일본군이 태평양전쟁 때 저지른 과오를 제대로 그리지 않았거나 미화했다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에서 지고 역사의 죄인이 된 한 남자가, 이후 경제전쟁 한복판에 뛰어들어 신념을 갖고 공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전후 일본 경제 성장의 원동력을 엿볼 수 있다.


4│높은 성의 남자(The Man in the High Castle)

필립 K. 딕의 소설 ‘높은 성의 남자(1962년)’를 아마존 프라임 전용 드라마로 만든 것. 필립 K. 딕 소설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페이첵’의 원작으로도 유명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이 승리한 이후,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 동부와 서부를 분할 점령한 1962년 미국이 무대다. 레지스탕스, 이중 스파이, 병세가 악화되는 히틀러의 후계자를 둘러싼 음모 등이 연합국의 승리 내용을 담은 필름의 수수께끼를 축으로 전개된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4개 시즌이 나왔다.

뉴욕 지하철 차량 좌석을 욱일기와 나치 문양으로 장식하는 식의 과감한 설정과 자국중심주의 이른바 ‘국뽕’이 배제된 스토리가 신선하다.


5│비명(碑銘)을 찾아서

‘높은 성의 남자’의 한국 버전. 작가 복거일이 1987년 발표한 소설이다.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시도했으나 상처만 입히고 실패한다는 가정에서 시작된다. 이로 인해 일본 내 온건파 거두였던 이토가 1925년까지 생존하면서 일본 외교가 실제 역사보다 온건하게 변한다. 일본은 1940년대 미국과 협력 관계를 구축해 동북아를 장악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미·영에 우호 노선을 지켜 번영한다. 조선은 1910년 일본에 강제병합된 이후 ‘내지화 정책’에 따라 1940년대 말까지 조선어와 역사를 잃게 된다.

‘높은 성의 남자’나 ‘비명을 찾아서’의 본질은 같다. ‘결과’에 얽매이지 않고 그 과정에 어떤 선택이 존재했고 어떤 결단이 내려졌는지 냉정하게 분석하는 것이다.

최원석 조선일보 국제경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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