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에 최첨단 과학기술이 접목되면서 고부가가치 창출로 이어지고 있다. 비단을 뽑던 누에고치에서 실크단백질을 추출해 인공고막을 만들고, 꿀벌의 봉침액인 봉독을 원료로 화장품이나 천연 항생제를 만들고 있다. 농업과 첨단기술의 융·복합으로 인해 사양산업으로 치부되던 국내 양봉·양잠산업이 다시 일어서고 있다.
- 아이비영농조합법인에서 생산하는 꿀 관련 제품들
- 아이비영농조합법인에서 생산하는 꿀 관련 제품들

물 맑고 공기 좋기로 유명한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왕창리.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길을 따라 마을 끝 외진 곳에 이르자 현대식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안에 들어서자 달콤한 꿀 냄새가 확 풍겨왔다. 상품 진열대에는 꿀뿐만 아니라 술, 치약 등 양봉산물을 이용한 다양한 제품이 놓여 있었다.

바로 농가들이 생산한 양봉산물로 다양한 가공품을 개발해 양봉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아이비영농조합법인이다. 18개 양봉농가로 구성된 이 영농조합의 지난해 매출액은 15억원. 2007년 설립 당시 매출이 5000만원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엄청난 성장세다.

이 영농조합의 양경열 회장은 “이젠 양봉농가들도 꿀에만 의존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며 “꿀이나 벌집 등을 이용한 다양한 가공품을 개발해 부가가치를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양 회장이 1999년 귀농한 이래 ‘어떻게 하면 양봉으로 돈을 벌 수 있을까’라는 끊임없는 물음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

그가 양봉에 뛰어든 것은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됐다. 인천에서 식품유통업을 하던 그는 ‘진짜 꿀이나 따먹자’는 생각에서 지인으로부터 벌통 17개를 사서 벌을 쳤다. 3일에 한 번 1ℓ 정도의 꿀을 땄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골치 아픈 사업보다 벌이나 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3000만원을 들여 양봉을 시작한 곳이 바로 왕창리였다.

하지만 양봉에 문외한이었던 그에게 벌을 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인근 양봉농가를 찾았지만 노하우를 쉽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농업기술센터를 찾아 꿀벌 사육기술을 배우고, 지역 양봉연구회에서 다른 농가의 경험도 습득했다. 하지만 첫 해 소득은 2000만원에 불과했다. 그 다음해에도 소득은 크게 늘지 않았다. 오히려 무거운 벌통을 옮기다 목 디스크만 생겼다. 하지만 목 디스크는 그에게 소득을 높일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게 한 단초가 됐다. “한의원에서 벌침으로 디스크를 치료했어요. 그때 벌이 공격할 때 쏘는 침에 들어 있는 ‘봉독(봉침액)’이 엄청난 부가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 양경열 아이비영농조합법인 회장이 봉독을 살펴보고 있다. 1g이 40만원에 팔리는 봉독은 고부가가치 양봉산물이다.
- 양경열 아이비영농조합법인 회장이 봉독을 살펴보고 있다. 1g이 40만원에 팔리는 봉독은 고부가가치 양봉산물이다.

봉독 1g 40만원에 팔려
당시 미국으로부터 수입된 봉독 1g의 가격은 105만원이었다. 그의 요청으로 농촌진흥청은 2005년 봉독 채집기와 정제기술을 개발했다. 벌이 침을 쏘면 죽지만 봉독 채집기는 전기적 자극으로 벌에 피해를 주지 않고 봉독을 채집할 수 있다. 정제기술은 채집한 봉독에서 이물질을 없애고, 순수한 봉독만을 정제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이 조합에서 생산한 봉독 1g의 가격은 40만원이다. 그가 냉동고에 보관 중인 봉독은 2㎏으로 무려 8억원어치였다.

“봉독은 천연항생물질입니다. 가축에 사용하는 항생제 대신 활용할 수 있어요. 원래 축산농가에서는 질병 등을 예방할 목적으로 살아있는 벌의 봉침을 이용했죠. 하지만 너무 불편해 기피하게 됐어요. 봉독을 2000배가량 희석한 주사제를 이용하면 가축의 질병을 예방하는 것은 물론 소비자들에게는 무항생제로 키운 안전한 축산물을 제공할 수 있게 됩니다.”

지난해에는 농촌진흥청과 경기도농업기술원의 지원으로 경기도의 양돈농가에 시범사업으로 봉독을 공급했다. 봉독이 축산농가의 가장 큰 고민거리인 항생제 투여를 줄이고 맛 좋은 육질을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뿐만 아니라 봉독은 화장품 원료로도 쓰인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정제 봉독이 영국으로 수출돼 화장품 원료로 이용되고 있다. 미국 등 여러 나라로부터 큰 관심을 받고 있어 앞으로 수출확대도 기대되고 있다.

그는 봉독 외에도 프로폴리스·로열젤리·화분(꽃가루) 등 다양한 양봉산물의 활용방안을 모색했다. 벌집을 안전하게 지키는 물질인 프로폴리스를 손쉽게 추출하는 방법을 개발해 프로폴리스 치약을 만들었다. 꿀을 이용한 ‘허니와인’도 출시했다. 꿀의 함량이 30%로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특징인 허니와인은 2012년, 2013년 ‘우리술품평회’에서 2년 연속 대상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꿀벌의 사료인 대용화분도 개발했다.

이 조합의 꿀은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여왕벌 육종에서부터 꿀을 딸 때까지 양봉의 모든 단계를 매뉴얼화했기 때문이다. 양봉농가들이 스테인리스 용기에 꿀을 모아오면 수분측정 등을 한 후 농축과정을 거쳐 포장, 출하한다.

