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 바람에 잡곡의 인기가 뜨거워지고 있다. 대형마트 등에는 조리하기 쉽도록 소용량 단위로 포장된 잡곡 제품이 쏟아지고 있다. 덕분에 잡곡산업도 급성장하고 있다.
선별기를 한 번 거친 잡곡에서 이물질을 일일이 손으로 골라내고 있다.
선별기를 한 번 거친 잡곡에서 이물질을 일일이 손으로 골라내고 있다.
충북 괴산은 예로부터 논보다 밭농사가 발달해 온 곳이다. 토질과 일교차 등 자연환경이 밭작물에 알맞고 타 지역에 비해 재배기술도 앞서 있다. 옥수수나 고추·배추 등이 소비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괴산군이 이들 못지않게 심혈을 기울이는 분야가 바로 잡곡사업이다.

지난 9월11일 찾은 잡곡 전문생산업체인 ‘괴산잡곡’은 분주했다. 검은콩 사이에서 벌레가 먹어 상한 것이나 작은 돌 같은 이물질을 골라내느라 직원들이 손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경종호 괴산잡곡 대표는 “선별기를 한 번 거친 잡곡을 일일이 손으로 다시 고른다”며 “시간이 걸리고 힘든 작업이긴 하지만 그래야 만족스런 품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괴산잡곡은 이 지역의 잡곡을 수매해 도정·선별·가공·포장해서 판매한다. 특히 괴산유기농잡곡작목회의 농가와 계약재배한 친환경인증 잡곡을 사용하는 등 생산·가공·유통을 일원화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괴산잡곡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상당하다. 이 회사가 지난해 농가로부터 수매한 보리쌀·콩·팥·참깨·들깨·수수·율무·메밀·차조 등은 800t에 달한다. 수매가는 일반 판매가보다 40% 이상 비싸다. 이 지역의 잡곡을 통한 농가소득은 전국 평균의 3배에 달한다. 작목회 농가에서 생산하는 여러 가지 잡곡을 사들여 가공·판매함으로써 안정적인 판로를 마련해 줄 뿐 아니라 농가소득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일자리 창출효과도 크다. 2008년 11명이었던 직원은 20명으로 늘어났다. 모두 인근 지역 주민들이다. 경 대표는 “예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잡곡이 이제는 돈이 된다는 공감대가 농가들 사이에 퍼져 있다”고 귀띔했다.

괴산잡곡은 이 지역 농가의 실험실이기도 하다. 가공공장 뒤 3960㎡(1200평) 규모의 밭에서는 다양한 잡곡의 시험재배가 이뤄지고 있었다. 올해에는 식용 피 등 토종작물 외에도 남미가 원산지인 퀴노아와 아마란스가 자라고 있었다. 아마란스는 2m 가까이 자랐지만, 퀴노아는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 작물은 모유에 비교될 정도로 영양이 풍부해 최근 젊은 층으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는 잡곡이다. 가격이 비싸 재배에 성공하면 농가 소득을 한층 높일 수 있다. 경 대표는 “재배 적합성 시험이 끝나는 2015년에는 적절한 재배방법과 함께 농가에 보급할 것”이라고 말했다.

1188㎡(360평) 규모의 저온창고에는 지난해 수매한 잡곡이 일부 남아 있었으며, 올해 수확한 잡곡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잡곡을 수매해 약품이나 훈증처리하지 않고 연중 저온창고에 보관하며 필요한 만큼씩 선별, 도정해 공급하고 있다.

창고에 켜켜이 쌓여 있는 잡곡을 담은 포대에는 생산자뿐 아니라 선별작업자의 이름과 포장일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생산에서부터 소비자에게 가기까지의 모든 이력을 추적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차별화가 바로 괴산잡곡의 성공요인이라는 평가다.

괴산잡곡이 소포장 또는 가공해 판매하는 제품은 모두 50가지에 이른다. 이들 제품은 한살림, 두레 등 생활협동조합을 통해서만 판매되고 있다. 지난해에만 65억원어치를 팔았다. 매년 10% 정도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어 올해에는 70억원을 무난히 넘어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경종호 괴산잡곡 대표(왼쪽에서 여섯 번째)가 직원들과 잡곡 제품을 들어 보이고 있다.
경종호 괴산잡곡 대표(왼쪽에서 여섯 번째)가 직원들과 잡곡 제품을 들어 보이고 있다.

농가소득에 큰 보탬

경 대표는 주요 백화점이나 대형 유통업체가 제품 공급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이 지역의 친환경 잡곡 생산이 한정돼 있고, 공급 물량이 많아지면 품질이 떨어질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괴산잡곡은 1992년 ‘군자농산’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농산물을 공급하던 생활협동조합에서 잡곡분야만 따로 분리해 설립됐다. 출범 당시부터 회사를 이끌고 있는 경 대표는 “얼떨결에 대표를 맡기도 했지만 잡곡분야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농가에서 생산한 잡곡을 사서 가공, 판매하다가 계약재배를 통해 서서히 품목을 늘렸다. 초기에는 대부분의 일을 경 대표 혼자서 해야 했다. 제주도에서 씨앗을 구해오기도 했고, 농가에서 수매한 80㎏들이 포대를 옮길 때는 진땀을 빼야 했다. 첫 해 2000만원에 불과했던 매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친환경인증 잡곡을 계약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인 2003년부터였다. 친환경 농사가 널리 퍼지기 전이라 농가의 반발이 거셌다. 경 대표는 비료나 농약을 안 쓰고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농가를 직접 찾아가 설득해 결국 친환경 재배를 밀어붙였다. 2003년 35농가에 불과했던 친환경 농사를 짓는 농가는 이제 80여 가구로 불어났다.

