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시장 점유율 40%로 세계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리나라 조선해양산업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최근 중국 조선업이 위협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데다 기존의 조선업은 성장의 한계를 맞았다는 분석도 높다. 업계 전문가들은 하루 빨리 ‘조선’에서 ‘해양’의 방향으로 조선해양산업의 초점을 바꾸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최근 세계적으로 고유가가 이어지면서 해양자원 개발이 확대돼 해양플랜트 분야의 성장 가능성이 더 높아지고 있다. 해양플랜트 산업을 중심으로 한국 조선해양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살펴봤다.

2007년 8월2일은 러시아에게 매우 중요한 날이었다. 수심 4302m 아래 북극해의 깊은 밑바닥에 티타늄으로 만든 국기를 꽂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앞서 2001년 극지(極地)를 가로지르는 2000㎞ 길이의 해저산맥인 로모노소프 해령(海嶺)이 자신들 영토의 연장이라는 주장을 유엔에 제기했다가 증거 부족으로 인정받지 못했었다. 그런데도 심해 잠수정을 보내 이곳에 러시아 국기를 꽂고 자국 영토임을 선언하는 퍼포먼스를 벌인 것이다.

세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된 이 일은 여러 가지 의미를 던져주었다. 북극해는 막대한 석유 및 천연가스가 매장돼 있을 뿐 아니라 수에즈 운하에 비견될 정도의 해운 요충지로 주목받고 있다. 러시아는 국기 퍼포먼스를 통해 북극해 영유권 주장을 선점한 데 이어 그곳까지 과학자를 보낼 수 있는 유인(有人) 잠수정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한 것이다.

여러 선진국들이 해양 영토 확보와 해양 자원 탐사에 힘을 쏟고 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흔히 ‘자원의 보고’로 불리는 바다에는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저장돼 있다. 세계 석유 생산량의 30%를 해저 유전에서 생산하고 있고, 망간·니켈·코발트·구리 등 4대 광물의 이용 가능 연수가 육지는 41~112년인 데 반해 바다는 188~1만1904년에 이른다. 거의 무한대라는 얘기다. 또한 조류(潮流)·조력(潮力)·파력(波力) 등 해양 에너지 자원은 150억㎾로 추산되고 있다. 여기에 해양 심층수, 가스 하이드레이트 등 잠재적으로 이용 가능한 해양자원 또한 막대하다. 바다에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 현대중공업의 ‘악포 FPSO’는 우리나라의 하루 소비량인 200만 배럴의 원유를 저장할 수 있는 하부 선체설비와 하루 약 2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정제할 수 있는 상부설비로 구성된 초대형 설비다.
- 현대중공업의 ‘악포 FPSO’는 우리나라의 하루 소비량인 200만 배럴의 원유를 저장할 수 있는 하부 선체설비와 하루 약 2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정제할 수 있는 상부설비로 구성된 초대형 설비다.
바닷속 광물자원 1만년 이상 사용 가능
바닷속 자원 개발에 대한 기술력과 경제성만 보장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물질을 바다에서 얻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이정환 한국해양대 석좌교수는 “우리나라가 해양 국가를 지향해야 하는 이유는 그곳에 우리의 미래가 있고, 21세기 새로운 국가 성장 동력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해양 자원 개발에 필수적인 것이 바로 해양플랜트 시설이다. ‘해양플랜트(Offshore plant)’란 쉽게 말해 해양자원을 개발하거나 채취·운송하기 위해 사용되는 해양 구조물을 모두 포함한다. 시추선과 같은 특수 선박이나 해상 발전소, 유류 저장시설 등의 설비가 모두 해당된다.

해양 자원으로는 광물 자원과 해수, 에너지 자원 등이 있지만 석유와 가스 자원이 가장 큰 관심 대상이다. 현재의 해양플랜트 시설 대부분도 석유와 가스 채취를 위한 것들이다. 때문에 해양플랜트의 역사는 해저 유전개발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최근에는 전 세계적으로 대기환경에 대한 규제가 높아지면서 해저 LNG(액화천연가스) 및 가스 하이드레이트 시추 등에 대한 수요도 늘어나고 있다.

