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창조경제에 부합되는 기업을 국내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원자현미경으로 실리콘밸리에서도 성공한 파크시스템스다.

초정밀 계측장비를 만드는 파크시스템스는 경기 수원에 본사를 둔 벤처기업이다. 이 회사의 박상일 사장(55)은 미국 실리콘밸리와 한국에서 모두 벤처기업을 창업해 성공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박 사장은 1988년 원자현미경(AFM)을 제작하는 벤처기업 PSI를 실리콘밸리에 세웠다. AFM은 박 사장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특수현미경이다. 일반 광학현미경은 피사체에 부딪친 빛을 모아 피사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시광선으로 볼 수 있는 피사체의 가장 작은 크기는 200㎚(나노미터: 1㎚는 10억분의 1m) 정도. 이보다 작은 나노의 세계를 보려면 다른 도구가 필요하다. 박 사장이 스탠퍼드대 박사과정 시절 고안한 도구는 끝이 뾰족한 지팡이 같은 탐침(探針)이었다. 끝의 직경이 수십 나노미터에 불과한 탐침이 10㎚의 거리로 물체에 접근하면 서로 잡아당기는 힘이 생긴다. 물체와 탐침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잡아당기는 힘도 커진다. 탐침을 끌어당기는 힘을 측정하면, 물체의 높낮이를 수㎚ 수준으로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다. 이렇게 측정한 물체의 높낮이를 컴퓨터가 지도의 등고선처럼 그려주면 인류는 미지의 나노 세계를 보게 된다. 박 사장이 인류에게 나노 세계를 볼 수 있는 AFM이라는 안경을 선물한 것이다. 결국 박 사장은 과학기술을 갖고 완전히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박근혜 정부가 지향하는 창조경제와 일맥상통한다.

현재 파크시스템스는 대당 20억원에 달하는 AFM을 제작하며, 1㎚의 거리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 제품은 신소재의 속성을 파악하는 데 제격이다. 

박 사장도 당초 박사 학위를 마치고 강단에 서려 했다. 하지만 원자현미경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가 미국·독일·일본 등에서 잇따르자 창업에 나섰다. 그는 “실리콘밸리 분위기도 창업에 영향을 미쳤다”면서 “그곳은 벤처사업가를 세상을 바꿀 아이디어를 가진 인재로 평가한다”고 했다. 창조경제의 여건이 갖춰진 곳에서 창업을 한 것이 기업 성공의 초석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박 사장은 HP·애플 같은 실리콘밸리에서 출발한 여느 기업처럼 저축한 돈과 빌린 돈 4만달러를 갖고 친구와 단 둘이서 PSI를 시작했다. 자신의 차고가 PSI의 작업장이었고, 방이 사무실이었다. 세계 최초의 기술을 선도한 덕분에 창업 이듬해인 1989년 일본 NTT에서 “원자현미경이 급하다”면서 10만달러를 선지급하기도 했다. 선도 기업의 이점을 안고 시작한 PSI는 창업 1년 만인 1989년 매출 48만달러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에게 재무관리는 큰 문제였다. 주문과 납기 사이에 생기는 자금 고갈이 1990년 여름 찾아왔다. 직원들에게 월급 줄 돈조차 없었다. 동양인이 창업한 벤처 기업에 신용으로 대출해 주는 은행이 그곳에도 없었다. 박 사장은 결국 스탠퍼드대 동문인 대만 석유 재벌의 아들이었던 스티브 콴을 찾아갔다. 그는 “안면 몰수하고 10만달러가 당장 급하다고 얘기하고 돈을 빌렸다”고 했다.

위기를 넘긴 PSI는 1990년 177만달러, 1991년 368만달러, 1992년 595만달러 등 매년 80% 정도 매출이 증가했다. 1996년 매출이 1200만달러에 이르면서 박 사장은 매각을 결심했다. 그는 “한국이 그리워지면서 귀국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해 1700만달러를 받고 현지의 계측장비 기업인 브루코에 PSI를 팔았다.

원자현미경 NX1 (왼). 박상일 파크시스템스 사장이 연구원들과 함께 제작 중인 원자현미경을 들어보이고 있다. (오)
원자현미경 NX1 (왼). 박상일 파크시스템스 사장이 연구원들과 함께 제작 중인 원자현미경을 들어보이고 있다. (오)

박 사장은 귀국해 1997년 두 번째 창업에 나섰다. 박 사장이 이미 ‘벤처의 메이저리그’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했지만, 가족들과 친구들은 박 사장의 두 번째 창업을 한국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과학자의 치기 정도로 치부했다. 실제로 박 사장은 “2000년대 초반까지 규정을 내세워 떡값을 요구하는 공무원, 꺾기(대출금 일부를 은행에 다시 저축하는 행태)를 강요하는 금융권 등으로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했다. 이런 경영 외적인 어려움에도 박 사장은 꾸준한 기술개발을 이뤘다. 지난해 파크시스템스의 매출은 180억원, 올해 예상 매출은 220억원이다. 현재 전 세계 AFM 시장은 2500억원 규모다. 브루코가 약 60%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고, 파크시스템스는 2위권을 형성하고 있다.

아직 박 사장에게 남아 있는 어려움은 재벌과의 불공정한 경쟁 구도다. 그는 “수십조원을 쌓아 놓은 재벌이 돈을 제때 주기 싫어 여전히 어음을 발행하고, 시민들은 벤처를 대기업에 못 들어간 사람들이 모인 곳쯤으로 여긴다”고 했다. 자연히 입맛에 맞는 인재를 뽑기가 어렵다. 박 사장은 “재벌들이 중소기업·벤처를 상대로 어음을 끊어주는 이자놀이나 해서는 창조경제가 실현될 수 없다”고 일침을 가했다. 또한 “실리콘밸리에 있을 때는 직원 70명 중 스탠퍼드대 박사를 비롯한 박사 학위 소지자가 15명에 달했다”면서 “한국에서는 인재를 구하기가 너무 어렵다”고도 했다.

“재벌이 중소기업에 어음 줘서는 창조경제 난망”
현재 정부는 벤처·중소기업의 인력난을 해소하고자, 석사를 마치고 3년간 지정 업체에 근무하면 병역을 면제해 주는 전문연구요원을 매년 선발한다. “현 제도는 직업 선택의 자유를 내세워 1년 반이 된 전문연구요원의 이직을 허용합니다. 벤처 기업이 1년 반 가르치고 월급 준 전문연구요원들이 재벌 기업으로 이직하는 경우가 다반사예요. 전문연구요원 제도는 벤처 기업을 돕기는커녕 재벌의 인재 양성소로 전락시키는 제도일 뿐입니다.” 박 사장은 “이런 잘못된 점들이 시정돼 벤처가 재벌과 동등한 환경에서 경쟁할 수 있다면, 실리콘밸리의 신화가 한국에서도 그대로 재현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창조경제는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버는 이권 경제나, 타인이 하는 걸 따라 하는 카피 경제에 반대되는 개념”이라며 “남이 하지 않은 걸 해야 창조경제”라고 꼬집었다.