경 대표는 “이제 밭농사가 벼농사보다 오히려 소득이 많다는 점에서 잡곡 특화재배가 증가하고 있다”며 “수입 잡곡에 대응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밭농사 활성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 대표가 밭농사 활성화를 위해 가장 시급한 것으로 꼽은 과제는 기계화다. 벼농사는 기계 보급률이 거의 100%에 가깝지만, 밭농사의 기계 보급률은 50%에 그치고 그나마 밭작물 수확은 15%에 불과하다. 손으로 직접 심고, 수확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또 수입 농산물이 국내산으로 둔갑하는 것도 철저하게 규제해야 우리 밭작물이 경쟁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잡곡은 예로부터 가뭄과 같은 재해가 발생할 때 단기간에 메마른 땅에서 백성의 기근을 해결해 주는 작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일손이 많이 드는 데다 벼농사에 비해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 때문에 잡곡은 198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2000년 2만3000㏊·2만4000t이었던 잡곡 재배면적과 생산량은 2011년 1만6000㏊·1만8000t으로 줄었다. 반면 수입량은 2000년 4만3000t에서 2011년 5만5000t으로 크게 늘었다.

이처럼 잡곡 재배면적과 생산량이 급격하게 감소한 것은 열악한 생산 환경과 기술에 따른 낮은 생산성과 수입 자유화로 인한 외국산 잡곡과의 가격경쟁력 약화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건강을 위해 잡곡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곡류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잡곡에는 식이섬유뿐 아니라 현대인에게 위협이 되고 있는 심장질환, 당뇨, 치매 등 성인병 예방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미량원소나 폴리페놀류를 비롯한 생리활성 물질을 다량 보유하고 있다. 이 때문에 건강기능성 식품소재로서의 효용성과 함께 농가 소득작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도 잡곡의 품질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기술개발과 잡곡산업의 활성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농촌진흥청은 잡곡 생산성 향상을 위해 품종개발과 지역별 표준 재배기술 확립, 생산거점단지 육성 등을 추진하고 있다.

괴산잡곡은 이 지역의 잡곡을 수매해 도정, 선별, 가공, 포장해서 판매한다. 가공을 거쳐 자동 포장되고 있는 옥수수차 (위). 저온창고에 쌓여 있는 잡곡
괴산잡곡은 이 지역의 잡곡을 수매해 도정, 선별, 가공, 포장해서 판매한다. 가공을 거쳐 자동 포장되고 있는 옥수수차 (위). 저온창고에 쌓여 있는 잡곡


정부 잡곡산업 활성화 나서

농진청은 그동안 생산성이 높은 품종과 고항산화성 품종, 가공 이용성이 높은 품종, 영양성분을 강화한 품종을 개발해 농가에 보급해 왔다. 또 품종별 재배법을 확립해 지역에 맞는 표준재배기술을 마련하고 기계화 기술을 정립하기도 했다.

농진청 관계자는 “농민들이 잡곡 농사를 쉽고 편리하게 짓고 생산성도 높일 수 있도록 재배기술 개발에 적극 나서 왔다”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추진을 통해 잡곡 자급률을 2017년까지 32%로 끌어 올리겠다”고 말했다.

특히 2007년부터 국산잡곡의 품질을 높이고 수입산과의 차별화를 위해 ‘전통잡곡 경쟁력 향상 프로젝트’, ‘웰빙잡곡특성화사업’, ‘웰빙잡곡생산기반조성사업’ 등이 추진됐다. 이러한 사업을 통해 잡곡의 생산·가공·유통이 일원화되면서 낮은 농가소득과 복잡한 유통구조가 개선됐고, 부가가치가 높아지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모델이 구축됐다.

소규모·다수농가 생산구조로 경영규모가 영세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잡곡단지를 육성함으로써 지역중심으로 키워나가는 체제도 도입됐다. 경남 합천에는 우리 밀 단지가, 전남 신안에는 참깨, 경북 영주에는 토종 콩 품종 중 하나인 부석태 단지가 조성됐다. 이러한 잡곡단지는 전국적으로 20여곳에 이른다.

또 잡곡이 보유한 다양한 건강기능활성을 농식품산업과 연계시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기 위한 연구를 강화해 소비확대를 통한 수급안정화 정책도 추진됐다. 농진청 관계자는 “최근에는 다양한 용도의 잡곡 품종이 육성되고 있으며, 기계화에 필요한 재배기술과 부가가치가 높은 가공기술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