값싼 단가로 맹추격하는 중국 조선산업
세계 조선 1위 자리를 지켜오던 우리나라는 지난 2009년 하반기부터 선박 수주 잔량에서 중국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이는 중국 정부가 선박 건조를 자국의 조선소에 몰아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용환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학과장은 “조선 분야는 충분히 성숙하다 못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고, 중국이라는 강력한 후발주자가 값싼 단가로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해양플랜트 시장은 우리나라가 결국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설명했다.
위기를 맞고 있는 조선해양산업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서도 해양플랜트 산업 육성에 보다 빠르게 대처해야 한다는 의견이 높다. 조선 분야에서는 중국의 큰 위협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고부가가치 선박을 포함한 해양플랜트 수주에 있어서는 중국을 크게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에서도 해양플랜트 산업 지원에 적극 나서고 있다. 박광순 산업연구원 성장동력산업연구실 선임연구위원은 “극한환경 해양플랜트는 다른 산업에 비해 R&D(연구개발) 규모가 크고, 기술 개발에 대한 위험부담도 크기 때문에 민간 차원의 기술개발이 쉽지 않아 정부 차원의 전략적 기술 개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 2월 산업통상자원부는 글로벌 기업인 GE(제너럴 일렉트릭)와 해양플랜트를 포함해 헬스 케어, 중형항공엔진 분야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하고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바 있다. 이에 앞서 지난해 10월 박근혜 대통령은 제프리 이멜트 GE 회장을 만나 해양플랜트 투자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박 대통령은 “해양플랜트가 미래 유망산업이며 이 분야에 대한 제너럴 일렉트릭의 투자는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GE는 해양플랜트의 핵심기자재 중 하나인 BOP(Blow Out Preventer)의 해외투자 입지로 한국을 우선 검토하겠다는 계획이다. BOP는 드릴십(Drillship·시추선)의 핵심 부품으로 심해에서 압력 분출을 막아주는 밸브 시스템을 말한다.