과거 양봉농가 소득의 70~80%를 차지했던 꿀은 지금은 50% 정도로 낮아졌다. 그 자리를 봉독(30%), 프로폴리스·로열제리 등(20%)이 대신하고 있다. 소득도 크게 늘었다. 양봉농가의 평균 연소득은 꿀만 생산할 때보다 2배가량 증가했다. 양 회장의 경우 지난해 3억원의 소득을 올렸다.

양 회장은 지금도 양봉을 활용한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에 골몰하고 있다. “해마다 꿀 생산량이 줄고 있어요. 양봉을 하는 사람도 대부분 고령의 농업인이죠. 꿀벌을 따라 전국을 돌아다니기 때문에 힘들어서 젊은 사람들은 안 하려고 해요. 양봉농가가 더 많은 소득을 올리고, 젊은이들이 양봉농업에 뛰어들 수 있도록 다양한 고부가가치 상품을 개발할 생각입니다.”

- 누에와 누에고치가 다양한 기능성 식품과 화장품, 의약 소재로 개발되면서 양잠산업도 활기를 띠고 있다.
- 누에와 누에고치가 다양한 기능성 식품과 화장품, 의약 소재로 개발되면서 양잠산업도 활기를 띠고 있다.

의료용 소재로 탈바꿈한 누에고치
값싼 중국산 누에고치 탓에 고사 위기에 몰렸던 국내 누에산업도 최근 활기를 되찾고 있다. 건강기능식품은 물론 첨단 의료용 소재로 각광받으면서 미래의 농가 소득원으로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누에는 1960~70년대에 농가의 주요 소득원이었다. 당시 양잠농가 수는 50만가구에 달했다. 하지만 값싼 중국산 누에고치에 밀려 누에농가는 2011년 1100가구로 급감했다.

이렇게 곤두박질치던 양잠산업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은 것이 바로 기능성 양잠이다. 오로지 실크를 뽑아내는 데만 주력했던 양잠에서 벗어나 누에를 기능성 식품과 화장품, 의약품 등으로 재탄생시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 낸 것이다.

누에에 버섯포자를 뿌려 재배하는 동충하초, 건조누에 분말로 만든 혈당강하제(당뇨병 치료제), 누에고치의 주성분인 ‘피브로인’과 ‘세리신’ 등으로 만든 화장품 등 기능성 제품이 양잠산업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최근에는 누에고치 단백질을 의료용 재료로 이용하기 위한 연구도 활발하다. 누에고치로 만든 인공고막은 올해 말 상용화가 예상되고, 인공 뼈로 활용하기 위한 연구도 한창이다.

누에고치에서 뽑은 실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수술용 봉합사로 사용돼 그 안전성이 입증됐다. 이러한 실크 단백질의 생체안전성에 착안해 농촌진흥청은 한림대의료원과 함께 2008년부터 누에고치를 의료용 소재로 개발하기 위한 연구에 돌입했다.

하지만 연구개발 과정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농촌진흥청 잠사양봉소재과의 권해용 박사는 “누에고치에서 추출한 단백질을 일정한 형태로 만드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며 “미국, 일본 등에서도 누에고치를 생체 재료로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고 말했다.

농진청은 2년여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2009년 12월 세계 최초로 실크인공고막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실크인공고막은 사람의 원래 고막과 비슷한 두께와 시술에 적합한 강도를 가지고 있다. 표면이 치밀하고 매끈해 손상된 고막을 빠르게 재생한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고막시술법은 고막성형술과 종이패치술로 나뉜다. 고막성형술은 고막 재생이 우수하지만 환자 몸에서 근육막을 떼어내 수술해야 하는 불편이 뒤따르고, 비용이 많이 든다. 반면 종이로 된 패치를 붙이는 종이패치술은 시술이 간단하고 저렴하지만 손상된 고막의 크기가 작은 일부 경우에만 쓸 수 있는 단점이 있다.

실크인공고막이 상용화되면 고막재생효율은 고막성형술과 비슷하면서도 시술은 종이패치술처럼 간단하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실크인공고막이 새로운 고막 재생용 재료로 인기를 끌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누에고치 생산농가의 소득증대로 이어질 전망이다. 실크인공고막용 누에고치 생산농가 소득은 섬유용 누에고치 생산농가 소득 대비 2배가량 높다.

농진청은 한발 더 나아가 인공뼈 만들기에도 도전하고 있다. 실크 단백질은 우리 몸의 세포와 세포 사이를 메우고 있는 섬유상태의 단백질인 ‘콜라겐’과 비슷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실크 단백질을 잘게 자른 뒤 필요한 단백질 조각을 정제해 인공뼈의 소재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 권 박사의 설명이다. 이미 잇몸뼈 상용화를 목전에 두고 있다.

권해용 박사는 “양잠산물의 다양한 기능성이 알려지면서 수요가 증가해 농가의 양잠산물 생산액이 최근 급격히 늘고 있다”며 “누에의 다양한 변신을 통해 양잠산업이 미래 성장동력산업으로 거듭나고 있다”고 말했다.

- 권해용 농진청 잠사양봉소재과 박사는 “부가가치가 높은 양잠산물이 늘어나면서 양잠산업도 새롭게 거듭나고 있다”고 말했다.
- 권해용 농진청 잠사양봉소재과 박사는 “부가가치가 높은 양잠산물이 늘어나면서 양잠산업도 새롭게 거듭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