해양플랜트 시장은 점점 극한환경으로 나아가고 있다. 북극해와 같은 극지 및 수심 4000~5000m 이상의 심해저(深海底)에는 현재 전 세계 미발견 석유의 13%, 미발견 가스의 30%가 부존(賦存)하고 있다. 극한환경에 필요한 해양플랜트는 연안 지역에 비해 가혹한 조건에서 견딜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공훈 KEIT 플랜트 PD는 “극한환경에서 사용되는 해양플랜트는 다양한 유빙(流氷)과 파랑(波浪), 바람, 그리고 시야에 영향을 주는 안개와 어둠의 영향을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하고, 영하 55℃ 이하의 저온에서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극한 환경 해양플랜트 2030년 세계 100조 시장
때문에 극한환경에 필요한 고(高)기술력의 해양플랜트 수요도 계속해서 높아질 전망이다. 이공훈 PD는 “우리나라는 해양플랜트의 건조 기술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지만, 설계 및 기자재 기술 분야는 아직 해외 선진 기업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 늦기 전에 새롭게 대두되는 극한환경 해양플랜트 시장 진출을 위해 기술력을 높여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현재의 추세대로라면, 전 세계 극지 및 극한환경 분야의 해양플랜트 시장 규모는 지난 2012년 약 15조원에서 매년 평균 6~7%씩 증가해 2030년께는 약 100조원 이상의 시장이 형성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2013년). 자원의 해외 의존율이 97%에 달하는 우리나라로서는 원활한 자원 공급처를 확보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해양플랜트 산업은 자원개발을 위한 도구적 가치로서도 큰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는 2012년 ‘극지정책 선진화 방안’, 2013년 ‘북극 종합계획 추진계획’, 2012년·2013년 ‘해양 플랜트산업 발전방안’ 등을 발표하며 정부 차원의 종합적인 대책을 만들어가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미래창조과학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미래성장동력 프로젝트’의 해양플랜트 부문 추진단장을 맡고 있는 황보승면 삼성중공업 고문은 “조선 분야는 중국 정부가 강력한 재원을 들여서 도와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산업계가 대응하기에는 역량이 모자랄 수밖에 없다. 중국이 저가 선박 위주로 진입해서 위협을 주고 있고 차츰 고가 선박으로도 진출할 텐데, 우리나라가 장기적으로 경쟁할 수 있으려면 고부가가치 선박 분야의 선점을 계속해서 지켜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1. 대우조선해양이 지난 2011년 1월 프랑스 토탈사로부터 수주 후 제작·인도한 세계 최대 규모의 파즈플로 FPSO는 길이 325m, 폭 61m, 높이 32m에 자체 무게만 12만t 규모에 이른다.2. 삼성중공업이 건조한 극지용 드릴십 ‘스테나 드릴막스(Stena Drillmax)’는 바다 위에서 해저 11km까지 드릴장비로 파내려 갈 수 있고, 16m의 파고와 초속 41m의 강풍 속에서도 움직이지 않도록 최첨단 위치제어 기술이 적용됐다. 극지용인 만큼 영하 40도에서도 작업이 가능하다.
1. 대우조선해양이 지난 2011년 1월 프랑스 토탈사로부터 수주 후 제작·인도한 세계 최대 규모의 파즈플로 FPSO는 길이 325m, 폭 61m, 높이 32m에 자체 무게만 12만t 규모에 이른다.
2. 삼성중공업이 건조한 극지용 드릴십 ‘스테나 드릴막스(Stena Drillmax)’는 바다 위에서 해저 11km까지 드릴장비로 파내려 갈 수 있고, 16m의 파고와 초속 41m의 강풍 속에서도 움직이지 않도록 최첨단 위치제어 기술이 적용됐다. 극지용인 만큼 영하 40도에서도 작업이 가능하다.


“해양플랜트 무조건 ‘고(GO)’해야 한다”
고용창출 면에서도 해양플랜트 시장의 가치는 높게 평가되고 있다. 세계 해양플랜트 시장 규모는 2010년 1452억달러(약 148조원)에서 2030년 5039억달러(약 514조원)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산업통상자원부·2013년). 특히 설계 및 R&D(연구개발) 분야를 담당하는 전문기술 직종의 경우 2020년까지 1만명 이상의 신규 기술 인력이 필요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엔지니어링 플랜트팀·2012년). 또한 해양플랜트 기술을 활용한 해양 구조물은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시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해양호텔이나 해양목장, 해상공항, 인공섬 등 새로운 해양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큰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되는 해양플랜트 산업 인력은 조선 분야보다 크게 모자란 상태다. 국내 조선소의 인력 현황을 보면, 조선이 71.4%, 해양이 14.0% 정도로 큰 차이가 난다(2012년 기준).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3대 조선해양업체 내의 인력 분포 역시 조선 분야가 해양 분야의 2~3배에 달한다.

황보승면 산업통상자원부·미래창조과학부 해양플랜트 추진단장은 “반도체와 같이 소니가 삼성전자에 의해 하루아침에 추월당하는 그런 시장 구조와 달리 조선과 해양은 기술이 일단 형성되면 고용 창출은 물론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어갈 수 있는 좋은 산업이다. 현재 국내 조선해양산업이 약간 주춤하고는 있으나 한국처럼 대형 구조물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진 나라가 거의 없다. 기술 면에서 싱가포르가 어느 정도 뒤따라왔지만 큰 규모의 구조물에서는 아직 한계가 있다. 제대로 기술력만 갖춰놓으면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일자리를 만들며 먹거리를 생산해낼 수 있기 때문에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산업”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